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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도 올렸는데 너무 감상적인데다 장황해서 수정함.
1
난 인생의 위대한 스승인 니체와 부처를 결합시키길 바랐다. 그건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 오랜 방황 끝 포기하려던 찰나, 미궁의 실마리를 찾을 키를 찾았으니 그 키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였다.
카잔자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영혼의 여정을 그린다. 그는 사제를 꿈꿨으면서도 기독교를 깨부순 니체에 경도되었다. 니체가 준 고통을 아물게 하고자 부처를 꿈꿨으면서도, 고통 받는 모든 이를 보듬기 위해 성 프란체스코가 되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남김없이 핥아대는 강아지처럼 삶을 핥아대는 알렉시스 조르바를 꿈꿨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사상을 결합하려 했고, 나 역시 그렇다. 나를 고민하게 한 니체와 부처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생성과 변화를 반복한다. 세계의 본질은 덧없는 변화다.
2. 이런 세계관 때문에 허무주의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들은 허무감에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직면하고 현재를 중요시하며 사랑하라 일렀다.
니체는 지금 이 순간이 매번 영원히 돌아와도 모든 걸 끌어안고 사랑하라고 했다. 부처는 모든 형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이를 인식하면 모든 경계와 구분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 순간 찾아오는 현재에서 모든 존재가 상호연관 되어 있음을 깨닫고 자비를 베풀라 했다.
3.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으라고 말한다.
니체는 기존의 관습, 규칙, 신념을 깨부수라 한다. 자기를 고양하게 하는 삶을 위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무엇에도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자신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를 맛보라했고, 부처는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라 했다.
좋다! 다 좋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가 마음에 박혔다. ‘욕망’을 둔 첨예한 차이! 니체는 자기 고양을 위해 자기 자신의 욕망을 느끼고 뛰어 넘으라 소리쳤고, 부처는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고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두 개의 대륙은 부딪힌다.
2
니체와 부처의 욕망에 대한 모순은 어떻게 봉합될 수 있는가? 키를 들고 카잔자키스의 또 다른 작품 <미할리스 대장>을 열어보자.
<미할리스 대장>은 터키의 압제에 신음하는 식민지 크레타가 배경이다. 미할리스 대장의 위장에선 해방되고픈 강렬한 욕망이 부글부글 끓는다. 터키와 무력충돌이 벌어지자, 그는 부글거리는 욕망을 쏟아내 다른 크레타인과 함께 터키에 맞서 투쟁한다.
그는 조국 크레타의 독립을 바란다. 그러나 그는 조국의 독립이 이뤄지리라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진정한 자유를 손아귀에 쥐어내려 투쟁한다.
독립투쟁을 한다면 독립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거늘, 무슨 조화일까? 미할리스 대장의 심리는 뭘까? 그를 이해하기 위해 카잔자키스의 여정을 살펴봐야 한다.
욕망은 인간을 밀고 당겨온 강력한 원동력으로, 욕망의 그늘에서 인간은 비로소 태어난다. 이루려는 욕망이 인간을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고 흥겹게 한다. 니체는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욕망을 느끼고 뛰어 넘어 그 생명력을 맛보라했다.
그러나 욕망엔 치명적인 독이 도사린다. 과실을 맛보리란 기대의 독이다. 인간은 욕망의 과실로 기쁨을 한입 베어 물지만 설익은 과실로 고통을 받는다. 그 설익은 과실 이전부터 인간은 뻐거덕거린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인간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거대한 욕망의 고귀함을 아틀라스처럼, 헤라클레스처럼 의욕에 차 힘껏 바쳐 들어 올려보지만 인간은 연약하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카잔자키스는 시의적절하게 유용한 부처의 처방을 들이킨다.
카잔자키스가 얻은 부처의 처방은 ‘인류를 구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가 구세주 이니라’에서 알 수 있듯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꿈꿨던 구원@마저.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평온의 바다에서 유영한다.
그러던 그는 괴짜 노인을 만난다. 태어나 처음 산책 나온 강아지 같은 알렉시스 조르바! 그는 조르바를 보고 현실에서의 유영은 금욕이 아닌 세계를 맛보려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자는 자기 자’신‘이 아닐까?
카잔자키스의 신성모독은 조르바의 현실 긍정을 기반으로 한 기이한 결합물이었다. 구원을 행하는 건 그 세계를 뛰노는 나 자신으로 그 신은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세계를 즐기는 게 선행돼야 했다. 그래서 카잔자키스는 욕망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욕망을 비우라는 부처의 목소리가 그를 감아쥐고 흔들었다.
인간의 삶을 살아 숨 쉬게 하면서도 집착에서 오는 고통인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가?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자. 욕망은 불이다. 그건 인간에게 유익하면서도 해로울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진다. 욕망은 인간에게 창조력과 자기 고취를 불러일으켜 생명력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 한편 욕망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이뤄지리라는 희망이 무너졌을 때 느끼는 두려움의 화마가 인간을 집어삼킨다.
인간의 역사가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에서 시작됐듯, 욕망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인간을 불 싸지를 수도 있다. 인간에게 생명력을 타오르게 하는 근간인 창조적 욕망은 인정하되,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태워버리자.
그렇게 인간은 창조하는 인간으로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자기의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동시에 무엇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결과의 집착에서 비롯된 두려움 역시 태워버린다.
카잔자키스는 이걸 ’희망 없는 투쟁‘이라 일컫었다. 그리고 미할리스 대장은 ‘희망 없는 투쟁’을 실현한다. 바라지 않으면서 그는 존재한다. 투쟁은 존재한다. 그는 그 투쟁에 인생을 불태웠다. 그 과정이 삶 자체였다.
3
카잔자키스의 키로 니체와 부처의 변증법적인 욕망의 결합을 뛰어넘어 니체와 부처를 더 끈끈하게 엮을 수 있는 문제를 더 살펴보자. <영혼의 자서전>을 열어보면 카잔자키스의 인생을 관통하는 문제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구원의 문제다.
구원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종교든, 신념이든, 삶의 태도든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를 찾아 헤맨다. 그 삶의 이유가 바로 구원이다. 어떤 종교가, 신념이, 삶의 태도가 구원을 가져다주는가? 숙고 끝에 구원을 가져다 줄 무언가를 찾았다 치자. 그건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있는가?
카잔자키스는 의문을 가진 채 한계에 몸부림쳤다. 번데기가 부화하기 위해선 적당한 열이 필요했지만 그를 둘러싼 열은 미적지근했다. 그는 결국 어떤 절대적인 구원을 찾지 못했다. 구원을 찾으려는 몸부림은 나비가 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거미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거미집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하는 길이었다. 위기에 처한 카잔자키스는 영혼의 상처에 소리친다.
확실치 않은 것에서 확실함과 안락함을 맛보려는 나약한 희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에게 거짓된 안위를 안기는 모든 사상에 기대지 말라! 자기 자신의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부터 바라지 마라! 바라지 않으면 두려움도 없다! 그 곳에서 인간의 길이 시작된다!
카잔자키스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매몰된 현재 그 순간을 그 자체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구원한다. 구원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구원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다.
그의 진의는 구원을 위해 어느 사상의 달콤함에 매혹돼 무작정 따르려는 인간의 나약한 안위에 굴하지 말고 바라지도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온다. 진정한 자유는 외부 관습, 신념, 가치 따위를 깨부수고 얻는 자유이자, 어느 한 생각을 절대적인 것으로 옭아매려는 내면의 집착을 뿌리치는데서 오는 자유다.
그는 자기 자신과 세계를 초월하려 시도하며 니체와 부처의 자기 초월이 이 지점에서 만나고 또 다시 변증법적으로 결합된다.
카잔자키스가 위대한 사상의 마수에 걸려 수차례 먹힐 위기를 겪으면서도 결합을 통해 새로운 구원을,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내려 한 불굴의 정신에 감탄이 나왔다. 그는 그렇게 ‘희망 없는 투쟁’, 지극히 크레타적인 인간과 진정한 자유를 창조해냈고 오랜 기간 움츠리던 번데기에서 활짝 자신만의 날개를 피어냈다.
어쩌면 카잔자키스가 선사한 자유는 그가 그토록 경계한 달콤한 위안이며 결국 진정으로 새로운 걸 창조하지 못하고, 여러 사상의 장점만을 취해 섞어놓은 묽은 반죽 같은 그의 지적 탐구물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감탄할만한 건 그는 직접 삶으로 그의 사상을 증명해왔다는 점이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남이 주는 사탕에 매혹되지 않았다. 그것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기보다는 깨부수고 그 파편을 맛보고 고통스러워함으로써 여러 사상을 이어 붙임으로써 자신만의 진정한 자유를 얻어냈다.
일평생 인생을 향한 탐구와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내는 끈질긴 시도. 여러 모순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은 불멸할 것이며, 세계가 영원히 되돌아와도 뭍에 던져진 가물치처럼 펄떡펄떡거리며 자신의 심적 고향을 찾아가리라.
그의 세사구를 한 번 돌이켜 보자. 그건 언어의 일차원적 외관을 뛰어넘는다. 그건 니체의 것도, 부처의 것도 아니다. 그건 그의 인생처럼 모든 걸 초월한 채 존재한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알,리때문에 쿠팡 진짜 ㅈ된거 같음
https://naver.me/G38FFAxH
프로모션 적용받으면 쿠팡보다 2~30%는 싸더라;
사실 니체도 카잔차키스도 불교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니체 베이스가 불교랑 많이 겹침
그걸 감안해도 그다지... 니체든 쇼펜하우어든 별 접점이... 30년 만의 동창회에서 억지 친한 척 같달까...
어쩌면 둘을 합치고픈 강한 욕망이 이런 해석을 낳았는지도 모르겠네요
비유 개웃김 ㅋㅋㅋ 싯다르타, 니체, 쇼펜하우어의 공통점은 ‘인간의 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외에는 없는 듯. - dc App
임권택 만다라 같네요 근데 만다라는 자유 창조 고양 보단 체념 감내 고행
한 번 참고해보겠습니다 첨언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