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 수부(水夫)의 고백」


  바다를 못 당할 강적으로만 느끼고
  살살살살 간사스레 항행하는 자들,
  바다를 부잣집 곡간으로만 여기어
  좀도적 배포로만 기웃거리고 다니는 자들,
  또는 별을 어깨에 다섯쯤이나 달고도
  해신에게 도전이나 일삼는 만용(蠻勇) 장군도
  바다에 끝까지 이기지는 못한다.

  앙리 룻소의 달밤 사막의 집시가
  달려오는 사자를 달래 맨돌린을 울리듯
  먼저 한 자루의 피리를 마음속에 지니고
  나는 바다에 떴다.
  바다도 잠재운다는 저 옛날부터의 피리 소리로……

  그러고 내가 한 것은
  바다의 신의 일족 가운데서도
  그 주인이나 마누라를 직접 서뿔리 느물거리지 않고
  간접으로 그 딸의 로맨틱한 마음을 사려
  연거푸 연거푸 내 마음속 피리를 불고,
  그래 나는 내 마음속 더 으슥한 데 감춘
  한 개의 순금반지를 그녀 약손가락에 끼우는 데 성공했다.

  바다의 어느 부분이 그 바다의 딸의 약손가락이냐고?
  그것은 묻지 마라.
  바다에 엔간히만 정말 친한 수부도
  그만큼은 두루 다 잘 가남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낀 반지의 빛을 신호로 다녔을 뿐이고,
  내가 바다에서 거두어 온 것이란
  모조리 그녀의 손이 먼저 닿은 것뿐이다.

  이렇게 나는 바다에서 뺏거나 훔친 것이 아니라
  늘 항상 은근히 얻으며 살아왔으니
  이 앞으로도 끝까지 또 그럴 것이다.


- 『떠돌이의 시』(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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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저 『화사집』 시절에 씌어진 「바다」를 시작으로, 그 다음 시집에 실린 「역려」를 거쳐 『신라초』에 실린 「여수(旅愁)」와 「바다」로 이어지는 일종의 연작을 이루는 작품들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관념적 존재인 바다와의 대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작품들은 마치 서정주 자신의 지금까지의 작품세계 전체를 개관하고자 씌어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그 완성도 여부와는 관계없이 눈길을 끈다. 첫 번째의 「바다」와 그 속편에 해당하는 「역려」는 고통을 안고 바다를 지향하고 돌진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이 「바다」는 『화사집』 시절에 끌리는 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작품의 하나이기도 하다.) 두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는 「여수」와 두 번째 「바다」는 초기의 태도로부터 철저하게 달라진 모습들을 그린 것이다. 바다가 말라 하늘로 올라간다는 중기 시의 세계관을 공유한 「여수」와 달리, 초기 시의 제목을 그대로 쓴 두 번째 「바다」는 첫 번째 「바다」의 세계관을 가져오고 있다. 첫 번째 「바다」에서 시인이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고 선언했다면 두 번째 「바다」에서 그는 바다 안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바닷속의 공간은 더 갈 곳 없는 마지막 공간, '만세(萬歲)'를 구속되어 있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조금 그럴듯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고해(苦海)'일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차라리 신방들을 꾸미'어 물들이 '사랑 김으로 날아오르는' 구름더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밖에 없겠다고 결론 짓고 있다.

위의 시는 이 작품들에 연속하는 바다 주제의 시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늙은 수부'의 태도는 서정주의 후기 시에서 나타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바다를 대결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표현을 빌면 '바다'와 대결하는 것은 바다의 신을 직접 대면하려 하는 것과 같으나, 그는 그것을 답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고, 바다의 신이 아니라 그의 딸과 사귀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게 함에 따라 이 바다는 이제 벗어나야 할 고해에서 그저 수부(水夫)의 공생하는 작업장 정도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바다」를 좋아했던 사람에게는 노발대발할 결말이겠으나 오히려 이쪽이 더 설득력도 느껴지는 게 개인적인 감상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4연에서 바다의 어느 부분이 바다의 딸의 약손가락인지 묻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가 바다에 대한 탐구를 대충 처리했다는 것이 아니고, 늙은 수부가 바닷길을 터득해 가면서 고기를 잘 잡을 곳과 가면 위험할 곳을 잘 가려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수부가 어느 어촌에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 법이다, 우리가 어느 시절에 사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터득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러니 설명이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