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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리얼리즘이다』는 루카치의 세 논문에 각각 블로흐, 브레히트, 아도르노의 논문을 대비시키는 식으로 구성된 일종의 논쟁집이다. 어떠한 논쟁인가? 저자들의 이름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리얼리즘 논쟁 정도로 거칠게 정리할 수 있겠다.

리얼리즘은 마르크스주의에 다른 예술사조에 비해서 특유한 의미를 가진다.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인 바, 무언가가 실재와 아무런 연관 없이 허공에서 공회전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데, 이로부터 당연하게 따라나오는 입장은 예술이 근본적으로 모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하나의 기묘한 지점이 있다. 예술이 근본적으로 모방이라면, 모든 작품은 리얼리즘 아니겠는가? 물론 이는 리얼리즘을 과도하게 추상적으로 정의할 경우에만 따라나오는 결론이지만, 그럼에도 모든 문학은 어쨌건 현실의 무언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는데, 우선, 따라서 루카치는 비-리얼리즘적 문학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더니즘이 현실을 묘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루카치가 모더니즘에 제기하는 혐의는 모더니즘이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포착, 즉 여러 사회역사적 조건에 대한 포착을 포기하고 특정한 조건 하에서 나타나는 상황을 인간에 본질적인 것으로 오도한다는 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이는 모더니즘이 인간의 본질을 정적으로 그리고 원자론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구체적인 책임을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돌린다. 소재들을 “퍼스펙티브”에 따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조직해, 결과적으로 총체성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소재를 의식의 흐름 기법과 같이 균질적으로 조직해 추상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이 개진되는 루카치의 논문인 「전위주의의 세계관적 기반」과 이 책의 구성상 짝을 이루는 아도르노의 논문 「강요된 화해」는 루카치의 평결에 직접적으로 반대한다. 루카치와 아도르노 모두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마르크스적 테제를 공유하지만, 이에 대한 아도르노의 활용은 루카치와 다르게 미시론적인데, 개인이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면 미시적인 개인 속에서 사회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모더니즘 혹은 “전위주의”는 개별적인 것 속에서 사회라는 어떤 비동일자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사회역사적인 계기가 본질적인 것으로 신화화되는 것을 통해 그 신화 속에서 자신이 매개되어 있는 것임을 드러낸다. 나아가 예술은 형식의 자율성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화해를 표상하고, 그로써 현실의 화해되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아도르노의 요점을 재해석하자면 그것은 모더니즘 예술이 사회적 계기를 어떤 식으로건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예술은 근본적으로 모방인 바, 예술작품은 사회를 드러내며, 또 변증법적이게도 예술적 자율성의 극단에서 그 반대 항인 사회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루카치의 리얼리즘 모델은 아마 실정성을 가질지 모른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예술의 효과는 너무 추상적인 것이기에 —- 억지로 사회비판적 요소를 끌어내는 독해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카프카나 베케트에게서 그런 효과를 얻는 독자는 매우 드물 것이다 — 차라리 독자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떠먹여주는’ 루카치적 리얼리즘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카치적 리얼리즘이 지니는 강점은 거칠게 말하자면 대중성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한가? 최소한 오늘 날 명시적으로 사회비판적인 문학이 과연 대중성을 지니는가? 오늘 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회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포스트모던적인 냉소주의, 즉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고치려는 시도 역시 똑같은 문제이며 실패하게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태도, 또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거대서사의 종언”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실현적인 예언이었거나,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보다는 포스트모던의 분석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최소한 자기를 확대재생산하는 인식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전통적 리얼리즘이 여전히 무언가 “민중적”이라는 명제는 이제 신화로 취급되어야 한다. 의식의 물화는 총체성이 외부에서 제시되어도, 또는 레닌의 표현을 빌리자면, “외부에서 주입”되어도 의식이 그것을 총체성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진행되었다. 최소한 루카치의 기준으로는 그러할 것인데, 이는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일말의 대중성조차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는 결국 리얼리즘적인 세계인식이 일반적 인식에게 외재적인 것으로 되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한 파편화된 인식에는 차라리 똑같이 파편화된 “지각들의 광상곡”을 드러내는 모더니즘이 더 내재적일 것이고 더 친숙할 것이다. 물론 물화는 이제 파편화된 것을 파편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지경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리키든 발자크든 조이스든 만이든 대중성에 관해 상황은 비슷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