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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에 대해서.
자유란 뭘까요? 우리 국어는 자유를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밀은 역시 이 책에서 다룰 자유를 ‘정치적 지배자의 압제에 대항하는 방어’라고 정의합니다.
자유는, 위의 정의에서처럼 홀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자유는 부자유, 또는 자유를 방해하는 외부의 무언가에 대해서 반대되는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 「자유론」은 제가 느끼기에, 그다지 자유에 대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밀은 이 책에서 말하는 ‘자유’를 꺼내기 위해 훨씬 많은 영역을 그 반대에 할애하고 있었죠. 바로 ‘정치적 지배자의 압제’에 말입니다.
때문에 이 책을 보다 노골적으로 정의하자면, 저는 이 책이 자유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그 반대, ‘압제’에 대한 책 또는 ‘압제를 규제하기 위한’ 책이라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유론」은 지금까지 압제와 그에 대항하는 자유가 어떤 방식으로 바뀌어 왔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법과 헌법, 면책권과 이해와 동의들. 권력을 가진 통치자에게 피통치자가 저항하며 생겨난 이러한 자유의 산물들을 소개하며 밀은 마침내 오늘날(스튜어트 밀이 살았던 당대 즉, 19세기 유럽)에 이르고, 민중의 정부가 들어서며 그들이 처한 한 가지 모순을 꺼내 들고야 맙니다.
민중의 정부에서 피통치자인 민중은 동시에 통치자로서 권력을 가집니다. 압제자와 압제당하는 자가 동일시되어 버린 모순. 그 모순 속에서, 과연 민중은 자기들 스스로가 가진 권력을 제한할 이유가 있을까요?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하면, 동시에 피통치자인 민중의 권력이 줄어드는데 말이죠.
밀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아래의 말을 근거로 들어서요.
-권력을 행사하는 민중과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되는 민중은 같지 않다. 소위 말하는 ‘자치’란 각자가 그 자신에게 통치되는 것이 아닌, 각자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는 것을 뜻한다…(중략)…민중의 의지는 사실 민중 전체의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민중 가운데 다수가 속하는 부분, 또는 가장 활동적인 부분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네, 맞습니다. 설령 민중의 권력이라고 해도 권력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민중에 의한 지배, ‘자치’라는 것은 결코 스스로를 통치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 본질은 단지 이렇습니다.
‘우리’가 너(나)를 통치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흔히 살아본 바 있는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듯이, 여론은 결코 모두의 의견이 아닙니다. 다수의 의견이고 또는 가장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일 가능성이 가장 높죠.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민주적인 사회가 결코 역사의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당연히 역사적으로 계속되었던 자유의 투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죠.
‘왜’는 해결되었으니 그 다음. 그렇다면 ‘어떻게’ 이 다수자의 전제를 제한해야 할까요? 종교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선악도 기준이 아닙니다. 그 모두 개인의 기호에 크게 영향을 받을 뿐이니 진정한 원칙이 될 순 없는 거죠. 밀은 말합니다. 바로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이 ‘압제의 원리’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요. 이 부분이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회가 개인을 대하는 방식(강제 혹은 통제)에는 절대적인 원리가 있다. 바로, 그 간섭이 정당성을 얻는 유일한 근거는 ‘자기방위(self-protection)’가 목적일 때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자기방위’에 해를 끼치는 사회의 ‘압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뒤집어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반드시 지켜야 할 자유의 영역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것이 사회로부터 존중받아야 할 자유의 영역이고, 사회가 건드려선 안 될 영역이며, 동시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자유의 영역일까요?
밀은 이를 셋으로 나눴습니다.
1. 양심과 사상의 자유
2. 기호와 목적 추구의 자유
3.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목적을 위해 단결할 자유, 혹은 결사의 자유
3은 1, 2와 연계되는 수단으로서의 자유라 치고 넘어가는 것 같네요. 대신 밀은 1을 ‘2장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서, 2를 ‘3장 사회 복지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에 관하여’에 각각 할애하여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대체로 그 말을 하는 사람 본인만 빼고서 꼭 그렇게 생각하죠. 이른 바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이랄까요?
농담이고, 그저 말뿐일지라도 모두들 저 스스로가 틀리고 놓치고, 실수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무오류성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다들 지식으로나마 알고 있어요. 누구나 가진 어떤 의견이라도 오류는 나옵니다. 당장 이 글 쓰고 있는 워드 프로세서에서조차 오류는 있는걸요. 그걸 인정할 수 있다면, 자연스레 사회 권위는 그 어떤 의견도 탄압할 수 없다는 결론도 쉽사리 나옵니다. 왜일까요?
어떤 의견이 있습니다. 그 의견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는 몰라요. 모른다고 칩시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오류에요. 여하튼, 그런 의견 하나를 우리가 탄압했어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 의견이 틀렸다면, 해당 의견의 반례가 논증될 기회를 놓칩니다.
그 의견이 맞았다면, 바로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놓치게 됩니다.
이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의견이 틀리든 맞든 그것을 꺼내놓고 맞대기 전까지는 이를 알 수 없습니다. 오류가 없는 판정자가 없으니, 어떤 의견이든 그것이 맞는지 그른지를 알려면 우선 꺼내놓고 들여다볼 수밖에 없어요. 밀이 말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란 바로 그래서 필요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의견들을 꺼내놓을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어느 학자의 일기장 구석, 저기 도서관 장서고의 먼지 묻은 선반 아래에 일단 보관할 수만 있도록 해두면 될까요? 밀은, 그 자신이 사는 영국의 사회를 빗대어 이를 부정합니다. 더 당당히, 더 당연히 이단적 사상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단적 사상을 쉬쉬하기에만 바쁜 사회는 그 사상이 진정 이단인지조차 검증할 수 없다고요. 더 나아가, 간혹 나오는 위대한 사상가를 죽이고, 평범한 사람들에게조차 최대한의 정신적 발달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고 말이죠.
여기서 다른 문제가 나옵니다. 그렇게 한 번 거한 토론을 거쳐 검증된 이론은, 그럼 다시 꺼내들 필요가 없이 모두들 그렇게 알고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입니다. 불륜은 나빠, 도둑질도 나빠, 살인은 더 나빠 같은 누구나 알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야기들 말이죠.
밀은 여기서도 단호히 고개를 젓습니다.
토론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라고 밀은 말합니다. 토론하지 않고 케케묵은 경전 위에 올려진 채 떠받들어지기만 하는 의견은, 급기야 사람들로부터 그 근거와 의미를 잊히고 아무 사상도 전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요. 그건 스스로 선택한 의견이 아니라 단지 물려받았을 뿐인 의견이라고 말이죠.
덧붙여 밀은 위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보다 일반적인 상황을 들며 주제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위에서 우리는 고작해야 어떤 의견이 맞고, 틀린 경우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이죠.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듯 애매모호하기 그지 없습니다. 때론 틀린 의견 한 구석에 맞는 말이, 맞는 의견 한 구석에 틀린 말이 섞여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일반적 의견이 그 일부만을 구현하고 있는 진리의 나머지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반대 의견은 필연적이며, 바로 그 탓에 의견의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죠.
인간이 오류투성이라는 점에서 다양성은 유익한 것입니다.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도 유익합니다. 타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이 개성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의견과 비슷한 논리죠? 맞습니다. 뭐가 진실되게 올바른 생활양식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심지어 가장 진실되게 올바른 생활양식은 바로 그 다양성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모두들 저마다의 기호를 가지고 취향을 가진 채 각자 다른 목표를 추구하니까요.
밀에게 이런 기호와 목적 추구의 자유는, 단지 말이냐 행위냐의 차이일 뿐 의견과 동일하게 다뤄집니다. 당연히 밀이 말하는 이 다양성은 결코 갇혀있고 닫혀있는 본인 혼자만의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보다 교류하고 서로 영향하는 것에 가깝죠.
-스스로 이해력을 발휘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이성적 판단을 바탕으로 관습에 따르고 때로는 벗어나는 것이, 마치 기계처럼 맹목적으로 관습에 따르는 것보다 낫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밀은 더 나아가 3장에서 ‘자발성’을 강조합니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과 개개의 다양성을 통해 사람은 자발적으로 행동양식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감정이나 욕망은 흔히 이기적이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데에 사용된다는 반론에 대해, 밀은 단호히 그것은 양심의 부재에서 있는 것이며, 욕망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답합니다.
또한 밀은 이러한 개성을 중시하는 사회여야 만이 인류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길 천재들이 제대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존하는 모든 좋은 것들은 바로 이러한 천재들이 남긴 독창성의 성과임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이어지는 4장과 5장은, 1장인 머리말에서부터 내려온 글들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제까지 자유와 억압, 억압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그래야 할 이유를 열렬히 설명하는 밀은 드디어 현존 사회에 대해 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4장과 5장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여러 당대의 사례들이 나오고, 또한 사람들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몇몇 법에 있어서 그것이 오직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라는 논증을 펼치며 밀은 현존 사회가 얼마나 자유-억압의 굴레에 있는지, 또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그런 점에서 해당 부분은 때론 전투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가 살던 당대는 물론 현재까지 이어오는 사회의 많은 부분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그런 모습은 일전에 말한 것처럼, 토론하지 않아 죽은 지식이 되지 않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왜 재미가 없었나?
좋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사실, 일방적인 논설에 가까울 뿐이지만 어쨌든). 혹시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대충 위의 내용을 들어 읽은 티를 내셔도 좋고, 읽어보신 분들은 ‘아닌데? 내가 볼 땐 완전 다른 내용인데?’하고 저와는 다른 감상을 나누어주셔도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마음에 드는군요.
그것과는 별개로, 이제 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이제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이미 읽어보신 분들에게 더 흥미로운 얘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글은 충분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갖춘 훌륭한 글이었지만, 그럼에도 「자유론」은 제게 있어서 그리 즐겁지는 않은 도서였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5점 만점에 1.5점 정도를 주고 싶을 정도로요. 왜일까요? 삶에 그리 도움이 안 되어서? 물론 그것도 있지만 무릇 독서란 건 원래 삶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진 않아요. 책 많이 안 읽어도 뭇 사람들은 잘만 살아가고 있잖아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우선, 곳곳에서 느껴지는 서구우월주의가 있겠군요. 머리말에서 그토록 자유와 권위의 상호작용에 대해 토론하고, 그 역사적 배경들을 짚어본 태도와는 상반되게, 밀은 지극히 당대 영국인다운 태도를 온갖 곳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100%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들임을 일러두겠습니다.
-전제정치도 그 통치수단의 목적이 미개인의 생활개선이며 실제로 이 목적을 달성했다면, 이는 미개인을 다루는 정당한 통치방법이라 할 것이다.
와우!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유는 미개인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아, 이걸로 부족해요? 그것 말고도 더 있냐고요? 물론이죠.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선량하고 개화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표적 권력자는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였다. 그는 당시 모든 문명세계를 지배하는 절대군주였다.
난데없이 우리 조상님들이 대거 문명 세계의 바깥으로 몰려버렸군요. 그것말고도 보여드리고 싶은 부분은 또 있습니다.
-영국인들은 잘못된 원칙을 실행에 옮길 정도로 사악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원칙을 주장하는 일에는 기이한 즐거움을 느낀다.
이 표현이 왜 문제가 될까요? 아니, 얘기가 잘못됐군요. 왜 저는 이 표현을 문제로 삼는 걸까요?
이 글은 스스로 논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 저게 과연 논문에 어울리는 어휘인가요? 논증적이고, 철저해 보이나요? 제 생각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저 ‘영국인’ 운운하는 어휘는 저것 말고도 여럿 있습니다. 굳이 다 꺼내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래요. 그 정도면 저자 입장에서 그냥 가장 가까운 사례를 참고하는 게 아닐까요?
아닙니다. 정확히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이 글의 영국인, 서구 사회에 대한 중점적 시각은 이 글의 주제를 망치는 가장 큰 원흉입니다. 이 글의 주제는 뭐죠? 권위와 자유의 상호작용이자, 그 권위를 어떻게 제한해야 가장 바람직한 자유 사회를 이룰 수 있는가가 아닐까 합니다. 권위와 자유. 하지만 밀의 글은 더 엄밀한 수식어가 필요할 것 같군요. 바로, ‘서구 사회의’ 권위와 자유라고 말이죠.
뭐, 당대의 밀이 과연 이 글이 21세기 동쪽 끝에 사는 황인종에게 읽힐거라고 기대했을까 하면 그건 아니겠습니다만, 제 생각에, 자유에 대해 토론하고 이를 엄밀히 밝혀 사회 권위를 보다 정당한 곳에 투사하기 위한 목적에 부합하려면 적어도 이보다는 더 보편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보편성 말입니다. 자유는 보편적인 겁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또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이성을 가진 그 누구도 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당한 권위적 압력에 대해 즐거워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명색이 「자유론」이라 이름붙인 이 글은 지나치게 서구에, 그 중에서도 당대에 치우쳐 있습니다. 이 같은 특수성은 필연적으로, 3장에서 밝힌 ‘보편사회의 가장 진취적인 탐구자들을 위한 자유’의 가치를 논함에 있어 해가 되고, 따라서 자기파괴적인 모순입니다. 자유에 대한 논의가 이같이 지극히 당대 서구의 사회상에서만 영합 되는 것처럼 비친다면, 다른 사회, 더 나아가 이어질 미래 사회에서 논의될 자유의 가치에 오히려 누를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문제는 또 있습니다. 이것 역시 밀의 편향성에 의해 발생한 문제인데, 이 글을 읽으며 저는 연신 존 스튜어트 밀이 자기자신을 ‘자유’라는 가치를 수호하는 일종의 십자군의 반열에 두려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정직한 무신론자’의 비유부터, 진리를 찾는 길로서 자유 토론을 묘사한 것, 당연하다시피 튀어나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숱한 예시들. 이처럼 밀의 비유에서는 한 가지 특징적인 그룹이 연상됩니다. ‘선량하고 자유로운 이’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죠. 그의 논의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선량하지 못한 자들의 자유, 이기적인 자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다분히 거론을 꺼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게 「자유론」은 이런저런 까닭에 썩 달갑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정확히는,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게 알맞은 표현이겠네요. 지나치게 서구우월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개인을 과대평가하며 스스로의 논설에 불리한 부분은 거론하지 않거나 거론해도 아주 일부분만 하고 넘어가는 글이었습니다. 당연히 오용되기도 쉽고, 보편가치를 논하기에는 더더욱이 무리가 있는 책임이 분명했어요.
이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대해, 저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1.5점을 매기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겠습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영제국의 식민노예들을 위한 헌사”
이상입니다.
제게는 인생책이었습니다만 이런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책임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책이 엄밀하게 쓰이지 않았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