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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읽고 댓을 달고 있었는데 너무 길어져서 새 글로 씀...)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는데 책(소설)이 줄 수 있는 자극이 사진보다 못하다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임.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고 더우면 선풍기 틀면 되는 거지. 그런데 지극히 평범한 사진 한 장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절망을 담을 수 있는 게 인간이니까. 어떤 자극이 일차적인 감각과 본능의 충족이며 이성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소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코스믹 호러는 이성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 자극이 감각을 초월한 무언가로 발산되게 만들고 끝내 놓쳤을 때, 본능적인 꺼림이나 두려움은 본능을 초월한 것들(실체, 혹은 허상)의 부재(놓침)에 대한 이성적 반응으로서 나타남. 즉 이성은 그 간격을 어떻게든 메꾸기 위한 개재일 뿐임. 인간의 고유한 특권이자 영장의 증거가 그런 '부산물'로 지위가 격하되고 도무지 그 빛이 닿을 수 없는 어둠 앞에서 거품처럼 꺼져버리며, 어째선지 닿을 수 없어야 하는 것들이 닿게 되었을 때 '코스믹' 호러가 되는거지. 모르는 게 아니라 알게 되었고 그걸 버틸 수 없어서 코즈믹 호러인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장르로서 매력을 잃고 있는 이유와 그것이 과연 소설, 글이란 매체가 이 장르에 적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까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음.
첫 번째는 그렇게 쓰기가 힘들다는 것. 크툴루는 코스믹 호러의 고전이지만 때문에 많이 소비되고 패턴화 되기까지 했음. 물론 그와 비슷해도 소설적으로 완성도가 높다면 재밌는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함. 하지만 '호러'로서는 약간 빛이 바랠 수 있지. 뛰어난 작가들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그건 동시에 한 장르의 패턴이 다각적으로 소비되었음을 뜻함. 뛰어난 작가만이 아니라 광인이 나타나야 새로운 지경을 바라볼 수 있을 터임.
두 번째로는 독자의 문제가 있음. 어떤 장르를 즐길 수 없는 게 그 사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 장르의 매체가 그 사람한테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임. 소설을 읽으려면 상상력이 있어야 되고 코스믹 호러도 마찬가지임. 아까 이성 얘기를 했는데, 간단히 말해 소설이란 텍스트가 이성의 심지(그러니까 이성과 다른 무엇을 꼬아 만든 심지) 역할을 한다면 거기 불을 붙이는 건 읽은 독자란 말. 위 글에서 누가 카프카 추천했는데, 과연 그 또한 코즈믹 호러임. 사람이 벌레로 변했다? 닿지 않아야 할 것들이 닿았다? 인간은 자신이 폭탄임을 실시간으로 깨닫게 될 것이고 이성의 심지를 타고 올라오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악몽 속의 그것과 같은 이성의 붕괴를 느끼게 되는 것이지.
그런데 결국 그 텍스트를 읽고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거지.
맞말. 독자의 상상력이 코즈믹 호러를 완성함. 그런 책들이 있어. 독자들 상상력만큼 재밌는 책들
오히려 소설이 어울리고 만화나 영화가 표현하기 힘든 장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