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적(古代的) 시간」


  만일에
  이 시간이
  고요히 깜짝이는 그대 속눈썹이라면

  저 느티나무 그늘에
  숨어서 박힌
  나는 한 알맹이 홍옥(紅玉)이 되리.

  만일에
  이 시간이
  날카로이 부딪치는 그대 두 손톱 끝 소리라면

  나는
  날개 돋쳐 내닫는
  한 개의 화살.

  그러나
  이 시간이
  먼 사막과 산 사이에 늘인
  그대의 함정이라면

  나는
  그저 포효하고
  눈 감는 사자.

  또
  만일에 이 시간이
  사십오분만큼씩 쓰담던
  그대 할아버지 턱수염이라면
  나는 그저 막걸리를 마시리.


- 『동천』(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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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전집이 나왔을 때 시집 미수록 작품, 특히 소위 친일 작품이 빠져 있지 않느냐는 불평을 여기저기서 들은 적이 있지만, 친일 문제와는 별개로 지금의 전집에는 서정주의 글 중에서 빠져 있는 것이 적지 않아 유감스럽다. 가령 1970년대에 나온 일지사판 서정주 전집을 보면 4권의 끄트머리에 '신역(新譯) 열자초(列子抄)'와 '기미 3.1운동 약사'가 실려 있는데 현재의 전집에는 빠져 있다. 일지사판 전집 이후에 출간된 1976년의 『미당 수상록』에서도 빠져 있는 게 몇 편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위의 시에 대한 힌트를 조금 흘려 주고 있는 '시간'이라는 글이다. 위의 시는 그냥 읽으면 그야말로 출구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기 십상인 작품인데, 그 글에서 서정주는 일단 시에서 언급된 '눈썹', '손톱', '수염'이 '순간(瞬間)', '탄지(彈指)', '수유(須臾)'에서 모티프를 얻어 온 것임을 밝히고 있어 도움을 준다. 눈썹을 깜빡인다는 말뜻의 순간, 손톱을 부딪힌다는 말뜻의 탄지, 수염 쓰다듬는 시간을 뜻하는 수유는 몇 초에서 몇십 분 사이의 거리는 있지만 대체로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모티프가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눈썹과 손톱은 서정주의 시에서 많이 쓰이는 연인에 대한 시어이기도 하다. 이들에 연결되는 것은 '홍옥'과 '화살'이다. '홍옥'은 역시 그의 시에서 많이 쓰이는 '루비'와 연결 지으면 될 것 같으나 '화살'은 서정주가 즐겨 사용한 단어는 아니다. '날카롭게'라는 말을 쓴 걸로 보면 사랑의 부드러움과 따가움이라는 두 측면을 구분해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에서 정말로 헷갈리는 것은 시인 자신이 모티프를 밝히지 않은 5~6연일 것이다. 계속해서 궁리를 해본 끝에 내린 결론은 서정주가 역시 다른 시에서 종종 구사했던 모티프의 하나인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그림 속 사자가 되겠다는 것은 눈앞에서 잠자고 있는 여인을 잡아먹지 않고 눈감아 주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마지막 연은 알쏭달쏭하긴 하지만, 역시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사랑과는 관계없는 딴짓을 함으로써 그가 많이 이야기하는 좋은 의미에서의 회피를 하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사랑에 대한 그의 다른 시에서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하눌이 너무나 눈부시게 밝은 날은/ 모든 게 두루 못견디게 빤해서/ 유리창 안에 갇힌 곰이/ 들여다보는 구경꾼을 피하듯/ 피하다가 피하다간 술잔도 들거니,'(「여자들의 손톱 들여다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