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없겠지만 나는 의대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적으로만 생각했고 기계적, 이과적으로만 생각했다. 수능 공부와 같은게 나한테 맞았고, 스스로 똑똑하지는 않지만 하라는건 잘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철학이나 수학 과학은 나랑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휴학 기간동안 철학책들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철학은 과학이 집중하지 않는 세세한 부분을 깊은 사유로 뚫고 들어간다는 것을, 인간에 대해서 꽤 많은 보석같은 비밀을 캐내고 읽혀지기를 바란채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오늘은 내가 읽은 여러 철학서 중 가장 오래걸린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

존재와 시간을 쓴 하이데거는 어떤 사상가인가? 많은 사람들은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낯설기만 하거나 들어보기만 했을 뿐일 것이다. 들어본 사람들도 대부분 존재와 시간이라는 아무도 안읽는 어려운 책을 쓴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와 시간은 사실 초석에 불과한 논문이었다. 하지만 이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은 말도 안되는 인간 이해로 가득하다. 인간이 어떻게 존재했는지 하이데거는 모종의 목적을 위해 깊이 분석했다. 하이데거는 사실 인간 보다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었다. 왜 모든 것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일까? 라는 고민 속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분석하기 위해서 인간을 먼저 분석해야한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 같다. 인간 현존재를 분석해 존재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사유해나간 하이데거의 여정은 매우 방대해서 따라가기 쉽지 않기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하이데거의 나머지 저작들을 읽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고 많이 읽지도 못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은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하이데거의 세세한 용어들은 까먹었지만(존재와 시간에는 진짜 말도 안되는 양의 단어 정의가 나온다. 거리없앰, 결단성, 바라봄, 현재성 다 하이데거 원하는 입맛대로 다시 정의한다. 미묘하게 다른 정의들이 읽기 쉽지 않다.) 다른 책들을 읽으며 오랜만에 내용을 복기하고 싶기도 하고 학교로 복귀하기 전에 독후감이나 한번 간단하게라도 써보고 싶고, 지금 현대의 사람들이 존재 구조에 관해서 아이디어도 떠올라서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현존재(Da-Sein)’이라고 정의한다. 현존재는 인간과 같지만 철학적용어로 우리가 아는 통속적인 인간의 정의와 구별하기 위해서 하이데거가 정의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어떻게 존재하느냐? 현존재는 세계--존재로서 실존범주로서 더불어있음/ 처해있음/ 이해라는 3가지 범주를 갖는다.

더불어있음은 인간은 다른 인간과 언제나 함께 사는 구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약간 이해가 안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없이 혼자 존재하는 상황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사람은 그 사람 혼자 존재한다고 당연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외따로이 떨어진 사람은 혼자 있지만 혼자 있지 않다, 즉 혼자 있는 것은 근본적인 존재구조가 아닌 것이다. 근본적인 존재구조의 결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 가장 근본적인 예를 든다면, 사람은 일단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환경에서 언어를 배우고 부모의 관심으로 이 세상에서 성장해나간다. 어떤 사람도 혼자 존재할 수는 없다. 덩그라니 혼자 남겨진 사람은 타인의 부재로 경험하지 타인의 부재가 근본적인 존재 구조는 아니다. 또 현존재는 처해있음의 실존구조로 존재한다.


조지프 헨릭이라는 진화생물학자이자 인류학자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만 다른 유인원들과 다르다고 한다. 모든 인간 유아들과 다른 유인원들과 시합을 붙였을 때 유일하게 우월한 능력을 보여준 것은 계산능력이 아닌 바로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기술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다른 침팬지나 유인원과 다르게 다른 사람의 행동에 필요없는 부분까지 배우려고 한다. 인간은 인간이 똑똑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문화적으로 먼저 배우고, 시행착오와 모방과 학습으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진화 했다는 가설이 요즘 인간의 진화에 근본적이라고 한다. 인간의 문화와 유전자가 공진화 하며 현재의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헨릭은 주장한다. 인간이 공동현존재로서 존재하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존재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의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현존재는 처해있으며, '세계'에 던져져있. 누구도 이 세상에 자기가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재 사는 곳이나 시대 , 가족, 전통, 환경에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다. 또 현존재는 언제나 주변 환경과 시대 상황에 휩쓸릴 수 밖에 없고 주변 사건에 따라 분노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그는 독자적이지 않다. 언제나 영향을 받는 처해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관습, 주변 사람들과 사건들로부터 영향받고 현재에도 영향받고 있으며, 미래에도 받고 과거의 상태는 미래에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현존재는 과거에 상황과 과거의 환경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이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현존재는 언제나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을 투사한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미래에 관한 이러한 기획투사(기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오늘 잠에서 일어난 순간부터 기투가 작용하고 있다. 당신은 일을 하기위해, 또는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속에 있었던 계획’(이것이 뚜렷하지 않을지라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 뒤의 밥을 먹거나, 생활을 하고 다시 잠을 잘 때까지 당신은 기투를 한다. 과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도파민과 여러 호르몬들과 관련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기대하고 욕구를 느끼기도 하고 해소하기도 한다.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의 존재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현대 과학자들은 얘기한다. , 의식의 역할은 주변 환경에서 살아남고 예측하는 것이다. 이미 유명한 프리스턴의 자유 에너지와 마코프블랭킷은 이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사유의 진면목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위의 통찰로 하이데거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쉬운 예로 시간이 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하루는 24시간으로 생각하고, 1분이나 1시간 단위로 하루를 구성한다. 하지만 진짜 시간은 이런 기계적이고 숫자화된 시간일까? 하이데거는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던져져있고 처해있기때문에이러한 산업화되고 기계화된 시간에 당연히 영향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시간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이다. 우리는 어떤 시간을 감지할 때 무엇을 할 시간이나 어떤 시간으로 의미부여하며 존재하지 기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볼 때도 내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는지 의미가 부여된 시간으로 시간은 나에게 드러난다.


이쯤에서 하이데거의 유의미성 연관거리-없앰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현존재분석에서 인상깊은 부분인데, 하이데거에게 우리의 도구들(의자, 책상, 공책 …)은 객관적으로 3차원 공간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3차원 공간보다 나의 세계에서 나한테 훨씬 가깝다. 또한 그러한 도구들은 의미연관 속에서 존재한다. 또 유의미한 의미를 갖는 도구들이 포함된 나의 세계안에서 존재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쉽게 예를 또 들자면, 당신이 핸드폰을 밤에 보다가 충전하러갈 때 충전기의 위치를 생각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알고 이미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핸드폰을 그저 충전시키고 아무런 생각없이 또 다른 도구인 침대에서 누워 잔다. 도구들은 어떻게 보면 3차원상 기계적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리가 없어지고우리의 의미연관속에서 존재를 갖는다. 3차원으로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특수한 바라보는 방식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수학적 3차원 공간이 중요하지 않고 느끼고 의미부여로 채색된 무수히 다채로운 '세상'에서 존재한다. 한번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우리한테 세상이 객관적으로 보이는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드러나는 현상으로 존재하는 '세계'만이 존재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기계적으로 또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그저 3차원 구조와 내가 갇히고 관찰자가 된 것처럼, 세상을 보는 것은 허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눈앞의 공간에는 의미부여가 되어있다. 군중 속에서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친구나 가족을 가장 쉽게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물건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용되기도 하고 그 도구가 기능하지 못할 때 갑자기 새로운 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망치로 부순 것 이것이 존재와 시간을 읽고 내가 느낀 경험이었다. 이데거에게 '세계'는 지구나 우주와 같은 수학적 공간이 아니라 현존재가 사는 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왜 우리가 혼자 존재해도 공동현존재로 이 세상에 더불어존재하는지 이해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별거없는 나의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당신은 이것을 핸드폰이나 컴퓨터 노트북 패드로 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컴퓨터나 핸드폰이 마치 당신을 감싸고 있는 VR 글래스처럼 잠시라도 세상에 전부인 것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객관적 구조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모든 것은 자신의 주관적 현상이다. 핸드폰을 볼 때 우리는 정말로 핸드폰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VR을 쓰지 않아도 마치 핸드폰 화면이 파노라마나 영화관처럼 머리에 착용한 것처럼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차이는 있겠지만 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하이데거의 책을 읽고 한참 뒤에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존재구조에 이렇게 박혀있는 이상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을까? 푸코를 살짝 읽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핸드폰은 당연히 새로운 권력의 기구로 이용되고, 자리매김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당신은 수많은 정보에게 오히려 조종받고 있다.


어려운 인문학 책 읽는 법: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시간"의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