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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문 사이의 원수 관계가 두 남녀의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다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려보자. 그 원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진 않되, 두 가문이 더 이상의 복수는 서로 무의미하다고 여기며 두 연인의 무덤 위에서 화해한다는 이야기는 서정적이면서도 희망적이다. 더 이상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복수를 통해서 회복해야 하는 명예는 더 이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대라는 뜻이기도 할 테다. 실제로 <로미오와>가 저술된 시기는 복수를 위한 결투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톨릭에 의해 공식적으로 완전히 금지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복수도, 명예도 점차 의미를 잃어가며 사적 복수를 위한 결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되 잃을 수 있는 목숨은 많은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말하듯 숭고한 죽음을 위해 살아가는 전사가 사라지고, 이런 살아 있는 것이 불명예인 비겁자 역시 사라지고 난 뒤의 시대.


그런 변화가 생기지 않은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이 질문에 대한 편린을 살며시 보여주는, 서슬 퍼렇고 신화적인 소설이다. 알바니아의 산악 지대에서는 여전히 옛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법률 카눈을 따르고 있으며, 카눈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등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다룬다. 많은 경우, 복수를 위한 일종의 명예 살인이 포함되는 듯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실추된 명예는 복수 살인으로밖에 회복될 수 없으며, 복수를 위한 살인을 당한 가문은 또 다시 이를 복수하기 위해 다시 복수 살인을 해야만 하고, 이는 다음으로 복수할 차례의 가문이 복수를 포기하기까지 몇 번이고 이어질 수 있다. <부서진>의 주인공 청년 그조르그가 영문도 모를 복수를 위해 총을 들었듯, 그리고 자신의 복수와 비슷한 방식으로 복수를 당했듯. 그조르그가 복수를 성공한 뒤, 다음 복수를 당하지 않도록 보장해주는 확실한 유예 기간은 한 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4월 중순에는 언제든 총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했고, 그렇기에 부서진 사월이다. 그에게 사월의 나머지 절반은 오지 않으니까.


또 다른 주인공 격인 작가 베시안은 이러한 산악 지대의 신화적인 풍습에 매혹되어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아내 디안과의 신혼 여행을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는 오로시성의 대공의 초대를 받았는데, 그와 그의 가문은 언제부터일지 모를 오랜 전통과 함께 산악 지대를 통치하고 피의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피의 징수를 도맡은 대공의 사촌은 다른 평범한 세금 항목과 마찬가지로 매분기 '징수액'을 유지하거나 향상시킬 의무를 갖고 있으며, 이를 위해 오랜 세월 전에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더 이상의 복수를 포기하기 위해서 잊혀졌던 피를 찾아내 징수해야만 한다. 마치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풍습에 경탄하는 베시안과 달리, 산악 지대에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자 꿈꿨지만 결국 카눈 수행에 동참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을 찾지 못한 측량사와 의사는 이 모든 일을 매우 적대적으로 바라본다. 물론, 베시안 역시 범인으로서 감히 신성한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이민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듯 자신의 아내를 반쯤 잃어버린다.


<부서진>은 그래서 매우 신화적인 방식으로 쓰였다. 예전에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나는 신화적인 비극을 매우 좋아해서 여기에 가점을 주는 편이다. 허나 대체 왜 이런 이야기가 순수한 픽션의 영역이 아닌 논픽션의 영역인지 영문 모를 이야기기도 하다. 카눈은 현재까지도 알바니아 산악 지대를 지배하고 있으며 결코 퇴출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고대 그리스의 시와 희곡을 읽으며 소위 신화시대의 폭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것과 비슷한 이유로, <부서진>에서 다루는 폭력의 사회 구조를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참 힘든 일이다. 사실, 이를 이해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오만한 것일지도 모르고.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는 실제로 매우 사회적인 부분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내 경우에도 몇 차례 죽음을 목격하였을 때(가까운 사람이든, 아니든) 슬픔이나 상실감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현대가 삶을 통치하고자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관리하고 유지시키는 것처럼, 오로시성과 카눈이나 신화시대의 그리스 역시 죽음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면 꼭 이상한 것은 없지 않을까? 그걸 너무 낭만화하는 문제적인 시각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를 포함해 옛 종교 신앙의 의식을 현대인이 본다면 그 폭력성, 노골성, 맹목성 등 여러 차원에서 경악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도 그런 느낌이기는 해서 말이다. 신화의 신과 영웅이 정말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우리 눈앞에 내려온다면, 우리는 우아한 문학보다는 스플래터 무비를 보게 될 확률이 높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