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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우니부스 플루람: 텔레비전과 미국소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 모음집, DFW의 글은 항상 기묘한 맛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DFW의 글이 노승영 역자님을 통해 옮겨진, 이 글의 맛이 참 기묘하다고 해야겠음) DFW의 글은 딱딱하게 뒤엉킨, 묘할 만치 영리한, 과교육받은, 스스로 과할 정도로 예민하게 세계 자체들에 깊숙히 중독된, 그런 사람이 어처구니 없게 베베 꼬여버린 심상을 - 자기 자신의 언어로 그대로 옮겨 박제해 놓은, 뭔가 우리 미래의 형상을, DFW라는 사람의 머릿속에선 생생하게 상영되고 있었을 그 광경을 - 글로 옮겨내느라 잠시 굳어버리고 말았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글이냐' 싶어 집요하게 파고들면, 마치 물 속에서 불어나 풀어 헤쳐지듯, 그대로 그의 세계 안으로, 그리고 곧장 설득되고 만다.

기묘한 글이다. 단 여섯글자로 요약하자면 그렇다고 말해야겠다. 그런데 이 에세이에 겨우 그 정도 평가를 하자니 그건 좀 너무하고. 그래서 나 나름의 리스펙을 했음, 그곳에선 평안하시길 - DFW. 하여간에 DFW의 글에는 DFW가 가득 담겨있으니, 그의 책들은 정말이지 죄다 사서 가지고 있을만 하다. (아니, 가지고 있을 만한 게 아니라 [왜 갖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는걸? 더럽게 까탈스럽고 예민하며 착한 천재 중독쟁이가 쓴 글들을 내가 10만원 안팎으로 모두 소유할 수 있으면, 그러하지 않는게 되려 이상하잖아?)
(세상에서 남의 일기가 가장 재미있는 법인데, 문학적인 시선이 너무 흘러넘쳐, 그냥 세상이 어떠어떠하다 - 하고 쓰는 글들 자체가 죄다 일기같은, 도대체 세계가 자기 눈에 어떻게 보인다는 걸, 자기 똑똑하고 민감한 시야로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의 글 - 만큼 재밌는게 어딨겠는가, 그렇지?)

하여간에 말이 길었고, (이런 수사를 계속 덧붙일 만큼 내가 이 글을 좋아하는데) 이 책에는 DFW가 쓴 에세이 몇 개가 묶여 실려있는데, 표제작인 <에 우니부스 플루람~>에 대한 비평을 하고자 한다. 사실 비평이랄것도 못 되는데, 왜인가 하면. 비평이라는 것은, 내가 비평하려는 글이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듯 한지. 내가 내 나름대로 정리해서 말하는 것일 건데.
DFW는 이미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더럽게 정확하게 해서, 이런 지점에서는 재미가 없다. 내가 뭔가 더 명료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도 그냥 재미가 없다. 뭣하러 이미 완전히 가리켜진 것을, 내가 가로막고 무어라 설명하는가?

이 에세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렇게 요약된다: 우리는 남 얘기가 좋다, 그래서 많이 보려고 한다, 죄다 살피려고 노력하며 불안하다, 아, 아아, 재밌는 거 나오면은 어떻게 해. 내가 다른 거 못 보면 어떡해. 나는 다 볼거야, 나는 한 입에 먹고 말 거야. 나는 손해를 보지 않을거야.
이러저러 참 불안하다, 그런데 피곤하다. 방금 퇴근했다. 나른하거든. 그런데 TV라는 것 - 틀어놓기만 하면 나에게 씹어 먹여주는 것. 얼마나 좋은지 말이야.
정보들은 적절한 수준으로 전문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의 한심함을 미묘하게 보여주는 정도로, 딱 그 정도로 자꾸 되새겨진다.

쇼닥터 같은 것 생각해보자, 아이고, 또 이러저러 뭐 홍보하려고 나오셨어요. 이번엔 저러저러한 상품이고, 뭐 뻔하지. 뻔히 다 알고있단 말이지. 아, 그런데 저런 건 확실히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아, 저 전문가의 의견은 좀 제대로 되먹은 것 같은데 말야, 아 저 연예인 또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이러저러 하며 - TV는 시청자를 편리한 비평가의 위치에 쉽게 세워둔다. 상자를 보는 순간, 내가 고고한 비평가요, 많이 알고 있고, 남들은 아마 모르고 볼 사항들을 다 집어내며 보는 자요. 그러면서도 알짜 정보는 다 취하는 자요.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이 행위들을 멀찍이서 보면서 알 수 있다, 이것 자체가 TV에게 사로잡힌 것이니. 에세이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이런 바보같은 TV쇼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며 이 바보짓이 얼마나 바보짓인지, 그런 걸 만들어다 보여주는 TV프로를 기획하는 - 미국 내 명문대 출신 TV프로 기획자들의 모습도 얼핏 보여준다. 정말 명문대 출신들은 알아줘야 한다. 당신들 덕에 우리는 바보같은 것의 더 바보같은 짓을 '정말 바보같아, 하하' 하며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바보같아.

그런데 이 바보짓을 도대체 왜 보고 있는걸까?

이후 에세이는 이런 예시도 보여준다. 화이트노이즈의 한 파트, 미국인들의 행동 양식을 분석한다는, 주인공과 만날 적마다 '노골적으로' 열의와 분석에 들뜬 젊은 교수가, 또 어떤 장광설의 분석을 늘어놓는데. 무엇에 대한 분석인가 하면 - 시골농가에 있는 한 헛간에 대한 분석이다. 이 헛간의 이름이 웃기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촬영된 헛간", 이 헛간을 관광객들은 다시 촬영한다, 도대체 뭘까? 그리고 젊은 교수는 들떠 설명한다, "저런 행위를 하며, 저들은 저러한 순환 고리에 참여하고 있는것이죠." 이러저러. 그걸 한 페이지 넘을락 하는 장문에 걸쳐 이러쿵저러쿵. 아무 반응없이 듣는 주인공.

아 그렇구나. 다소 얼빠진 감각으로. DFW는 이 작태에 대해 다시 이렇게 지적한다 - 이 부분은 원문 그대로 보는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

[(60p) 장면 자체는 명백하게도 부조리하고 부조리주의적이다. 하지만 글쓰기에서 패러디가 발휘하는 위력은 대부분 관람의 잠재적 초월자인 머레이(열띤 비평을 해대는 젊은 교수)를 겨냥한다. 머레이는 관람과 분석을 통해 집단적 시각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중적 이미지가 된 대중적 이미지의 집단적 시각에 항복하게 되는 과정과 이유를 궁리할 것이다. 머레이가 계속 지껄이는 동안 화자의 "침묵이 이어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이것을 양 떼처럼 사진에 굶주린 군중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가련한 조 브리프케이스들(TV시청자들을 가리키는 인물로 에세이에서 설정한 고유명사)이 조롱거리인 이유는 그들의 '학술적' 비평가 자신이 조롱당하고 있기 때문이니 말이다. 전반적인 서사의 어조는 일종의 짐짓 진지한 조롱이요 반어법의 특별한 무표정으로, 잭 자신이 머레이가 말하는 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이 장면에서 소리 내어 말하면 화자 또한 (초연하고 초월적인 "관찰자이자 기록자"가 아니라) 소극의 일부가 되어 자신 또한 조롱거리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드릴로의 또 자른 자아 잭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자신, 머레이, 헛간 관람객, 독자가 모두 앓는 바로 그 질병을 근사하게 진단한다.]

질병 - 도대체 무슨 질병일까? 이 질병이 무엇인지를 논하기는 조금 이를 수 있다. 그래도 그냥, 미리 말해보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나 그거 다 알고있거든' 병이다. 나 그거 다 봐서, 그거 바보짓인거 알고있거든 - 하, 하. 왜 그런 멍청한 일을 하는지, 헛간 찍기라니. 그거 진짜 바보같아 - 그걸 비평하는 일도 바보같아. 멀리서 보면 그것들 죄다 이상해, 그러니 바보같아. 나는 다 봐서 알고 있거든. 그래서 나는 그거 안 할 거야, 바보되니까.

바보되기, 심각한 사안이다. 왜 심각할까? 일단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한 번 상기해보면 좋겠다 - 우리가 자기 자신이 정말, 어떤 경험들의 직접 주체가 되어 자기 고유함으로 맞부딪혀서 성장하고, 성장함을 느끼는 것과. 그러하지 않고, 남이 하는 것을 보면서 웃는것, 특히 그 남이 아주 못 했을경우 '하하하, 그러게 왜 해.' 하고 웃는것, 그러고는 자기는 그것을 [[한 셈 치는]] 것. 이게 중요하다.
[[나는 그걸 한 셈]] 치는 것, 나는 그 행위를 듣고, 보고, 심지어 남이, 아주 똑똑한 남이 '그 행위가 도대체 왜 어찌어찌하게 바보같은지를' 가리켜 보여주는 글을 봤기에, 더더욱 안 할 거라고 마음을 굳힌다는 것.

어떤 행위를 바라보고, 그것의 바보같음을 이러저러 가리키며, 그 행위를 나는 하지 않으리라 웃어 넘기는 것. 솔직히 말하건데, 그것을 바보같이 여김 자체가 뭔가 바보같지 않은가?

개인은 두렵다 - 아닌게 아니라, 정말 두렵다. 이젠 누구든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를, 보여줄 수도 있고, 그것을 상호 감시당할 수도 있다. 평가받는다, 그리고 얼마나 하지 못했는지 따위도 질책받고 말이다. 우리가 항상 보잘것없게 여기는, 가볍게 보는 것들도, 실제로 하자면 '어이쿠, 쉽지 않잖아.' 하는 마음이 들게한다. 정말이지 모든 행위란 것은 실제로 그런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비평조차도 그렇다, 비평도 그렇고 작문도 그렇다. 모든 행위는 보여지는 즉시 평가의 대상, 관음과 분석의 대상이 되며, 수 많은 개인의 의지로부터 눌리는 압박을 받는다.

우리는 행위를 '다 알고있기 때문에' 하지 않음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했을 때, 내가 방금 전까지 남의 행위에 대해 품고있던 바로 그 감정이 - 이제는 나의 것에 향할 것을 알고있기에, 그렇기에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자기 행위의 자체적인 구속력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무언갈 해보는 것을 아는체 하지 않는가. 아는체. 그것은 정말이지 아는체다. 미안하지만 보아서 알 것이 있고, 보아서는 도무지 모를 것이 있다.

관음의 세계는 우리에게 무언가 하나를 시사하고, 그걸 바라보아야 한다. 그 시사점이 무엇인가 - 너는 너가 관음하는 바로 그것을, 직접 해보기는 하고 그런 마음을 품는건가? 그런 것. 너는 정말로 저것을 알고 있는가?

"나는 바보가 아니라 그런거 하지 않아." 라고 웃음짓는 마음에는, 곧바로 수많은 관찰자이자, 평범해서 가리켜지지 않고 숨어들어갈 수 있는 나라는, 편리하지만 슬픈 개인의 개념이 녹아있는 것 같다. 나는 바보가 아니라, 학교 다닐 때 차일게 뻔한 고백같은 거 해보지 않았어. 나는 바보가 아니라 학교 때려치고 밴드를 해본다는 아이디어도 해보지 않았지. 나는 바보가 아니라 튀어보이는 일도 하지 않아. 나는 바보가 아니라서, 하, 하.

그리고 개인은 모두가 바보같이 여기지 않는 일상적 고민의 장으로 후퇴해나간다, 이는 명백한 후퇴다. 다수의 시선에 포착되는 위험, 자신이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명백히 두려워하는 개인, 비평의 폭력적일 수 있는 느낌을 뼈저리게 느끼는 개인은 - 모두가 신경쓰기로 합의한 듯한 문제들에 골몰한다. 개인들은 일정 수준 평준화되는 양, 그 안에서 서로의 '바보같지 않은, 정말이지 현실적이고 사회인적인' 고민들을 골몰한다. 취업하기. 결혼하기. 노후자금. 내집마련. 이러저러 말이다. 요컨데 철이 든다.

텔레비전이라는, 세상 모든 것을 앉은자리서 우스꽝스레 포착하려는 장대한 노력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질문들로 자기 자신이 되려는 노력들에 '너가 두드러 졌거든요' 하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시선의 주목'을 가한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지 그저 낱낱이 드러내 보일 뿐. 이러한 결과로 세상에 참 이러저러 멍청한 바보짓들이 줄었는데, 이로서 점점 모두가 바보가 아닌 곳으로 정렬되며, [볼 것은 사라진다]. 정말이지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시대에 한 6-7년 전 쯤 유행하던 것들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주목을 받으며 이러저러 한 쓴소리들을 듣게될까? [왜 저런담.]


이러한 분석들로, [이런 생각]이 나오게 되었음을 이 비평의 독자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바보같지 않아야 해, 하면서 부단히 애쓰며 노력하는 꼴 자체가 사람을 참 바보같이 만든다"고 말이다. 남들이 무어무어라 하려는 것에 일일이 신경쓰는 그 모든 노력이, 바보같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람을 되려 바보같이 만든다. 왜 무엇을 그냥 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 이 시선의 폭력들, 그리고 나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압력들. 멈출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을 하지 말라고 막는 법은 없거든. 이런 공동시선의 일들 자체가 이미 거대한 산업이지 않은가.
멈출 이유도 없고. 그리고, 압력을 이겨내고 버티는 사람이 다시 주목을 받는 사회, 도대체 무슨 사회일까?

이에 대해서 긴긴 말을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마치 TV편집증같은 꼴이 될 건데, 에세이 내내 DFW는 그런 것을 다시금 메타적으로 또 경계한다(참으로 치밀한 사람이 아닐 수 없는데). 숱한 사람들의 시선은, 참으로 미안하지만, 솔직히 따분하다. 나는 단지 TV를 보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생각해 볼 수 있음을 DFW라는 사람의 시선에서 깊숙하게 고찰하게 됐는데, 나는 이로부터 '도대체가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또 별것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무얼 하려고 하면 인터넷 게시판이든, 어디 트위터 등지든, 아니면 안면은 있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고, 오히려 살짝 낮춰보고 별 것 아닌 사람인 양 취급하려는 사람들 - 등등의 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숱하게 무시당하고 바보취급 당하는 사회이지 않은가. 글을 여기까지 읽어봤으면 이 사태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사실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들을 바보취급 하고 무행위로 돌아서는 이들이 사실은 가장 바보같은 이들이고, 뭘 과감히 해보려는 사람들은 바보같지만, 바보가 아니지 않나, 하고 말이다.

미국에서 제일 많이 사진찍힌 헛간을 다시 사진찍기 - 바보같은 짓이다. 그런데 정말 바보같은 짓일까, 다시 생각해보라. 그냥 할수도 있는거고, 사실 [남들도 하는 것을 내가 다시금 하지]라는 그 감각을 느낀다는 거, 그렇게 나쁜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 아닌게 아니라, 참 논리적으로 웃기는 일인데, 이런 헛간찍기를 바보같이 여기는 생각에 참여함 자체가, 다시금 [남들도 하는 생각을 나 스스로 다시금 하는]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러저러, 결국 죄다 바보가 된다면, 우리는 그냥 내키는 바 대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남들이 무어라 할 것을 걱정하기 전에 그냥 해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남들이 바보라고 하는 일 해보기, 창업, 연애, 여행, 기타 등등의 여러가지 일들을 할 과감함을, 관음의 시선에 참여하며 자기 스스로에게서 박탈시킨다는 것, 이것만큼 세상 우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해버리자.]]
말하고 싶은 건 이렇게 간단했는데 글은 너무나 길어졌다. 요컨데, 통속적인 의미의 바보가 되자. 아닌게 아니라, 평범한 남들은 돈주고 사서 보지도 않는 어려운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사람이 있는지 어떨지, 그런 것을 생각도 안 하고 사서 읽는 행위 자체가 바보짓이다. 하지만 그런 바보짓을 더욱더 맹렬히 해버리자. 그리고 했으면 좋겠다. 왜냐면 모든 일들은 어지간하면, 처음에야 그것을 했음을 후회하지만 - 나중에는 그것을 하지 않았음에서, 후회들이 밀려오니까.

이런 점에서 이 말은 옳다 -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쪽팔리고 눈치없는 일, 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다. 젊음이란 생각할수록 최대로 사고치고 다니기 위해서 있는 시기에 불과하다. 나는 오히려 지금까지 사고를 너무나 덜 치고 다닌 기분이라 되려 이상하게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제발 아무거나 즉각 좀 하자.

도대체 내 알게 뭐람. carpe diem!
그러니까, 자꾸 조용히 숨어대니까, 이렇게 여자친구도 없이 크리스마스에 DFW와 함께 있는게 아니야.
저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