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바 마사야, <의미가 없는 무의미>(2018)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모델을 참조한 구상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뒤틀리고 흐릿하게 처리된 신체를 통해 삶(그리고 성)의 정해진 패턴에서 벗어나려는 에너지의 과잉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탈출이라는 테마를 말하려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화된 프레임으로의 은둔, 포장, 압축이다. 즉 ‘폐쇄 영역’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베이컨과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감의 본질은 아닐까.

인물들은 밖으로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베이컨은, 강하게 압축되어 뒤틀린 신체를 적극적으로 축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1). 일부러 신체를 닫아버리는 것.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는 건 ‘도착적’이다. 베이컨은 실제로 성애에 있어 마조히스트였는데, 그것을 단순히 특수한 사정으로 생각할 게 아니다. 베이컨의 회화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평범한 일상의 ‘폐쇄 영역’에 주목케끔 한다. 그리고, 우리가 ‘폐쇄 영역’에서 간소하게나마 마조히즘적인 쾌락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그림1, Triptych: Three Studies of George Dyer (1969)


일상이란 다양한 ‘약속’, ‘정석’, ‘코드’ 들의 집합이며, 그것들은 바야흐로 베이컨의 캔버스 안에서 구획된 투명한 ‘감옥’ 그 자체이다. 도처에 있는 다중의 프레임 속에서 뒤틀려버린 결과가 바로 우리의 얼굴과 몸짓이다. 이처럼 일상 속 마조히즘을 떠올려보면, 베이컨의 회화는 스릴 넘치는 특수한 장면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구조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초기작부터 베이컨은 대상을 포장하고 격리, 분리하기 위해 특수한 모티프를 사용해 왔다. 직사각형으로 나뉜 색면, 우산, 커튼으로 말이다. 이들은 무언가의 침입을 차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를, 구분지어야만 하는 것이다. 커튼으로 말이다. 예컨대 화면 전체에 적용된 흐릿한 세로 줄무늬 (대표적으로 <절규하는 교황> 등)는 대상이 소멸해가는 속도의 표현이라기보단, 정적으로 드리워진 커튼 혹은 스크린이며, 화면 전체를 ‘폐쇄 영역’으로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다중의 프레임 속에 격리하고, 분리하는 행위는, 회화라는 형식 자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대상을 ‘폐쇄 영역’에 가두는 것, 무언가(프레임 밖)로부터 잘라내어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 사진 기술은 이를 간결하게 구현하고 있다. 비인칭적인 프레임 안에 가두고, 고정하며, 움직임의 연속성을 무화한다. 베이컨의 착상점이었던 연속 사진의 한 장면은, 무언가(이 경우 연속적 움직임으로서의 세계)로부터 단절된 ‘폐쇄 영역’에 다름아니다. 사진이나 영화의 한 장면에서 영향을 받은 베이컨은 아마도 도중에서 멈추어 있는 상태에 매혹되었을 것이다. 비인칭적으로, 넌센스하게 단절되고 밀폐된, 어떤 일시 정지의 상태.

베이컨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때 금색 액자에 넣고 유리를 끼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 지시는 그의 회화 작업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암시하는 걸지도 모른다. 유리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동시에, 금색 액자라는 평범한 장식을 통해 의미적으로도 스스로를 방어한다. 금색 액자는 일종의 카모플라주이다. 회화사의 전통 속에 스며들고 그 속에 숨기 위한 위장색인 것이다.

베이컨의 회화는, 회화의 비밀인 ’폐쇄 영역’을 과장되게 문제시한다. 일종의 메타회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메타회화는 더 일반화하자면 형식 그 자체, 규정된 행위, 또는 ‘법’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질 들뢰즈의 <매저키즘>을 참조해 보자. 마조히스트는 자신을 처벌하는 법으로부터 쾌락의 효과를 얻는다. 법은 죄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뢰즈에 의하면, 마조히스트는 법에 철저히 복종함으로써 법의 올바른 효과를 뒤엎어버린다. 법의 본래 의미를, 형식으로서의 법에 철저히 복종하는 것으로 무효화하는 것이다. 법의 효과를, 고통에서 쾌락으로, 내부로의 뒤틀림을 통해 역전시키는 것이다.

법의 바깥으로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법의 내부에서 법을 뒤집는다. 이것은 ‘내재적’인 반항이며, 놀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상의 법적 프레임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있는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마조히스트적인 방식을 활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이컨의 회화에서 보이는 신체의 회전, 왜곡, 뒤틀림이다. 우리는 일상의 다중적 프레임 속에서 그것들을 활용하며 내적으로 자세를 바꾸어 가고 있다.

프레임, 우산이나 커튼, 유리와 액자. 이런 프레임 밖 모티프의 차폐효과는, 또한 내용적인 모티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교황, 스핑크스, 동물, 인간 신체는 의미의 층위에서 ‘폐쇄 영역’이다. 이것들은 명백하게 그것임을 알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들은 잠재적으로 다의성을 가질 수도 있으나 그 압도적인 ‘말 그대로 그것밖엔 없는’ 폐쇄적 자기참조성(개인적으로 스핑크스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고 생각하는)에 의해 다의성을 차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베이컨에게 있어 ‘폐쇄 영역’으로서의 모티프는 교과서 속 ‘This is a pen’이라는 문장, 그야말로 바보같은 ‘말 그대로 그것밖엔 없는’ 것에 의해, 다의성을 향한 접근(을 유도하는 어떤 예감)을 차폐하는 것은 아닌가. 어떠한 ‘말 그대로 그것밖엔 없는’ 것으로부터, 또 다른 ‘말 그대로 그것밖엔 없는’ 것으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이행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다. 무의미하게 개별로 나열된 복수의 것들을 제시하는 행위. 거기서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도 가능은 할 것이다. 하지만 시도해 보면 안다. 예컨대 스핑크스와 넥타이를 한 남자가 겹쳐진 것을, 무의미하게 분리된 두개의 사고정지의 중첩으로서 보는 행위를.

그림2, Sphinx (1954)



그렇기에 베이컨의 회화에 무언가 더욱 깊고 무한하게 다양하게 생각하게끔 해주는 매력을 요구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게 아닐까. 오히려 매력이 있는 곳은 무언가를 향한 사고를 중단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무언가로 향하는 길목에 칸막이를 세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일부러 사고가 깊어지는 것을 중지시킨다. 일시정지시킨다. 그 한 순간을 밀폐한다. 무언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벽, 칸막이, 파티션... 베이컨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에서 화가로 직업을 바꾸었다. 집은 우리를 무언가로부터 격리시켜 준다. 그런데, 건축가라면 집의 구조를 본질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선 무언가와 엄밀하게 대치해야만 한다. 하지만 베이컨의 작업은 건축가적이지 않다. 본체로서의 집 안에서, 또 다른 하나의 가짜-집을 세움으로써, 집과 그 밖의 무언가, 그 무언가와 불가분한 집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한 기술을 연마시키는 것이다. 본체로서의 집이 무언가와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너(속옷)로서의 회화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건축에서 인테리어로. 내부의 내부를 만드는 행위. 복수의. 가설의. 다양하게 구분지어진 내부의 내부. 베이컨의 화면에서는 복수의 형상들이 서로 미묘한 무관심한 태도로 병립한다. 무의미하게 개별로서 존재하는 그것들은, 해법 없는 암호로서, 그래서 더이상 암호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암호로서 존재하고 있다. 아마도 베이컨의 무의식 속에선 다양한 이미지와 언어가 그러한 해법 없는 암호로서 (’말 그대로 그것밖엔 없는’ 장식으로서) 산재해 있을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무의식 또한 그럴 것이다. 거기서 의식을 끌어내는 것이 아닌, 무의식의 이미지나 언어를 인테리어적으로, 배치하려는 궁리를 통해 어떻게든 다룰 수 있는 삶의, 성의 기법이 존재하는 걸까.

우산이나 스핑크스 같은 ‘폐쇄된 영역’으로서의 기능을, 나나 당신의 경우 어떤 형상에 맡겨 작동시키고 있는 걸까. 우리들은, 세계의 여러 부분들을 어떻게 인테리어화하고 있을까. 도시를 우산 투성이로 만든다. 사물도 인간도 동물도 모두 유적처럼 굳혀버리고, 그 앞에서 망연하게 하품을 한다. 비명 지르듯 하품한다. 무언가를 대하는 공포로부터 얇은 커튼 한 장으로 간신히 격리된, 그런 하품을 하는 것이다.

베이컨의 메타회화-법철학은 일정 단계에서 그 이상의 사고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고를 촉진하고 있다. 사고정지에 대한 시론, 이것이 베이컨의 작업에 붙일 부제가 되는건 어떨까. 우리들의 일상은 다양한 형태의 사고정지로 가득 차 있다. 단일한 사고정지가 아니다. 다양하고 빈곤한 사고정지의 연쇄가, 우리들의 액션인 것이다. 여러 섹슈얼리티는 타자를 대하는 어떠한 축소된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다. 특정한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호불호나 페티시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보같은 ‘말 그대로 그것밖엔 없는’ 상태의 흥분. 어떤 속옷, 이 육감, This is a pen. 두 사람이 함께 틀여박혀,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은 채, 말 그대로가 된다. 두 남자의, 상이한 사고정지의 엇갈림은, 밤마다 다양하고 빈곤하게 채색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