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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간만에 책을 읽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근 1년 간 걸려 본 적이 없던 감기에 걸려 앓다가 몸이 좀 나아지니 견딜 수 없는 권태가 고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쁠 때는 자유가 그리도 그리웠는데, 정작 여유로워지니 같이 놀 친구도 별로 없고 취미도 별로 없다는 현실을 마주한 것이다.
할 일을 찾아...라기 보다는 권태를 피하기 위해 목적지 없이 집을 나서 그저 정처 없이 걷는 중에, 집 근처에 자리 잡은 도서관이 보였다.
직장을 다닐 때에는 퇴근하며 책을 빌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만 하고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 도서관이었다.
퇴근길 역 앞에 있으니 역에서 내려 딱 3분만 들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아마 진심으로 갈 생각은 한 번도 없었으리라
그래도 이 정도로 시간이 남는다면 못 가볼 것도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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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영 읽지 않다가 도서관 같은 곳에 오면 생기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내 취향의 책이 무엇인지 까먹는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책을 한창 읽을 때조차 좋아하는 책과 싫어하는 책에 대한 구분 명확해서 유명한 고전 명작의 부류에서도 안 읽어본 책이 꽤 될 정도로 편식이 심한데,
그 와중에 좋아하는 책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까먹어 버리면 읽을만한 책을 찾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오늘은 그나마 다행이었던 부분이,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이름을 기억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책들은 반죽에 면도날을 넣어 구운 쿠키나 빵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는 그 순간에는 너무도 재미있어서 다음 순간을 기대하게 만들지만,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속이 엉망으로 긁혀 있는,
그런 느낌을 주는 책들을 나는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이 그런 책이었다. 당시에는 후유증이 좀 심각해서 다 읽고 한 사흘은 기분이 엉망이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내 기억 속의 가즈오 이시구로를, 남아 있는 나날을 믿고 고른 책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도 면도날을 품은 쿠키 같은 책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남아 있는 나날'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2차대전에 엮인 여러 삶들을 조명하는 방식은 내가 본 어느 책보다도 세련되었다고
표현하는게 맞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반전 의식을 표현하는 매체들을 보면서 위화감을 품는 부분이 있는데, '전쟁은 나쁘다.'라는 얘기는 하면서 그래서 전쟁을 누가 왜 벌였는지에 대한 내용은 쏙 빼놓는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 특성 상 그런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서 그럴 수는 있겠으나, 전쟁으로 힘들었던 서민들의 삶과 희생을 중점적으로 비추면서 '전쟁은 나빠'라는 이야기를 전 추축국에서 하고 있으면 의식은 아주 쉽게 전쟁을 벌인 양측이 나쁘다는 양비론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가끔은 그게 의도적이라고 느껴진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 일본인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 '그래서 왜 전쟁이 벌어졌는데?'에 대한 질문을 피해 가지 않는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오노는 전쟁을 미화하는 그림을 그려 명예와 재산을 손에 넣은 일종의 전쟁 부역자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사회적 평판은 떨어지고 은퇴해야 했으나, 그렇다고 재산과 명예를 다 잃은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을 했다는걸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서양 문물에 일본이 오염된다고 생각하고, 아들이 만주 침략 중에 죽어도 명예로운 전쟁에서 전사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오노에게 동정심을 품지 않는다.
그렇다고 책이 '일제가 잘못했고 오노는 반성도 모르는 전범 끄나풀입니다! 돌을 던져주세요!'라고 웅변을 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도 잘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과 주변인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나쁜 일들이 자신이 틀린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인다.
소설 자체가 1인칭 화자를 이용한 서술 트릭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그 때문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의식이 과거에 매여 모든 걸 그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건 명확하게 표현된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이 늙은 화가의 자기합리화와 후회와 회한과 책임감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아주 쉽게 살면서 실수하고, 자기합리화하고, 어떨 때는 인정해야만 하는 자신의 초상을 마주한다.
위에서 내가 잘 쓴 소설이란 면도날을 품은 쿠키와도 같다고 했는데, 왜 그렇겠는가? 그게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모습이고 실수고 후회라서 그렇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렇게 2차대전이라는 역사를 아주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인생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녹여내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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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전반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표현의 세련됨은 '남아 있는 나날' 쪽이 좀 더 탁월했던 것 같다.
위에서 소설이 웅변을 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그건 오노를 일방적으로 나쁜놈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가 직접 주제 의식을 말하는 듯한 부분이 조금 눈에 걸렸다.
개인적으로 몰입이 깨져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부분이다.
주인공에 해당하는 오노는 다채로운 인물상을 보여주지만, 몇 몇 인물들은 평면적인 극의 장치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손자는 오노라는 인물이 서술 트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초반부터 암시하기 위한 장치로만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뭐 나는 평론가도 아니고 철저하게 책을 오락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입장에서 한시간 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으니 이런 저런 걸리는 부분은 있어도 최소한 재미 면에서는 충분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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