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인식계(오성)에서 의지(원인)과 도덕(결과) 동시 인식하고, 반면 우리가 의무에 구속된다면, 감각계와 인식계에 동시에 속할 수 있으므로 사태를 감각계에서만 보는것이 아니라 인식계에서도 파악할 수 있으모로 자기모순이나 순환논리에 빠지지 않는다라는 의미인듯
익명(223.38)2025-01-06 21:18
밑에 문단에 힌트가 있음. 핵심은 감성세계/오성세계임. 감성세계는 현상계로서, 달리말하면 가능적 무한임. 데카르트의 코기토, 칸트의 선험적 자아, 후설의 선험적 주관, 하이데거의 현존재 모두 이에 속함. 이를 다루는 칸트의 작품은 순수이성비판임. 여기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묻는데, 이 다음 물음인 '나는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 바라도 좋은가'
익명(221.161)2025-01-06 22:52
답글
를 묻는게 실천이성비판이고,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이 실천이성비판으로의 중간작업임. 이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예비학으로 마련한 현상세계의 가능적 무한을 넘어서, 실천이성비판에서 현실적 무한, 즉 신과 관련된 문제(도덕신앙)을 다룸. 즉 지성의 12범주가 적용될 수 없는 초험적 세계와 물자체에 대한 논의를 함에 있어서 도덕신앙이 필수적이었던 것임. 올려준
익명(221.161)2025-01-06 22:55
답글
본문의 핵심은 결국, 칸트의 체계에서 나타나는 가능적 무한과 현실적 무한의 구분임. 플라톤은 이데아를 통해서 사물적인 앎(가능적 무한, 선험적-지성의 12범주의 내재적 사용법)과 도덕,선(현실적 무한, 초험적)이라는 두 영역을 모두 예지세계에 존치시켰는데 반해서
익명(221.161)2025-01-06 22:57
답글
칸트는 감성세계에 가능적 무한을, 예지세계에 현실적 무한(도덕신앙, 정언명령)을 나누었다는 것임. 그러므로 위의 두 무한자가 마치 어떤 한 세계에만 몰빵되서 순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다고 판단됨.
익명(221.161)2025-01-06 22:59
답글
고마워 사랑해
호매실금곡동(lolkorggd1202)2025-01-06 22:59
답글
왜냐하면 본문에서 경고한 저런 순환론, 즉 두 세계를 구분하지않고 착종시켜 혼란을 야기한 대표적인 예가 하이데거임. 하이데거는 현실적 무한, 즉 플라톤의 동굴비유에서 '동굴 밖의 세계'를, 예지세계를 부정함으로써 감성세계를 현존재(인간)의 본향으로 삼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칸트가 나누었던 앎(의지의 자율도, 엄격히 말해서 선험적 자아의 자율인 바,
익명(221.161)2025-01-06 23:02
답글
가능적 무한자임)과 현존재의 책임(소광희 교수의 용어로서는 '책 지어진 현존재')을 모두 감성계에 존치시킴으로써 순환론, 아니 더 나아가 의미존재와 사물존재간의 혼용 및 개념의 모호함을 야기했음.
조홧속이다! 이랬지 아버지는 그럴 때
내장된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로터리에서 무한 회전 안하고 잘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도덕적이고 이성적일 때 자유롭다는 칸트식 논리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인식계(오성)에서 의지(원인)과 도덕(결과) 동시 인식하고, 반면 우리가 의무에 구속된다면, 감각계와 인식계에 동시에 속할 수 있으므로 사태를 감각계에서만 보는것이 아니라 인식계에서도 파악할 수 있으모로 자기모순이나 순환논리에 빠지지 않는다라는 의미인듯
밑에 문단에 힌트가 있음. 핵심은 감성세계/오성세계임. 감성세계는 현상계로서, 달리말하면 가능적 무한임. 데카르트의 코기토, 칸트의 선험적 자아, 후설의 선험적 주관, 하이데거의 현존재 모두 이에 속함. 이를 다루는 칸트의 작품은 순수이성비판임. 여기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묻는데, 이 다음 물음인 '나는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 바라도 좋은가'
를 묻는게 실천이성비판이고,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이 실천이성비판으로의 중간작업임. 이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예비학으로 마련한 현상세계의 가능적 무한을 넘어서, 실천이성비판에서 현실적 무한, 즉 신과 관련된 문제(도덕신앙)을 다룸. 즉 지성의 12범주가 적용될 수 없는 초험적 세계와 물자체에 대한 논의를 함에 있어서 도덕신앙이 필수적이었던 것임. 올려준
본문의 핵심은 결국, 칸트의 체계에서 나타나는 가능적 무한과 현실적 무한의 구분임. 플라톤은 이데아를 통해서 사물적인 앎(가능적 무한, 선험적-지성의 12범주의 내재적 사용법)과 도덕,선(현실적 무한, 초험적)이라는 두 영역을 모두 예지세계에 존치시켰는데 반해서
칸트는 감성세계에 가능적 무한을, 예지세계에 현실적 무한(도덕신앙, 정언명령)을 나누었다는 것임. 그러므로 위의 두 무한자가 마치 어떤 한 세계에만 몰빵되서 순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다고 판단됨.
고마워 사랑해
왜냐하면 본문에서 경고한 저런 순환론, 즉 두 세계를 구분하지않고 착종시켜 혼란을 야기한 대표적인 예가 하이데거임. 하이데거는 현실적 무한, 즉 플라톤의 동굴비유에서 '동굴 밖의 세계'를, 예지세계를 부정함으로써 감성세계를 현존재(인간)의 본향으로 삼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칸트가 나누었던 앎(의지의 자율도, 엄격히 말해서 선험적 자아의 자율인 바,
가능적 무한자임)과 현존재의 책임(소광희 교수의 용어로서는 '책 지어진 현존재')을 모두 감성계에 존치시킴으로써 순환론, 아니 더 나아가 의미존재와 사물존재간의 혼용 및 개념의 모호함을 야기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