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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4장 「왕 잡아먹는 괴물」 中, 1권 366쪽.
『눈물을 마시는 새』(이하 『눈마새』)는 2002년에 연재되어 2003년 1월에 출판된 작품이다. 2025년 1월에 돌아보면 벌써 22년 전에 간행된 소설인 셈이다.
그 세월 동안 『눈마새』는 한국 판타지 최고의 작품으로 사실상 인정받았다. 독창적인 세계관, 유려한 문장, 빼어난 인물 조형, 능숙한 반전과 아름다운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이 평가를 지탱하는 기둥은 많다. 그리고 『눈마새』를 읽은 사람이라면, 대개 주제의식의 효과적인 형상화를 그 기둥 중 하나로 거론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평에도 불구하고 막상 『눈마새』의 주제를 물어보면 자신 있게 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양장본 4권짜리 대하소설에서 일관된 주제를 건져내는 일이 쉽지는 않으므로, 이것이 꼭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 아쉽기는 하다. 주제와 서사는 소설의 두 날개이고, 서로의 해석을 긴밀히 좌우한다. 그러니 주제가 정립되지 않았다면 『눈마새』는 지금껏 반쪽만 읽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타자(打者) 이영도가 서사의 완성보다는 주제의 완결을 더 중시한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일반적인 평가로는 『퓨처 워커』와 『폴라리스 랩소디』, 『피를 마시는 새』(이하 『피마새』)가 모두 그런 식으로 끝났다. 그런 이영도가 단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성화에 『독약을 마시는 새』를 집필할 리가 있겠는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주제적으로 뭔가 말할 것이 있어야 속편을 쓸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래서 이 글은 『눈마새』의 주제를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다행히 『피마새』의 주제는 이미 다른 글에 잘 정리되어 있다.)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 희망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자는 그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생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로운 자가 사기꾼이라는 것.
17장 「독수(毒水)」 中, 4권 216쪽.
거칠게 줄여서 말하자면, 『눈마새』는 식인 논쟁에서 시작해 완전성 예찬으로 끝나는 작품이다. 그래서 주제를 되짚으려면 '완전성'을 다루면서 시작해야 한다.
위의 인용문은 여기에 큰 도움을 준다. 생에 의문이 있다고 전제해야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 수 있다 - 하지만 의문을 풀면 앞의 전제는 무너진다. 이 모순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간단하다. 생에는 의문이 하나가 아니라고 보면 된다. 과제를 풀면 또 과제가 생겨나고, 위기를 해결하면 다른 위기가 도전해오는 것이 생이다.
『눈마새』에서 말하는 완전성이란 이와 같다. 어떤 고정된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적응하고 일시적인 균형을 이루는 동태적인 경지가 바로 완전성이다. 왜 그렇게 보는가? 그래야 삶의 태반이 불완전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성'이 고정된 목표라면 그 이전까지의 과정은 전부 불완전해진다. 그러나 완전성이 변화하는 것이라면, 삶의 모든 순간들은 완전해질 수 있다.
그래서 『눈마새』의 신들은 세계의 무한한 변화를 옹호한다. 세계가 변화해야 완전성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죄입니다. 자기는 약하니까 표범에게 먹혀야 한다고 믿는 토끼입니다. 토끼는 자신을 부정의 대상이 아닌 긍정의 대상으로 바꿉니다. 표범보다 약한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신을 선택하는 대신 표범보다 작아서 잽싸게 토끼굴로 뛰어들 수 있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자신을 선택합니다. 도망치는 토끼는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17장 「독수(毒水)」 中, 4권 315-316쪽.
'변화하는 완전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눈마새』는 삶의 긍정을 강조한다. 다만 체념으로서의 수긍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선호에 기반한 긍정이다. 외부에서 부과된 도덕에 의거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준칙에 근거해 의욕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순간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적 '강자'가 되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이영도는 명백히 니체의 사상을 참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눈마새』에서 완전에 이르는 방법은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라는 유명한 구절로도 요약된다. 물론 운명이라는 낱말은 부정적인 용례로도 흔히 쓰인다. 그러나 바로 그 방향에서, 삶의 기쁨이나 행복뿐 아니라 실패와 고통까지도 긍정하는 것이 진정한 운명애이다. 그것이 쉽지 않기에 완전성은 위대한 경지다.
『눈마새』의 신들이 선민 종족에게 기대하고 요청했던 바는 이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람의 몫이 된다.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살지. 누구도 내놓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마시니. 하지만 그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아.”
4장 「왕 잡아먹는 괴물」 中, 1권 368쪽.
그런데 삶을 전체적으로 긍정하는 일이 늘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불행은 긍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하다. 삶은 본질적으로 비극이고 생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예컨대, 『눈마새』의 주인공 케이건 드라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케이건은 자신의 선의를 배신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상실당했다. 절대로 내놓고 싶지 않았던 귀중한 것들을 빼앗겼다. 그 절망은 너무 커서 지켜보던 신조차 자아를 잃고 감정을 이입할 정도였다. 이처럼 심대한 피해를 안긴 부도덕한 자들을 『눈마새』는 '피를 마시는 새'라고 지칭한다. 피를 마시는 새는 남의 권리를 짓밟는 악당이고, 남을 파멸시켜 이익을 취하는 이기주의자다. 그렇기에 피비린내를 풍긴다.
물론 피를 마시는 새로 살아도 완전성에 이를 수는 있다. 내키는 대로 행하고 일어나는 대로 인정하며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정신적 '강자'는 언제나 소수뿐이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다른 사람들은 삶의 긍정을 방해당하기 쉽다.
지배자, 상인, ······ 등 ······의 권능을 소원하는 많은 이들이 분명히 ······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용인들 중에는 영웅이나 위인은커녕 이름이 좀 알려진 ······조차 없다. 용인의 권능은 타인을 지배하거나 타인이 소유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에게 지배당할 위험에 노출되게 만드는 것이 용인의 능력이다.
······들은,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1장 「침수(侵水)」 中, 3권 8쪽.
“예.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아무리 커도 아무도 그를 왕으로 여기지 않으면 그렇게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는 없는 거죠. 누군가가 있어야 해요. 그를 왕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그래야만 그는 모든 걸 버리고 그렇게 떠돌아다닐 수 있죠. 그렇다면, 왕은 도대체 뭐죠?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왕은 왕이 되고 싶어하는 저 제왕병 환자들의 목표인가요, 아니면 그 제왕병 환자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의 목표인가요?”
“눈물을 마시는 새요.”
4장 「왕 잡아먹는 괴물」 中, 1권 430쪽.
그리하여 『눈마새』는 마침내 제왕론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왕이 '눈물을 마시는 새'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눈물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되고, 왕이라면 마땅히 눈물을 마셔야 한다는 뜻도 된다. 눈물은 대개 현실이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 흐르므로, 눈물을 마시는 것은 눈물을 유발하는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행동과 다르지 않다.
눈물을 마시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가능하고 사회적으로도 가능하다. 차이가 있다면 개인 차원의 선의가 희생을 수반하며, '피를 마시는 새'의 표적이 될 위험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케이건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다는 믿음을 가졌다. 다만 이 믿음은 사회적으로 눈물을 마실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이때는 눈물을 마시는 자가 직접 희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은 백성들의 눈물을 마셔야 하며, 눈물을 잘 마신다면 위협받을 일도 없다. 다만 왕이 눈물을 잘 마시지 못했다면 위험이 찾아온다. 왕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처형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일거에 청산하려는 압력이 그것이다. 영웅왕이나 극연왕이나 대호왕은 눈물을 잘 마셨기에 천수를 누렸다. 반면 권능왕은 눈물을 전혀 마시지 않았기에, 케이건은 그가 희생양으로 죽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눈물이 줄어들수록 삶을 긍정하는 자들이 많아진다고 본다면, 왕의 미덕은 '피를 마시는 새'의 활동을 억제하는 데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다른 네 종족이 똑같은 평가를 내리는 존재를 찾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전설에는 그런 존재가 하나 있는데, ‘나늬’라 불리는 종족 미상의 여인이 바로 그런 존재다. 나늬에 대해서는 그 이름 이외에 단 두 가지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나늬는 여자다. 그리고 모든 종족에게 아름답게 보인다.
부록 「지명 및 용어 설명」 中, 4권 420-421쪽.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은 보수주의자와 전통주의자들의 괴로움이 될 만한 시대겠지요. 저는 변화 그 자체에는 찬성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일이 오늘의 단순한 확장에 불과할 뿐이라면 삶은 의미를 잃습니다. 그런 큰 찬성 속에서 저는 전쟁에도 찬성합니다. 그것은 분명 변화니까요. 하지만 그 찬성은 상대적인 것이며 저는 정체보다는 전쟁이 낫다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변화들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고결함을 가꿀 수 있습니다.
18장 「천지척사(天地擲柶)」 中, 4권 379쪽.
(+) 감상보다는 해설에 가까운 글이니 본문 피드백은 다 환영이고, 『눈마새』의 서사나 복선에 관해서도 혹시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설명해주겠다.
https://pgr21.com/freedom/102740?sn1=on&divpage=20&sn=on&keyword=meson
글씨가왤케작노
암튼 눈마새 시리즈 읽어보고 싶게하네 ㅊㅊ
너무 기네.일단 념글 보내놓고 나중에 읽어아지
이영도 소설의 최대 단점은 그 의미와 주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서사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자기자신의 욕망이나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음이 드러난다.
눈마새야 꽤 컴팩트하게 잘 썼다고 생각하는데 피마새는 스케일 키우다가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함. 그리고 눈마새까지는 위에서 언급한거 같이 철학적 생각을 데포르메한 것들이 봐줄만 했는데 피마새 쯤 가선 그게 기괴해지고 억지스러워졌다고 생각
결국 니체
펨코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