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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막판>으로 번역본 있지만, 분명 워크룸 베케트 선집에 <엔드게임>이 제대로 소개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조리극 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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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쓸 당시, 원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고통을 3막으로 계획했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글을 쓰던 베케트는 이내 2막만으로도 기다림의 행위는 충분하다는 걸 깨닫고, <고도를 기다리며>는 2막의 희곡이 되었다.


무한에 이르는 것이 끝없이 1을 더하는 행위라면, 이미 1에서 2가 된 이상, 누구나 3이 뒤따를 것이란 걸 예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사실이 되었다. 2막이 끝나고, 완성되지 않은 3막이 뒤따라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계속 고도를 기다릴 것이며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엔 역시 반복되는 4막이 뒤따를 것이다. 그렇게 무한히 기다림이 반복될 것을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독자와 관객들은 한 가지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무대가 끝나도 계속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계속 기다릴 뿐일까? 그 후 정말로 고도는 올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베케트의 이어지는 희곡 <엔드게임>, 혹은 <게임의 끝>은 그 의문에 답을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고도를 기다리다 지쳐버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최후를 베케트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


체스용어로 막판, 말 그대로 무의미한 승부가 계속되는 마지막 단계를 이르는 이 제목만큼 이 희곡을 잘 설명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한 번역가가 ‘엔드게임’을 ‘가망 없음’으로 번역하여 비난을 받았지만, 만약 그가 베케트 번역가였다면 그는 옳았을 것이다. 베케트의 <엔드게임>은 <가망 없음>과 의미가 동치 된다.


앞서 베케트는 무한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도에 2막을 할애하였음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 후속작 <엔드게임>에 이르러선 베케트는 더 이상 숫자를 세는 행위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숫자 1이 있는 순간에, 0에서 1까지 도달하는 사이엔 제논의 화살에 대한 역설처럼 무한한 구간을 지나 1이 되어야하듯, 무한이 성립됨을 베케트는 깨달았고, 그 결과 단막극 <엔드게임>이 나오게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고도와 달리, 엔드게임은 <끝났다>로 시작된다. 


고도를 기다릴 수 있는 미약한 희망이라도 남아있는 세계와 달리, <엔드게임>의 세상은 이미 끝장난 세상이다. 거기엔 어떠한 희망도 없다. 모든 것은 끝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끔찍한 사실은 끝났음이 확정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승부가 결정되었지만 기권조차 할 수 없는 게임에서 무의미하게 체크를 피하기 위하여 왕을 계속 움직여야하듯, <엔드게임>에선 누구도 죽음이라는 안식조차 맞이할 수 없고, 그저 막연히 죽기만을 기다려야하는 상황이다.



<끝은 시작 속에 있었지만, 그래도 넌 계속해.>


<고도를 기다리며>가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에 관한 희곡이라면 <엔드게임>은 끝이 확정된 이후, 끝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미 바깥세상은 모종의 이유로 끝나버렸고, 은신처에서 막연히 기다려야하는 사람들.

그 은신처의 주인이자 폐허의 세상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햄은 눈먼 장님이자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며 그가 키웠고, 그를 돕는 조수 클로브는 햄과 달리 앉을 수 없으면서도 호시탐탐 탈출을 노린다. 은신처엔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잃어 쓰레기통에서 살아야하는 햄의 부모인 넬과 네그도 함께하지만, 어디까지나 <엔드게임>은 서로 의존하면서도 증오하고, 또 사랑하는 햄과 클로브의 이야기다. 마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오랜 기다림 끝에 변질된 것처럼. 


<낱알 위에 낱알, 하나씩 쌓다보면 언젠가는 더미가 있겠지, 불가능한 더미가>


더미의 역설을 읊는 희곡과 클로브의 첫 대사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종말을 의미하는 듯하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고, 무의미하며 차라리 끝나기만을 기다려야하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 증오하거나 애정을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론 서로 의존하기도 한다.


작중 햄과 클로브는 서로에게 왜 자신에게 남는지를 묻는다. 햄은 클로브를 하인으로 대하며 모질게 굴고, 클로브는 늘 탈출할 궁리를 한다.


<왜 내 곁에 남는 거야?>란 햄의 물음에 클로브는 <여기 외에 다른 곳은 없으니까>로 답한다.

<왜 계속 절 곁에 두는 거죠?>란 클로브의 물음에 햄은 <너 말곤 아무도 없으니까>로 답한다.


이렇듯 이 희곡은 서로 파탄이 예견되었음에도 서로 기이하게 기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끝내 어떻게 헤어지는가가 그 중점이다. (그리고 무한히 그건 반복된다)


햄과 클로브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이면서도 일종의 유사-부자관계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사실 이는 실제 베케트의 삶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다. 햄과 클로브의 관계 (혹은 베케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실제 조이스와 베케트의 관계로 해석하는 경우도 상당한데, 꽤나 흥미로운 해석인 것은 사실이다.


젊은 베케트는 조이스의 비서로 일하면서 조이스의 딸이었던 루시아 조이스와 잠깐 사귀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본인이 조이스라는 거인의 늪에 빠져 그 영향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작중 클로브가 햄에게 항의하는 대사에서 의미심장하게 나타난다.


<난 당신이 내게 가르친 단어들을 사용해요. 만약 그것들이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다면, 내게 다른 걸 가르쳐줘요. 아니면 내가 침묵하게 놔두든가.> - 클로브


<네놈은 내게 언어를 가르쳤고, 내가 얻은 이익은 저주하는 법을 내가 안다는 거지. 내게 네 언어를 가르친 네놈은 저주나 받아라!> - 캘리번,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물론 이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프로스페로와 캘리번의 패러디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주종관계란 점에선 서로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세계를 두 사람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결국 극의 핵심은 두 사람의 결별이 언제 이루어지는 가다. 늙은 햄은 늘 진통제를 찾으며, 클로브는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필요한 것을 훔치고 달아날 궁리만을 한다.


<네 머리를 써봐, 어서, 네 머리를 쓰라고, 넌 이 땅 위에 있어, 그리고 거기엔 어떤 대책도 없어!>


그러나 베케트가 그리는 종말론적 세계엔 어떠한 답이 없다. 끝은 예정되어있지만, 그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끝을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게 만들 수도 없다. 그저 무의미하게 기다림과 또 기다림뿐.


<모든 삶들에서, 같은 질문들과 같은 답들.>


<오랜 막판, 오랫동안 져왔고, 놀곤 지며, 계속 지고 있어.>


승부의 끝, 체스에서 이미 승부가 났지만, 체크메이트 이전까지 무의미한 왕의 도피를 해야하는 그러한 게임처럼, 멸망한 세상의 왕 햄은 무의미한 몸짓을 반복하며 극 위에서 극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계속한다.



내가 - 놀아볼까. 오랜 방해꾼!>


햄의 첫 등장 대사는 여러모로 번역하기 까다로운 대사다. Stancher는 개츠비의 Old Sport처럼 어떻게 표현해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 자신이 방해꾼인가, 아니면 다른 이인가? 

아무튼 간에 햄은 다시 한 번 놀고자 한다,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몰락한 왕을 연기하고자 한다. 이미 너무나도 오랫동안 상대해왔기에 친구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오래되고, 친숙한 방해꾼과 함께, 혹은 자신이 스스로 그 방해꾼이 되거나.


고도도 더 이상 오지 않는 그러한 세계. 그럼에도 베케트는 이미 초반부터 여기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준다.


햄의 부모로 등장하지만, 고도 속 럭키와 포조처럼 짧은 대사가 할당된 넬과 네그는 잠깐 대화를 나누지만, 무엇보다도 넬은 베케트의 세상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불행보다 웃긴 것은 없어, 내가 보장하지. 그래, 그건 세상에서 가장 웃긴 거야. 그래서 시작할 때면 우리는 웃지, 우리의 의지로 웃어.

하지만 그건 언제나 똑같아. 그래, 우리가 자주 듣는 웃긴 이야기처럼, 여전히 우리가 재밌다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우리는 웃지 않아.>


끝없이 기다림이라는 형벌에 처하는 베케트의 등장인물들 속에서 넬은 무척이나 특이한 존재다. 그녀야말로 거의 유일하게 베케트의 세상에서 안식인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지혜를 깨달았고, 말 그대로 불행에 대해 웃고, 또 웃는 법을 깨달았기에, 작가에 의해서 안식을 맞이하고, 퇴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어떠한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저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할 것이다, 마치 불교 세계관의 끝없는 윤회처럼.


왕은 모든 것이 반복될 것을 암시하며 퇴장한다. 아니, 잠시 무대 위를 떠난다.


<오랜 방해꾼....넌...남아.>


클로브가 떠나려하고, 햄은 홀로 외롭게 독백을 하며 다시 모든 것을 무대가 시작될 때의 광경으로 되돌린다. 어쩌면 관객은 그가 죽었다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고도를 끝없이 기다리듯, <엔드게임>의 세상 또한 끝없이 반복되는 세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끝없이 햄과 클로브는 서로를 비난하고 조롱하며 늘 탈출과 분리를 꿈꾸고, 그 와중에 넬은 죽음으로서 잠시나마 안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햄의 말처럼 결국 같은 의문과 같은 답은 반복하겠지만, 어쩌면 이 가망 없음의 해답은 베케트의 말처럼 웃음일지도 모른다. 마치 혐오스런 세상을 비웃고, 인간의 창조물을 자랑스러워하는 재단사에 대한 작중 네그의 이야기처럼.


<‘제기랄, 지옥에나 꺼지시오! 이봐요, 정도라는 게 있어, 정도가! 내 말 듣고 있소, 6일 만에, 단 6일 동안 신은 세상을 만들었어. 이봐, 세상을! 그런데 당신은 이 빌어먹을 바지를 3달이 걸려도 못 만듭니까!‘


’하지만 친애하는 선생님! (혐오스럽다는 듯) 세상을 보시오!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리고 내 바지를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