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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본 책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이다. 직역하면 ‘능력의 폭정’ 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샌델은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미국 명문 대학의 입시 부정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은 미국과 다르다. 행정학도의 입장에서 사회과학의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을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먼저 기여입학제도에 대해 간단하게 논의하고 시작해보고자 한다.
기여입학제도는 크게 대학에 재정적인 지원을 한 것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여 입학시키는 금전적 기여입학제도와 사회적으로 기여한 가정의 자녀를 입학시키는 사회적 기여입학제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김현철, 2013). 하지만 금전적 기여입학제도가 공식적으로 만연히 시행되는 국가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한국대학교육협의회, 1997).
이런 상황에서 금전적 기여입학제도가 공식적으로, 만연히 시행되고 있는 유일한 국가인 미국이 오히려 특수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으며, 오히려 사회적 기여입학제도를 공식적으로 여러 방면으로 실현하고 있는 현재 한국에는 적당하지 않은 예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샌델은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는지를 놓고 이루어진다’라고 서술하며 실력을 갖추고 노력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다라는 능력주의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역시 후술하겠지만 저 능력주의 자체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조건에 아래에서 노력하지 않은 사람과 노력한 사람의 차이가 없다면, 더 노력한 사람과 덜 노력한 사람의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샌델은 갈등 지향적 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의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인지,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보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2000년대 이후 갈등 지향적 정치라는 말이 정말 그리 잘 어울릴 수 없을 만큼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러 갈등을 볼 수 있다. 갈등은 필연적이지만, 필연적이라고 해서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조차 모색하지 않는다면 행정학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 필자가 고민해본 그 방법들에 대해서 뒷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승자와 패자
샌델은 첫 장에서 기술관료(technocracy)에 대해 비판하며 논의를 전개한다. ‘기술관료적 통치 방식은 여러 공적 문제를 기술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써 보통 시민들은 손을 써볼 수조차 없도록 만들었으며, 이는 민주적 토론의 범위를 좁히며, 공적 담론의 내용을 공허하게 하고, 개인들이 점점 더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먼저 역시 2가지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다. 모든 공적 문제를 보통 시민들이 다룰 수 있는가? 정부가 하는 일의 범위는 정말 넓다. 간단하게만 얘기해봐도 국방, 치안, 외교, 교육 등 그 다양한 일들을 전부 보통 시민들의 민주적 토론과 공적 담론 사이에서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사실 대부분의 시민 역시 이를 원치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지금의 정부는 민주적 토론과 공적 담론의 범위를 좁히고 공허하게 하는가? 필자는 전 정부가 했던 정책인 국민청원을 매우 좋게 봤었다. 행정적인 문제들은 응당 정부가 하는 것이지만, 국민이 공적으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창구가 있다는 것이 감회가 새로웠다. 현재 정부 또한 국민 참여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직접 국민의 의견을 듣는 창구와 청원 24라는 이름으로 국민청원을 이어받아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민청원게시판은 여론형성의 공간인 동시에 정부의 답변이라는 제도적 차원의 소통공간이라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며 청원의 게시자와 정부의 답변 등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의 내재적 정치효능감이 높게 나타났음 또한 확인할 수 있다(김선희, 2019). 정말 기술관료적 통치방식으로 인해 위와 같은 문제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또한 샌델은 이 장에서,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상류층임을 지적하며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세습귀족제로 굳어졌다고 얘기했다.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생 삼분의 이는 소득 상위 5분위 가정 출신임과, 아이비리그 대학생들 가운데 하위 5분위 출신자는 4%도 되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이에 필자도 통계자료를 찾아 이 주장에 반박해보고자 한다.
상관관계를 수치로 표현한 상관계수는 보통 R로 표시되는데, 그 값은 0~1 사이에 있다. 그 수치가 높을수록 상관관계가 높다고 말한다. 그리고 R의 제곱값, 즉 R-square 값은 해당 변수가 종속변수를 얼마나 설명하는지를 나타내준다. 예를 들어서 만일 학업성적과 지능의 상관계수(R)가 0.6이라면 R-square는 0.36이 되는데 이것은 그 지능이 학업성적을 36%를 설명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학생의 성적에 대한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의 R-square 값은 얼마나 될까? 2015년 한국 학생의 PISA 수학 성적을 기준으로 부모의 경제, 사회, 문화적 지위의 R-square 값은 0.127이다(강선희, 2020: p29).
위 통계자료를 해석하자면, 학생의 수학 성적의 87%는 부모의 배경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 두 나라는 이렇게 큰 차이가 날까? 사실 아주 간단한데, 전술하였던 기여입학제라는 변수의 차이 때문이다. 미국은 10% 이상의 학생은 기여 입학으로 받는다. 이 기여 입학의 대부분은 금전적 기여 입학이며 금전적 기여 입학을 하는 학생의 부모의 경제적 배경이 높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기여 입학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조금 더 정확한 결과가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유전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 어떤 유전자가 노동 시장이 중요시하는 특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 유전자의 존재로 인해 경제적 성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한 세대 지났음에도’ 노동 시장이 여전히 동일한 특성을 중요시하고 그 유전자가 여전히 그 중요시하는 특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성공한 부모의 생물학적 자녀는 그 부모와의 사회적 접촉이 없더라도 노동시장이 중요시하는 특성을 보여주며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Herrnstein & Murray, 1994). 운동선수의 아들이 운동을 잘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으나, 공부와 학업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분야기에 이런 비판들이 이해는 된다. 하지만 논리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샌델이 능력주의에 반대하는 이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문장이다. 필자 또한 이 주장에는 일정 부분 동의하며, 계속해서 나올 이야기들 속에서 필자의 주장이 왜 일정 부분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샌델은 지난 40년간 능력주의적 엘리트들이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엘리트들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유럽과 일본을 재건했으며, 복지국가를 강화하고, 인종차별을 없애고, 40년 동안 부자와 빈자 모두 혜택을 입는 경제성장을 이뤄낸 반면, 그 뒤를 이은 엘리트들은 40년 동안 노동자 임금 정체, 1920년대 이래 최대의 소득 · 재산 불평등, 이라크 전쟁, 19년간 끌고도 아무 해결도 하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재정 악화, 2008년 금융 위기, 인프라 악화, 세계 최고의 인구 대비 구금자 비율, 선거자금 제한 철폐와 선거구의 게리맨더링에 따른 민주주의의 희화화 등을 이뤄냈다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과연 정말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황금기였으며, 그 이후의 엘리트들은 도덕적 가치와 능력을 무관하게 생각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 황금기 속에서도 베트남전과 같은 얼마든지 비판 가능한 일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1980년대 이후에서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일들을 찾아낼 수 있다. 또한 1980년대로 나눈 기준 또한 적절치 않다. 그 때의 엘리트들부터는 교육과정에서 도덕이 배제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을 주입받았다는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역사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봐야하며, 부정적인 사건들이 있다고 나열하며 비판하기에 40년이라는 시기는 너무나도 길다.
Ⅳ.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샌델은 전장에서는 도덕을 배제한 능력주의로 승자와 패자를 나눴다면, 이번 장에서는 능력주의 도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비판한다.
샌델은 본 장에서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며 논의를 전개한다.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 이 논리로 능력주의는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그러면서 개인이 자기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필자 역시 일정 부분, 아니 상당히 동의하는 부분들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도전하고 노력했던 것이 실패하였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들을 잃어서는 안 된다. 부는 노력의 상징 역시 아니며, 가난 또한 나태의 상징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은 또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즉, 자신의 노력하지 않음과 의지없음으로 인해 받는 불이익을 용인해야 한다. 물론 필자는 노력할 수 있는 환경과, 의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우연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더욱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들이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이 노력하지 않기로, 꿈과 의지를 가지지 않기로 선택한 부분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라면 국가의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있어야 한다.
Ⅴ.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3장은 미국의 현 상황에 대해 주로 서술하지만, 그럼에도 한국과 유사한 점이 참 많음을 볼 수 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전 대통령의 유명한 문구이다. 3장에서 계속하여 언급되는 여러 문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샌델은 미국의 현재 현실은 매우 불평등하며, 그 불평등을 합리화시켜줄 수 있는 이유인 계층 이동의 가능성조차 다른 국가들에 비해 떨어지며, 그 이유에는 능력주의와 개인주의로 물들어버린 사회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불평등을 옹호하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며,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더 많아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미국의 현재 현실을 만든 데에 정말 오롯이 능력주의의 탓일까? 생각해보면 그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이클 영의 책으로부터 시작해봐도, 능력주의가 시작된 지는 이제 65년이 됐으며, ‘능력 있는 자가 더 많은 혜택을 누린다.’라는 주장이 시작된 지는 조금 더 됐을 것이다. 모든 사회는 사회의 중심에 있는 가치관이 정착되기까지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이 시기 속에서는 사람들의 계층이 삽시간에 뒤바뀌며 여러 변화가 있다가,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계층의 변화가 거의 없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다.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거치고 난 현재에 이런 주장을 적용하는 것이 어려울까? 라는 의문을 남겨본다.
Ⅵ.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어쩌면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떼놓기 힘든 관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샌델은 본 장에서 의회와 정치 관료들의 대부분이 고학력자임을 예시로 들며, ‘스마.트’라는 가치만을 바라보는 학력주의로 점철된 기술관료주의를 맹렬히 비판한다. 이는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국회의원과 정치 관료들은 고학력자다. 이들은 정말 국민을 대표할 수 없고 그렇기에 공동선을 만들어가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인가? 필자는 오히려 역으로 생각을 해보고 싶다.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도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에 갈 수 있기에 국회나 정부로 가기를 희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 졸업증을 들고 있지 않을까? 만약 그들이 고학력자이기에 대표성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다면, 그들의 출신 배경을 확인하는 것이 조금 더 합리적인 주장이었을 것 같다.
이 장에서 가장 의문이 들었던 것은, 대표성이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일까라는 질문이 들었다. 국민 모두를 대표할 수 있는 정부와 의회를 만들기 위해, 정부 관료와 의원이 되고 싶어하는 개인들의 권리를 빼앗아, 되고 싶은 마음이 크지도 않고 다른 일에 더 관심이 있는 개인들에게 그 권리를 주는 것이 옳은가? 물론 지금은 아직 모두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여유롭지 않지만, 정말 필자가 전술한 것처럼 사회가 노력할 수 있는 환경과 의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준 상황에서조차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인원들이 어떤 집단들에 몰려있더라도 우리는 대표성을 위해 그들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에 도전할 권리조차 침해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옳은가?
사실 이 다양성 문제는 사회 곳곳에서 화두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개인이 자신의 권리 안에서 어떤 것을 선호하는 것을 사회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어떤 직종이나 직장, 자격에 어떤 집단이 몰리더라도 그것을 국가가 조절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아무리 국가가 권장하고 권유하더라도 체육 교사의 과반수는 남성일 것이며 간호사의 과반수는 역시 여성일 것이다. 하지만 체육 교사나 간호사의 다양성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정치와 교육, 그리고 간호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예시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공동선을 이룩하는 것이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부는 그저 간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간호사처럼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정가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공동선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 장에 깊게 서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Ⅶ. 성공의 윤리
샌델은 본 장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두 가지 반론을 검토하며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첫 번째 반론은 완전한 능력주의더라도 그것이 정의로운가? 이며, 두 번째 반론은 능력주의가 공정하더라도 그것이 좋은 사회인가? 이다. 첫 번째 반론에서 샌델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이 주장 역시 일정 부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능력주의 그 하나만으로는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 후 샌델은 ‘재능이 자신만의 것인가’와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에 대해 질문하며 능력주의 옹호자들에게 질문한다. 필자가 답을 해보자면, 재능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공동의 자산이며, 그렇기에 노력은 가치를 일정 부분 창출한다고 본다.
그 다음으로는 하이에크와 롤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둘 모두 정의의 기반으로서 능력이나 자격을 거부한다. 특히 롤스에 대한 이야기가 깊게 나오는데, 이는 샌델은 롤스에 대한 비판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히 롤스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필자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샌델은 롤스의 정의론으로는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을 저지할 수 없다고 본다. 즉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두 원칙이 완벽하게 실현된 정의로운 사회더라도, 공동체 구성원들 서로가 느끼는 연대의 감정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좋은 사회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샌델의 입장이라는 것이다(서정혁, 2022). 물론 필자는 롤스의 두 원칙을 제대로 이해한 시민들이 살고 있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그 공동체는 이미 좋은 사회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샌델의 입장에 회의적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행운 평등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매우 동의한다.
Ⅷ.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먼저 제목을 보고나서 필자는 대학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대학의 목적 중에는 정말 인재 선별기로서의 목적이 없을까? 나는 샌델에게 다시 반문하고 싶다. 대학의 목적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설립자? 교수회? 학생회? 아니, 대학의 목적은 어원에 있다고 본다.
‘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 영어 ‘university’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는 문구이다.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라는 의미인데, 즉 교수와 학생 각자 자신의 목적을 갖고 대학에 와서 그 목적을 이룬다면, 대학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어로 본 ‘대학’의 목적은 다를까? ‘대학은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국가와 인류회의 발전에 필요한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라며 고등교육법 28조에 대학의 목적이 적혀있다. 세세히 풀 필요도 없이, 인격을 도야하는 것과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큰 목적임을 알 수 있다. 그 목적 속에서 인재 선별기로서의 기능은 없을까?
샌델은 이런 필자의 주장에 승자 또한 상처를 입으며,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주는 안겨준다고 주장하며 또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확고한 능력주의적 신념 아래, 연대감과 상호 의무를 떠올리기 어렵게 된다고 주장한다.
먼저, 놀랍게도 한국은 저소득층에 대한 쿼터가 따로 존재한다. 샌델이 미국 대학들에게 바라는 점을 이미 실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한국 대학에서는 이미 저소득층이나 한부모가정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전형 입학을 허용하고 있다.
두 번째로 추첨은 경쟁을 없앨 수 없다. 추첨이 없앴을 수 있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경쟁에서 스스로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는 노력”일 뿐이다. 추첨의 또 다른 문제는, 만일 모든 공적인 지위와 자격에 대해 추첨제를 도입하자고 한다면, 그런 주장이 사회적인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는 데 있다(이현, 2021).
그러나 본 장에서도 필자와 생각의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 있다. 대학은 인재 선별기로서의 역할만을 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살펴본 대학의 목적에 나오듯이, 대학은 인격을 ‘도야’ 해야 한다. 대부분의 대학이 외국어와 컴퓨터 등 각 학교에서 중요시하는 과목들을 교양필수로 지정해 모든 학생들이 이 과목들을 수강해야만 졸업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교양필수의 과목에는 반드시 이 정의와 분배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지, 왜 분배해야 하는지 등 말이다. 30% 정도가 대학에 진학하는 미국과 달리 대학진학률이 80%에 달하는 한국에서는 특히, 대학에서 공동선에 대해 같이 토론하고 생각해볼 시간을 준다면 한층 정의로운 사회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Ⅸ. 일의 존엄성
유일하게 비판할 것이 전혀 없이 필자가 한국에서 느끼며 동의하는 부분들에 대한 장이다. 한국에서도 역시 일은 존엄하지 않다. 아니, 덜 존엄한 정도가 아닌, ‘월급만 믿고 살면 나락’(동아일보, 2021)이라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일은 존엄하지 않다. 반면 자본소득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광풍이 몰아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명 ‘개미 투자자’ 들이 몰린다. 갭투자로 돈이 돈을 버는 방법을 소개시켜주는 책과 방송들은 넘치다 못해 흐른다. 일은, 존엄성을 잃어버렸다. 더 문제되는 것은, 정말 어떤 부분들에선 그들의 일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샌델이 검토하는 2가지 방향의 일의 존엄에 대한 정치 프로젝트 중 첫 번째는 저소득 노동자들에게 임금의 보전을 해주는 것이며, 두 번째는 금융의 개혁으로 소비와 투기, 재산에 과세를 하는 것이다. 2가지 방향 모두에 필자는 동의하며, 이렇게 해야만 다시 일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일을 하는 자들은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을 느끼며 자신의 삶의 만족감과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Ⅹ. 능력, 그리고 공동선
마지막 장이자, 샌델이 주장하는 것들을 총망라한 장이다. 결국, 샌델은 조건의 평등을 주장한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 가능할까? 또한 묻고 싶다. 조건의 평등은, 롤스가 주장한 정의의 두 원칙과 얼마나 다른가? 정의의 두 원칙 위에서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샌델의 마지막 문장에는 적극 공감하며, 필자도 이 장을 마쳐보고자 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Ⅺ. 결론
샌델의 논리가 치밀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왔으나 정작 보니 필자의 논리 역시 치밀하지 못했음에, 독자에게 미리 사과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샌델의 주장들이 대안 없는 비난임을 이유로 비판했기에, 필자는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온 대안들을 서술하며 본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먼저 이 모든 대안의 기본 전제는 롤스의 ‘원초적 입장’ 위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즉, 원초적 입장 위에서 각자는 사회에 있어서 자기의 지위나 계층을 모르며, 천부적 자산과 능력, 지능과 체력, 기타 등등을 어떻게 타고나는지 자신의 운수를 모른다. 또한 누구든지 선에 대한 자신의 생각, 자신의 합리적 인생 계획의 세목을 알지 못하며, 또는 심지어 모험을 몹시 싫어한다든가 비관적, 혹은 낙관적인 경향과 같은 자기 심리적인 특성까지도 모르고 있다. 또한 당사자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의 특수 사정도 모른다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나 그것이 지금까지 이룩해 온 문명이나 문화의 수준도 모르고 있다.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세대에 속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보다 광범위한 제한이 합당한 것은 한편으로 사회 정의의 문제가 한 세대 내에서만이 아니라 세대들 간에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본 절약의 타당한 정도나 천연자원이나 자연적 여건의 보호 등의 문제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여하튼 이론상으로는 합당한 유전적 정책까지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경우들에 있어서 원초적 입장이라는 관념을 철저히 실현하기 위해서 당사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대립시키게 될 어떤 우연한 일도 알아서는 안 된다. 결국 그들이 어떤 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되든 간에 그 결과를 감당할 각오를 가지고 원칙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들은 정치 현상이나 경제 이론의 원칙들을 이해하며 사회적 조직의 기초와 인간 심리의 법칙들도 알고 있다. 또한 당사자들은 정의의 원칙들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줄 모든 일반적 사실들을 안다고 가정된다(장동익, 2005).
이 원초적 입장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각오이다. 우리가 사회에 어떻게 어떤 위치에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로 사회의 원칙들을 결정해야 하는데, 만약 특정 계층에게 불합리한 원칙이라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수도 있기에, 그들은 최대한 정의로운 원칙을 세울 것이다.
첫 번째로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이 원칙에 대해 동의해야 하기에, 마치 수학이 필수적인 고등학교 과목인 것처럼, 철학 역시 필수 과목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학의 교양필수에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공동체적인 가치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승자에게는 오만이 아닌 겸손을 패자에게는 굴욕이 아닌 존중을 심어줄 수 있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사회가 보장해주는 삶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은 각 사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무한정으로 도전할 권리가 있어야한다. 개인의 권리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존중되야하며, 사회는 공공선을 위해 개인이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 번째로 의회의 배심원화이다.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이렇게 적었지만, 미국식 배심원제가 의회와 법원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어떤 정책을 도입하기 전, 의회는 무작위 표본추출된 일정 인원을 의회로 초빙한다. 그 후 각 당에서 그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며 자신의 당에서 원하는 법안을 초빙된 배심원들에게 발표한다. 발표 후 배심원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정책을 선택하며,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후 정부는 무작위 표본추출로 대표성을 띤 배심원단이 선택한 합리적인 법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각종 행정 절차와 공무원을 투입해 법안을 시행한다. 이미 교육을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중에 무작위로 뽑혀 대표성을 지닌 배심원단이 선택한 법안이기에, 정부는 공공선을 추구하지 않고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집단으로 남으면 된다. 대통령은 외교와 국가 일부에 대해서만 권한을 지며 그 외 권한은 의회와 배심원이 선택한 법안에 따라 나뉜다.
네 번째로 대학의 평준화이다. 필자 역시 현재 한국의 대학 입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잘 보고 있다. 반면, 어제 나온 기사에 따르면 강원대·강릉원주대, 안동대·경북도립대 등 다양한 대학이 통폐합을 준비 중인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소 과격할지 몰라도, 본 서평은 현실이 아닌 이상을 바라보기에 감히 얘기해보자면 수학능력시험에서 정부가 제시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은 전부 대학 진학권을 획득할 수 있다. 대학 진학권을 획득한 학생은 그 해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으며, 이때 어떤 대학에 갈지는 오로지 추첨을 통해 정해진다. 또한 모든 대학은 더이상 고유명칭을 사용할 수 없으며, 각자 지역의 이름을 가진다. 예를 들어 서울대는 서울-1 대학교, 연세대는 서울-2 대학교인 순이다. 또한, 교수들 역시 일방적인 추첨을 통해 자신이 강의할 학교에 배정받는다. 이는 한 학교에 우수한 교수진들이 모여, 추첨된 학생들 중 일부만이 우수한 강의를 독점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공부를 안 할 것이라고 반론하겠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우수한 학생들은 낭중지추라는 말처럼 각자의 학교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낼 것이며, 이 탁월한 학생들은 각자의 대학에서 얻은 학점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투자세와 재산세, 상속세와 증여세의 신설 및 강화이다. 샌델의 주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각 세금의 신설 및 강화를 통해 일의 존엄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합리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우연으로 얻은 재능을 통해 더 많은 소득을 얻었다는 것으로부터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에 재산세를 내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며, 상속세와 증여세 또한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굳이 성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어, 각자의 선호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균등한 교육에서 일깨워진 재능을 발휘하고 노력하며, 그 분야에서 성공했다면 분배의 당위성을 느낌과 동시에 겸손과 그 일에 대한 애정을, 실패했더라도 분배받음에 대한 불쾌함 대신 성공한 자에 대한 존중과 동시에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3개월간 고민한 필자의 ‘정의로운 사회’이다.
Ⅻ.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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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rnstein, R. J., & Murray, C. A. (1994).The Bell C.urve: Intelligence and Class Structure in American Life. n.p.: Fre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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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익. 롤즈 「정의론」.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비판과 의견 환영합니다.
본 책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이다. 직역하면 ‘능력의 폭정’ 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샌델은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미국 명문 대학의 입시 부정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은 미국과 다르다. 행정학도의 입장에서 사회과학의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을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먼저 기여입학제도에 대해 간단하게 논의하고 시작해보고자 한다.
기여입학제도는 크게 대학에 재정적인 지원을 한 것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여 입학시키는 금전적 기여입학제도와 사회적으로 기여한 가정의 자녀를 입학시키는 사회적 기여입학제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김현철, 2013). 하지만 금전적 기여입학제도가 공식적으로 만연히 시행되는 국가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한국대학교육협의회, 1997).
이런 상황에서 금전적 기여입학제도가 공식적으로, 만연히 시행되고 있는 유일한 국가인 미국이 오히려 특수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으며, 오히려 사회적 기여입학제도를 공식적으로 여러 방면으로 실현하고 있는 현재 한국에는 적당하지 않은 예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샌델은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는지를 놓고 이루어진다’라고 서술하며 실력을 갖추고 노력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다라는 능력주의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역시 후술하겠지만 저 능력주의 자체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조건에 아래에서 노력하지 않은 사람과 노력한 사람의 차이가 없다면, 더 노력한 사람과 덜 노력한 사람의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샌델은 갈등 지향적 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의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인지,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보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2000년대 이후 갈등 지향적 정치라는 말이 정말 그리 잘 어울릴 수 없을 만큼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러 갈등을 볼 수 있다. 갈등은 필연적이지만, 필연적이라고 해서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조차 모색하지 않는다면 행정학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 필자가 고민해본 그 방법들에 대해서 뒷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승자와 패자
샌델은 첫 장에서 기술관료(technocracy)에 대해 비판하며 논의를 전개한다. ‘기술관료적 통치 방식은 여러 공적 문제를 기술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써 보통 시민들은 손을 써볼 수조차 없도록 만들었으며, 이는 민주적 토론의 범위를 좁히며, 공적 담론의 내용을 공허하게 하고, 개인들이 점점 더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먼저 역시 2가지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다. 모든 공적 문제를 보통 시민들이 다룰 수 있는가? 정부가 하는 일의 범위는 정말 넓다. 간단하게만 얘기해봐도 국방, 치안, 외교, 교육 등 그 다양한 일들을 전부 보통 시민들의 민주적 토론과 공적 담론 사이에서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사실 대부분의 시민 역시 이를 원치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지금의 정부는 민주적 토론과 공적 담론의 범위를 좁히고 공허하게 하는가? 필자는 전 정부가 했던 정책인 국민청원을 매우 좋게 봤었다. 행정적인 문제들은 응당 정부가 하는 것이지만, 국민이 공적으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창구가 있다는 것이 감회가 새로웠다. 현재 정부 또한 국민 참여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직접 국민의 의견을 듣는 창구와 청원 24라는 이름으로 국민청원을 이어받아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민청원게시판은 여론형성의 공간인 동시에 정부의 답변이라는 제도적 차원의 소통공간이라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며 청원의 게시자와 정부의 답변 등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의 내재적 정치효능감이 높게 나타났음 또한 확인할 수 있다(김선희, 2019). 정말 기술관료적 통치방식으로 인해 위와 같은 문제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또한 샌델은 이 장에서,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상류층임을 지적하며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세습귀족제로 굳어졌다고 얘기했다.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생 삼분의 이는 소득 상위 5분위 가정 출신임과, 아이비리그 대학생들 가운데 하위 5분위 출신자는 4%도 되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이에 필자도 통계자료를 찾아 이 주장에 반박해보고자 한다.
상관관계를 수치로 표현한 상관계수는 보통 R로 표시되는데, 그 값은 0~1 사이에 있다. 그 수치가 높을수록 상관관계가 높다고 말한다. 그리고 R의 제곱값, 즉 R-square 값은 해당 변수가 종속변수를 얼마나 설명하는지를 나타내준다. 예를 들어서 만일 학업성적과 지능의 상관계수(R)가 0.6이라면 R-square는 0.36이 되는데 이것은 그 지능이 학업성적을 36%를 설명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학생의 성적에 대한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의 R-square 값은 얼마나 될까? 2015년 한국 학생의 PISA 수학 성적을 기준으로 부모의 경제, 사회, 문화적 지위의 R-square 값은 0.127이다(강선희, 2020: p29).
위 통계자료를 해석하자면, 학생의 수학 성적의 87%는 부모의 배경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 두 나라는 이렇게 큰 차이가 날까? 사실 아주 간단한데, 전술하였던 기여입학제라는 변수의 차이 때문이다. 미국은 10% 이상의 학생은 기여 입학으로 받는다. 이 기여 입학의 대부분은 금전적 기여 입학이며 금전적 기여 입학을 하는 학생의 부모의 경제적 배경이 높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기여 입학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조금 더 정확한 결과가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유전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 어떤 유전자가 노동 시장이 중요시하는 특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 유전자의 존재로 인해 경제적 성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한 세대 지났음에도’ 노동 시장이 여전히 동일한 특성을 중요시하고 그 유전자가 여전히 그 중요시하는 특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성공한 부모의 생물학적 자녀는 그 부모와의 사회적 접촉이 없더라도 노동시장이 중요시하는 특성을 보여주며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Herrnstein & Murray, 1994). 운동선수의 아들이 운동을 잘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으나, 공부와 학업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분야기에 이런 비판들이 이해는 된다. 하지만 논리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샌델이 능력주의에 반대하는 이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문장이다. 필자 또한 이 주장에는 일정 부분 동의하며, 계속해서 나올 이야기들 속에서 필자의 주장이 왜 일정 부분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샌델은 지난 40년간 능력주의적 엘리트들이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엘리트들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유럽과 일본을 재건했으며, 복지국가를 강화하고, 인종차별을 없애고, 40년 동안 부자와 빈자 모두 혜택을 입는 경제성장을 이뤄낸 반면, 그 뒤를 이은 엘리트들은 40년 동안 노동자 임금 정체, 1920년대 이래 최대의 소득 · 재산 불평등, 이라크 전쟁, 19년간 끌고도 아무 해결도 하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재정 악화, 2008년 금융 위기, 인프라 악화, 세계 최고의 인구 대비 구금자 비율, 선거자금 제한 철폐와 선거구의 게리맨더링에 따른 민주주의의 희화화 등을 이뤄냈다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과연 정말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황금기였으며, 그 이후의 엘리트들은 도덕적 가치와 능력을 무관하게 생각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 황금기 속에서도 베트남전과 같은 얼마든지 비판 가능한 일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1980년대 이후에서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일들을 찾아낼 수 있다. 또한 1980년대로 나눈 기준 또한 적절치 않다. 그 때의 엘리트들부터는 교육과정에서 도덕이 배제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을 주입받았다는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역사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봐야하며, 부정적인 사건들이 있다고 나열하며 비판하기에 40년이라는 시기는 너무나도 길다.
Ⅳ.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샌델은 전장에서는 도덕을 배제한 능력주의로 승자와 패자를 나눴다면, 이번 장에서는 능력주의 도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비판한다.
샌델은 본 장에서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며 논의를 전개한다.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 이 논리로 능력주의는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그러면서 개인이 자기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필자 역시 일정 부분, 아니 상당히 동의하는 부분들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도전하고 노력했던 것이 실패하였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들을 잃어서는 안 된다. 부는 노력의 상징 역시 아니며, 가난 또한 나태의 상징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은 또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즉, 자신의 노력하지 않음과 의지없음으로 인해 받는 불이익을 용인해야 한다. 물론 필자는 노력할 수 있는 환경과, 의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우연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더욱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들이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이 노력하지 않기로, 꿈과 의지를 가지지 않기로 선택한 부분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라면 국가의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있어야 한다.
Ⅴ.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3장은 미국의 현 상황에 대해 주로 서술하지만, 그럼에도 한국과 유사한 점이 참 많음을 볼 수 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전 대통령의 유명한 문구이다. 3장에서 계속하여 언급되는 여러 문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샌델은 미국의 현재 현실은 매우 불평등하며, 그 불평등을 합리화시켜줄 수 있는 이유인 계층 이동의 가능성조차 다른 국가들에 비해 떨어지며, 그 이유에는 능력주의와 개인주의로 물들어버린 사회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불평등을 옹호하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며,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더 많아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미국의 현재 현실을 만든 데에 정말 오롯이 능력주의의 탓일까? 생각해보면 그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이클 영의 책으로부터 시작해봐도, 능력주의가 시작된 지는 이제 65년이 됐으며, ‘능력 있는 자가 더 많은 혜택을 누린다.’라는 주장이 시작된 지는 조금 더 됐을 것이다. 모든 사회는 사회의 중심에 있는 가치관이 정착되기까지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이 시기 속에서는 사람들의 계층이 삽시간에 뒤바뀌며 여러 변화가 있다가,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계층의 변화가 거의 없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다.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거치고 난 현재에 이런 주장을 적용하는 것이 어려울까? 라는 의문을 남겨본다.
Ⅵ.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어쩌면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떼놓기 힘든 관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샌델은 본 장에서 의회와 정치 관료들의 대부분이 고학력자임을 예시로 들며, ‘스마.트’라는 가치만을 바라보는 학력주의로 점철된 기술관료주의를 맹렬히 비판한다. 이는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국회의원과 정치 관료들은 고학력자다. 이들은 정말 국민을 대표할 수 없고 그렇기에 공동선을 만들어가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인가? 필자는 오히려 역으로 생각을 해보고 싶다.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도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에 갈 수 있기에 국회나 정부로 가기를 희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 졸업증을 들고 있지 않을까? 만약 그들이 고학력자이기에 대표성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다면, 그들의 출신 배경을 확인하는 것이 조금 더 합리적인 주장이었을 것 같다.
이 장에서 가장 의문이 들었던 것은, 대표성이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일까라는 질문이 들었다. 국민 모두를 대표할 수 있는 정부와 의회를 만들기 위해, 정부 관료와 의원이 되고 싶어하는 개인들의 권리를 빼앗아, 되고 싶은 마음이 크지도 않고 다른 일에 더 관심이 있는 개인들에게 그 권리를 주는 것이 옳은가? 물론 지금은 아직 모두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여유롭지 않지만, 정말 필자가 전술한 것처럼 사회가 노력할 수 있는 환경과 의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준 상황에서조차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인원들이 어떤 집단들에 몰려있더라도 우리는 대표성을 위해 그들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에 도전할 권리조차 침해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옳은가?
사실 이 다양성 문제는 사회 곳곳에서 화두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개인이 자신의 권리 안에서 어떤 것을 선호하는 것을 사회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어떤 직종이나 직장, 자격에 어떤 집단이 몰리더라도 그것을 국가가 조절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아무리 국가가 권장하고 권유하더라도 체육 교사의 과반수는 남성일 것이며 간호사의 과반수는 역시 여성일 것이다. 하지만 체육 교사나 간호사의 다양성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정치와 교육, 그리고 간호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예시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공동선을 이룩하는 것이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부는 그저 간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간호사처럼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정가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공동선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 장에 깊게 서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Ⅶ. 성공의 윤리
샌델은 본 장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두 가지 반론을 검토하며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첫 번째 반론은 완전한 능력주의더라도 그것이 정의로운가? 이며, 두 번째 반론은 능력주의가 공정하더라도 그것이 좋은 사회인가? 이다. 첫 번째 반론에서 샌델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이 주장 역시 일정 부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능력주의 그 하나만으로는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 후 샌델은 ‘재능이 자신만의 것인가’와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에 대해 질문하며 능력주의 옹호자들에게 질문한다. 필자가 답을 해보자면, 재능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공동의 자산이며, 그렇기에 노력은 가치를 일정 부분 창출한다고 본다.
그 다음으로는 하이에크와 롤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둘 모두 정의의 기반으로서 능력이나 자격을 거부한다. 특히 롤스에 대한 이야기가 깊게 나오는데, 이는 샌델은 롤스에 대한 비판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히 롤스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필자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샌델은 롤스의 정의론으로는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을 저지할 수 없다고 본다. 즉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두 원칙이 완벽하게 실현된 정의로운 사회더라도, 공동체 구성원들 서로가 느끼는 연대의 감정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좋은 사회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샌델의 입장이라는 것이다(서정혁, 2022). 물론 필자는 롤스의 두 원칙을 제대로 이해한 시민들이 살고 있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그 공동체는 이미 좋은 사회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샌델의 입장에 회의적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행운 평등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매우 동의한다.
Ⅷ.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먼저 제목을 보고나서 필자는 대학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대학의 목적 중에는 정말 인재 선별기로서의 목적이 없을까? 나는 샌델에게 다시 반문하고 싶다. 대학의 목적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설립자? 교수회? 학생회? 아니, 대학의 목적은 어원에 있다고 본다.
‘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 영어 ‘university’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는 문구이다.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라는 의미인데, 즉 교수와 학생 각자 자신의 목적을 갖고 대학에 와서 그 목적을 이룬다면, 대학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어로 본 ‘대학’의 목적은 다를까? ‘대학은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국가와 인류회의 발전에 필요한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라며 고등교육법 28조에 대학의 목적이 적혀있다. 세세히 풀 필요도 없이, 인격을 도야하는 것과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큰 목적임을 알 수 있다. 그 목적 속에서 인재 선별기로서의 기능은 없을까?
샌델은 이런 필자의 주장에 승자 또한 상처를 입으며,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주는 안겨준다고 주장하며 또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확고한 능력주의적 신념 아래, 연대감과 상호 의무를 떠올리기 어렵게 된다고 주장한다.
먼저, 놀랍게도 한국은 저소득층에 대한 쿼터가 따로 존재한다. 샌델이 미국 대학들에게 바라는 점을 이미 실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한국 대학에서는 이미 저소득층이나 한부모가정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전형 입학을 허용하고 있다.
두 번째로 추첨은 경쟁을 없앨 수 없다. 추첨이 없앴을 수 있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경쟁에서 스스로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는 노력”일 뿐이다. 추첨의 또 다른 문제는, 만일 모든 공적인 지위와 자격에 대해 추첨제를 도입하자고 한다면, 그런 주장이 사회적인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는 데 있다(이현, 2021).
그러나 본 장에서도 필자와 생각의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 있다. 대학은 인재 선별기로서의 역할만을 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살펴본 대학의 목적에 나오듯이, 대학은 인격을 ‘도야’ 해야 한다. 대부분의 대학이 외국어와 컴퓨터 등 각 학교에서 중요시하는 과목들을 교양필수로 지정해 모든 학생들이 이 과목들을 수강해야만 졸업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교양필수의 과목에는 반드시 이 정의와 분배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지, 왜 분배해야 하는지 등 말이다. 30% 정도가 대학에 진학하는 미국과 달리 대학진학률이 80%에 달하는 한국에서는 특히, 대학에서 공동선에 대해 같이 토론하고 생각해볼 시간을 준다면 한층 정의로운 사회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Ⅸ. 일의 존엄성
유일하게 비판할 것이 전혀 없이 필자가 한국에서 느끼며 동의하는 부분들에 대한 장이다. 한국에서도 역시 일은 존엄하지 않다. 아니, 덜 존엄한 정도가 아닌, ‘월급만 믿고 살면 나락’(동아일보, 2021)이라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일은 존엄하지 않다. 반면 자본소득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광풍이 몰아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명 ‘개미 투자자’ 들이 몰린다. 갭투자로 돈이 돈을 버는 방법을 소개시켜주는 책과 방송들은 넘치다 못해 흐른다. 일은, 존엄성을 잃어버렸다. 더 문제되는 것은, 정말 어떤 부분들에선 그들의 일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샌델이 검토하는 2가지 방향의 일의 존엄에 대한 정치 프로젝트 중 첫 번째는 저소득 노동자들에게 임금의 보전을 해주는 것이며, 두 번째는 금융의 개혁으로 소비와 투기, 재산에 과세를 하는 것이다. 2가지 방향 모두에 필자는 동의하며, 이렇게 해야만 다시 일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일을 하는 자들은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을 느끼며 자신의 삶의 만족감과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Ⅹ. 능력, 그리고 공동선
마지막 장이자, 샌델이 주장하는 것들을 총망라한 장이다. 결국, 샌델은 조건의 평등을 주장한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 가능할까? 또한 묻고 싶다. 조건의 평등은, 롤스가 주장한 정의의 두 원칙과 얼마나 다른가? 정의의 두 원칙 위에서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샌델의 마지막 문장에는 적극 공감하며, 필자도 이 장을 마쳐보고자 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Ⅺ. 결론
샌델의 논리가 치밀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왔으나 정작 보니 필자의 논리 역시 치밀하지 못했음에, 독자에게 미리 사과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샌델의 주장들이 대안 없는 비난임을 이유로 비판했기에, 필자는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온 대안들을 서술하며 본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먼저 이 모든 대안의 기본 전제는 롤스의 ‘원초적 입장’ 위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즉, 원초적 입장 위에서 각자는 사회에 있어서 자기의 지위나 계층을 모르며, 천부적 자산과 능력, 지능과 체력, 기타 등등을 어떻게 타고나는지 자신의 운수를 모른다. 또한 누구든지 선에 대한 자신의 생각, 자신의 합리적 인생 계획의 세목을 알지 못하며, 또는 심지어 모험을 몹시 싫어한다든가 비관적, 혹은 낙관적인 경향과 같은 자기 심리적인 특성까지도 모르고 있다. 또한 당사자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의 특수 사정도 모른다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나 그것이 지금까지 이룩해 온 문명이나 문화의 수준도 모르고 있다.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세대에 속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보다 광범위한 제한이 합당한 것은 한편으로 사회 정의의 문제가 한 세대 내에서만이 아니라 세대들 간에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본 절약의 타당한 정도나 천연자원이나 자연적 여건의 보호 등의 문제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여하튼 이론상으로는 합당한 유전적 정책까지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경우들에 있어서 원초적 입장이라는 관념을 철저히 실현하기 위해서 당사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대립시키게 될 어떤 우연한 일도 알아서는 안 된다. 결국 그들이 어떤 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되든 간에 그 결과를 감당할 각오를 가지고 원칙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들은 정치 현상이나 경제 이론의 원칙들을 이해하며 사회적 조직의 기초와 인간 심리의 법칙들도 알고 있다. 또한 당사자들은 정의의 원칙들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줄 모든 일반적 사실들을 안다고 가정된다(장동익, 2005).
이 원초적 입장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각오이다. 우리가 사회에 어떻게 어떤 위치에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로 사회의 원칙들을 결정해야 하는데, 만약 특정 계층에게 불합리한 원칙이라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수도 있기에, 그들은 최대한 정의로운 원칙을 세울 것이다.
첫 번째로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이 원칙에 대해 동의해야 하기에, 마치 수학이 필수적인 고등학교 과목인 것처럼, 철학 역시 필수 과목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학의 교양필수에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공동체적인 가치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승자에게는 오만이 아닌 겸손을 패자에게는 굴욕이 아닌 존중을 심어줄 수 있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사회가 보장해주는 삶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은 각 사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무한정으로 도전할 권리가 있어야한다. 개인의 권리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존중되야하며, 사회는 공공선을 위해 개인이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 번째로 의회의 배심원화이다.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이렇게 적었지만, 미국식 배심원제가 의회와 법원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어떤 정책을 도입하기 전, 의회는 무작위 표본추출된 일정 인원을 의회로 초빙한다. 그 후 각 당에서 그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며 자신의 당에서 원하는 법안을 초빙된 배심원들에게 발표한다. 발표 후 배심원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정책을 선택하며,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후 정부는 무작위 표본추출로 대표성을 띤 배심원단이 선택한 합리적인 법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각종 행정 절차와 공무원을 투입해 법안을 시행한다. 이미 교육을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중에 무작위로 뽑혀 대표성을 지닌 배심원단이 선택한 법안이기에, 정부는 공공선을 추구하지 않고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집단으로 남으면 된다. 대통령은 외교와 국가 일부에 대해서만 권한을 지며 그 외 권한은 의회와 배심원이 선택한 법안에 따라 나뉜다.
네 번째로 대학의 평준화이다. 필자 역시 현재 한국의 대학 입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잘 보고 있다. 반면, 어제 나온 기사에 따르면 강원대·강릉원주대, 안동대·경북도립대 등 다양한 대학이 통폐합을 준비 중인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소 과격할지 몰라도, 본 서평은 현실이 아닌 이상을 바라보기에 감히 얘기해보자면 수학능력시험에서 정부가 제시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은 전부 대학 진학권을 획득할 수 있다. 대학 진학권을 획득한 학생은 그 해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으며, 이때 어떤 대학에 갈지는 오로지 추첨을 통해 정해진다. 또한 모든 대학은 더이상 고유명칭을 사용할 수 없으며, 각자 지역의 이름을 가진다. 예를 들어 서울대는 서울-1 대학교, 연세대는 서울-2 대학교인 순이다. 또한, 교수들 역시 일방적인 추첨을 통해 자신이 강의할 학교에 배정받는다. 이는 한 학교에 우수한 교수진들이 모여, 추첨된 학생들 중 일부만이 우수한 강의를 독점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공부를 안 할 것이라고 반론하겠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우수한 학생들은 낭중지추라는 말처럼 각자의 학교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낼 것이며, 이 탁월한 학생들은 각자의 대학에서 얻은 학점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투자세와 재산세, 상속세와 증여세의 신설 및 강화이다. 샌델의 주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각 세금의 신설 및 강화를 통해 일의 존엄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합리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우연으로 얻은 재능을 통해 더 많은 소득을 얻었다는 것으로부터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에 재산세를 내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며, 상속세와 증여세 또한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굳이 성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어, 각자의 선호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균등한 교육에서 일깨워진 재능을 발휘하고 노력하며, 그 분야에서 성공했다면 분배의 당위성을 느낌과 동시에 겸손과 그 일에 대한 애정을, 실패했더라도 분배받음에 대한 불쾌함 대신 성공한 자에 대한 존중과 동시에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3개월간 고민한 필자의 ‘정의로운 사회’이다.
Ⅻ.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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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2019).국민청원게시판의 특성이 시민들의 정치효능감에 미치는 효과(국내석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서울.
강선희. (2020).부모의 경제력과 자녀의 학업성취도 간 상관관계 국제비교(학위석사).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서울.
Herrnstein, R. J., & Murray, C. A. (1994).The Bell C.urve: Intelligence and Class Structure in American Life. n.p.: Free Press.
서정혁. (2022).공정하다는 착각의 이유, 원래는 능력의 폭정(pp. 280-283).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이현. (2021).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과 능력주의 그리고 불평등 문제. 교육비평, (48), 325 page
월급만 믿고 살면 나락… “직장인도 사업-자본가로 거듭날 준비를 . (2021).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1210/110732543/1.
장동익. 롤즈 「정의론」.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비판과 의견 환영합니다.
뭔 논문 보는거 같네
샌델 비판에 왜 한국 사례를 가져와? 샌델이 한국사회 분석함? 그리고 미국 역사의 맥락은 알아? 하다못해 샌델이 인용하는 책들이나 연구 본건 있어? 샌델의 논증이 가진 강점부터 찾아보는건 어때? 대학 교육의 목적이 인격도야라는건 듣기 좋은 말이지. 너가 교양인이라는걸 어필할 수 있는 멘트. 그게 다야.
샌델이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 철학자이기에 이런 입장에서 비판해봤습니다! 학부생의 비판이라 부족한 적이 많습니다..미국 역사나 다른 언급하신 부분들에 대해선 더 공부해보겠습니다
영어유치원, 명문사립학교, 국제학교, 특목고, 예고 등 다 놔두고 대학만 평준화한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ㅋㅋ
말씀하신 것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이니까, 목적을 무력화한다면 수단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물정 모르는 교숫님들이 그럴싸한 큰그림 그리면서 논리전개하는것 자체가 짜증나고 지겨움... "성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는 말 자체가 얼토당토 없는게, 한번이라도 실패해본 인간은 '안전지대'를 추구하기 마련임. 한번 고꾸라지면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거든. 그것에 대비해서 재산을 쌓고 자산을 마련하는건데... 근데 인간의 심리라는게 소고기 먹다가 돼지고기 먹고, 50평 살다가 30평 살아도 객관적으로는 살만한 인생이지만 그것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단 말이지... 왜냐면 인생이라는게 알수가 없거든. 돼지고기 먹다가 풀떼기 먹고 풀떼기 먹다가 아예 못먹을수도 있는게 인생임. 그렇게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편함을 경험해본 사람은 본능적으로 재산 축적에 공을 들임. 이건 성공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임. 이걸 뭐 안전망을 마련해주겠다 하면서 세금도 투입되고 하는데... 이거 신청해본 사람은 알건데 그냥 그걸 신청하러 가는 모양 자체가 비참한거임. 또 불안한거고 영원히 지원해주는것도 아니라서. 한마디로 저런 소위 촘촘한 복지 사회를 만들겠다는 주장은 걍 뭣도 모르는 풋내기들의 허황된 망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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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런 사회를 추구하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꼭 과거에 응시해 합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좋은 삶이었는데, 지금은 명문대나 좋은 직장이 아니면 별로인 삶으로 치부되기 쉬워서요. 사실은 말씀해주신 풀떼기만 먹어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국가의 수준이 올라왔다고 생각합니다.
복지사회라는건 실패가 없는 사회를 말하는 것임 그것을 지향하는게 복지 임
미국도 총 가진 연기금 소리 나올 정도로 사회보장에 돈 많이 쓰는데 니가 물정 모른다 해봤자 뭐하노ㅋㅋ
갑자기 드는 의문인데 제 위에 댓글 세분은 정상적인 직장을 가지고 월세 혹은 관리비 및 기타 소득세를 내면서 의식주를 본인 돈으로 해결하고 살고 계시나요? 어떻게 댓글만 봐도 안그러고 있다는게 이렇게 티나는지 신기해서 묻습니다
위 댓글 자체가 모순인것이 이미 실현된 여러 고복지 나라들 같은 경우엔 세금을 많이 떼는대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문제가 없음 기회가 많고 적어도 길거리에서 누울 위험이 없는, 실패자가 될 구멍이란걸 거의 메운 사회임 샌델이란 사람이 주장하는게 복지사회의 실현이 아니고 능력주의의 부작용과 조건의 평등이긴 하지만 거슬리는 부분이라 길게 씀
그래서 샌델의 주장이 뭔지 요약을 해서 적어주면 좋겠음 샌델은 지금 능력주의를 비판하는거고 그래서 인재선별기로서의 대학은 옳지 못하다라고 하는 것인가? 그래서 학력주의 엘리트 주의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고 엘리트 주의는 최근 실패적이며 미국에서 계층이동 힘들게 한 원인으로도 능력주의를 꼽는다. 이렇기 되는건가? 님의 반박글을 읽기엔 인용한 샌델의 문장이 짧은 주장으로만 이루어져있어서 어떻게 논리 전개가 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음 예를들어 누군가 뭘 주장했다고 친다. 하늘은 파랗다. 그리고 후에 이유를 서술했음 그런데 이유는 안나오고 누군가가 하늘은 파랗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하늘은 파란가? 이렇게 주장 자체에 대한 비판만 나오니까 읽는 입장에서 알 수가 없음
복지사회라는건 평준화를 반 필연적으로 동반함 박탈감을 없애고 실패도 없애고 평등에 가는 방법 어떤 일을 해도 똑같으면 됨 그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고.. 나는 샌댈이 말한 최근 엘리트주의가 실패적이었다라는 말에는 결코 동의를 못함 물론 원글을 읽진 않았지만 대학이란건 인재양산과 선별을 위한 게 존재 목적임 세계에 이바지 한다 이런건 고등교육이니까 뭐.. 그러니까 프랑스마냥 대학평준화 뿐만 아니라 아예 국가교육을 평준화 해야한다 이 주장이겠지.. 그런데 계층이동이 안되는 이유는 엘리트들이란게 기존 계층에서만 생산되는 구조란거고 그런데 그것은 실패적이라 갈아엎고 평준화해야된다는것으로 들림. 그걸 이룩하는 과정이 당연히 복지일것이고
전후주장과 논리전개는 모르겠지만 재능이란건 그 자신의 것이며 그것은 까 보기전엔 알 수 없는 것임 그렇게 때문에 기회의 평준화가 이뤄져야하는것이고 샌델의 조건의 평등이란 최종적인 주장 자체는 매우 동의함 근거들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이 문장을 토대로 짐작해봤을때 논리전개가 부실했을 것이라고 생각 되어지진 않음. 거지에서 밥 먹으면 평균키 올라가는것처럼 유전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조건이 평등하지않아서 잠재력 날리는 경우 많음 그것까지 케어하고 싶진 않고 또 현실적 문제도 있고 하나보니 그냥 버리게 되는거지
나는 기술관료가 다 해먹어서 나쁘다 이것도 동의 못하고 결론적으로 엘리트 자체는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집단이지만 선별과정에서 기회의 불평등이 아주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여전히 엘리트를 기존 방식으로 생산하되 복지를 늘려서 모두에게 같은 조건의 평등을 제공할 의무가 정부에 있다고 여겨짐 발전적인 방향에서 복지는 해악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기존 엘리트 교육을 유지하면서 조건의 평등을 초석으로 깐 뒤 도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설령 사회가 정한 엘리트 양성의 길에 실패하더라도 차별적 인식 그 자체를 뿌리뽑으면 됨 현실적이지 못하지만 글 자체는 잘 읽었음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원문을 읽지 않으신 분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엘리트를 기존 방식대로 생산한다면, 조건의 평등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움직이는 엘리트의 입장에서, 자신의 자녀에게 확실한 지위를 주고 싶지 않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렸던 삶의 수준만큼은 상속하고 싶어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도
엘리트로 만들고 싶어질테니깐요. 엘리트의 재생산도 현재의 엘리트가 담당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신의 자녀를 엘리트로 만드려는 것은 지극히 한 인간의 개인적 욕망임 가족 지역 단위로 커질수록 그 유대감은 약해질 수 밖에 없고 정부같이 보다 큰 힘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연대하기에 현대 사회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음
아주 잘 읽었습니다 - dc App
역시 정상화는 신롤스 대롤스가 자유주의를 정상화하네 저도 롤스가 좋습니다
평준화라는 대안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싶네 평준화를 시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 하는 방향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거든 반도체를 예로 들어본다면 지금와서 반도체의 생산 시설을 차리고자 한다면 설계만 하는데 수억 달러가 들어간다고 해. 즉 반도체와같은 첨단산업은 극히 자본집약적인 산업이지 또한 양자컴퓨터나 Ai
등의 첨단산업이 더욱 더 자본을 집약적으로 요구할것 같아보인다고 말하는 것이 비약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이런 상황에서 미래산업에 필요한 인력의 질을 평준화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효용을 극대화하는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더 높지 읺을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나라가 국베 사회에서 뒤쳐지고 사회 전체의 효용이 줄어들지 않을까
니가 지향하는 성공할 필요가 없는 사회는 내가 보기에는 혁신을 향하는 동력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려는 사회로 보이는 데 그게 전 인류적으로 올바른 방향일까? 자원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우리의 자원과 에너지 소비량은 점점 늘어갈텐데 혁신이 사라진다면 우리 인류가 지속가능할지 의문스럽네
샌델이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 철학자이기에 이런 입장에서 비판해봤다. 가 진짜 뭔 소리지 ㅋㅋㅋ 님 걍 허수아비 때리는 거임
모든 철학적 저작들은 어떠한 인간이 일정한 문화 환경 안에서 그에게 다가온 문제를 보편적 시각으로 통찰한 결과라는 걸 잊지 마셈 샌델에 대해 비판하고 싶었으면 미국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와야지 ㅋㅋ;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같은 조건에 아래에서 노력하지 않은 사람과 노력한 사람의 차이가 없다면, 더 노력한 사람과 덜 노력한 사람의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조건'이라 하면, 두 개인을 완벽히 동일한 유전과 환경에 노출된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느낀 위화감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주 이따금 당신의 논지를 완벽한 실험실에서 개진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샌델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적확한 논리와 함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