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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도 아니고, 새해는 재미있는 소설로 시작할 겸 요사 소설 꺼내 읽었음. 역시 언제 읽어도 요사 소설 재미있단 말이지...
흔히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영웅이 대의를 위해서 가정과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투쟁에 투신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잖음? 근데 어떤 작품도 그동안 그렇다면 영웅의 귀환을 기다리는 부인의 마음을 그린 적은 없었음. <나쁜 소녀의 짓궂음>은 정확히 영웅의 귀환을 기다리는 배우자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소설임.
하지만,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 클리셰가 특이하게 비틀어진 요소가 존재함. 으레 이러한 영웅 서사의 배우자는 보통 선량하고 수동적이기만 한 존재로 등장하는 여자들인데, 이 소설은 예외적으로 한 소녀를 평생 사랑하는 정직한 소년 리카르도와 그가 사랑하는 '위대한' 애인 나쁜 소녀의 세기의 로맨스를 그렸음.
'착한 소년' 리카르도는 십대 시절 스스로를 선진국 칠레에서 이민 왔다고 주장하는 또래 여자애 '나쁜 소녀'에게 반하고, 그녀와 사귀길 갈망하나 나쁜 소녀는 가난할 뿐인 페루 여자애라는 정체가 탄로나 따돌림 당한 끝에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리고, 리카르도는 놓쳐버린 첫사랑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다는 것이 큰 줄거리임.
소설은 20세기의 페루와 서구 사회를 오가면서 20세기의 역사가 되어버린 유행들을 섬세하게 그림. 리카르도는 50년대의 유행과 그럭저럭 잘 살았던 페루 사회, 60년대의 쿠바 혁명의 열기, 60년대 후반의 히피들과 반전 운동, 유럽의 68혁명, 70년대 떠오르는 일본의 경제 전성기, 80년대 소련의 개혁 등등... 20세기의 크나큰 역사들을 지나면서 꾸준히 자신의 첫사랑 나쁜 소녀를 마주침.
매정한 나쁜 소녀는 리카르도처럼 소시민스러운 순애보에게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적극적인 사랑을 남기지 않은 채 리카르도 곁을 맴돌면서 각 장마다 이름과 신분을 바꾸며 출세를 위해 살아가면서도 자꾸만 리카르도를 마주치며 그를 사랑으로 조련하며 이용함. 리카르도로서는 꿈꾸던 나쁜 소녀와의 결혼 대신 희망 고문만 당하면서 그녀에게 시달림.
여기까지 들으면 그냥 이거 퐁96퐁88남 소설 아니냐? 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의 묘미는 역시 애정과 증오를 오가는 심오한 로맨스의 묘사에 있음. 분명 사랑의 시작은 리카르도의 일방적인 구애였더라도, 그의 사랑이 점차 나쁜 소녀를 변화시키고 역으로 얽매어 가는 모습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게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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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녀의 짓궂음>은 전형적인 로맨스를 표방하면서도 독특한 인간관계와 시대릃 향한 통찰력이 드러나는 블랙코미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음. 요사옹 소설답지 않게 시간과 사건의 뒤섞임이 존재하지 않고,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충격적인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 편임. 아닌가? 소????프트한 스캇 장면이 딱 하나 있으니 뭐 특정 독자는 충격받을지도 모르겠음.
솔직히 요사옹 소설 독파하다 보니 요정도 스캇 정도야 뭐.. 다른 작품들에선 불알 고문씬이나 수간, 부관참시, 하드코어 스캇씬도 나오는데 이건 훨씬 수위가 낫다고 봄.
나쁜 소녀는 화려한 거짓말과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을 홀리는 팜 파탈인 동시에 거대한 야망을 소유한 위인이지만, 그 실체는 대단히 나약하고 초라함. 이 때문에 나이를 먹을 수록 건실하게 살아가는 착한 소년에게 오히려 얽매이고 정을 쌓아가면서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과 자신이 리카르도를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번민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였음.
한편으로는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처럼 주연들의 평생 동안 이어진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보니, 인물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사랑을 실행하는 열의가 약해지거나 인생에 실망하는 장면들의 묘사도 인상적이었음. 이런 디테일들이 알게모르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끌어 올려준 것 같기도 함.
여러모로 재미있다고 느낀 부분은 역시 페루의 역사와 20세기의 역사가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과 상황에 따라 변질되는 사랑의 성격이었음. 요사옹 소설에서 페루의 역사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아직 못 읽어봤는데, <나쁜 소녀의 짓궂음>은 페루의 군부독재와 혼란, 쇠퇴하는 중진국의 모습을 잘 그려내 요사 소설 중에서는 약간 개론적인 성격도 있다고 느꼈음.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사랑하는 방식과 본성에 가까운 살아가는 방식이 충돌하는 모습도 재밌지만, 의외로 이민에 대해서도 묘사가 좋았음. 젊을 때의 꿈을 찾아 프랑스로 이민 온 리카르도가 정작 프랑스 안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죄다 남미 출신이라는 점도 나름 인상적임. 어디에서나 이방인인 이민자의 삶을 향한 조명과 주변인들과의 아름다운 우정 또한 나름의 감동이 있었음.
<나쁜 소녀의 짓궂음>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고결한 사랑을 그린 이야기인데, 가만히 보면 사랑이라는 요소가 상황에 따라 저열한 육욕부터 이기심, 질투나 증오로 작용하기도 하고, 박애와 숭고한 희생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 충격과 감동을 줬음.
사랑이라는 것이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해학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 사랑이 영향을 미쳐 허용시키는 범위가 어느 정도 인지를 암시하는 부분도 여태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시각이라 신선했음.
근데 웃긴 건 이 소설을 대체 순애물이라고 해야 할지, 이기적인 사랑 놀음에 놀아나는 주인공을 학대하는 이야기라고 해야할 지를 모르겠는데, 결과적으로는 둘 다이기도 함ㅋㅋㅋ 순애인데 ntr태그 달린 희한한 작품...
비극적이고 지저분한데도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소설이라, 역시 요사답다고 느낌. 요사는 이렇게 아이러니한 요소의 공존을 테마로 삼는 작가이기도 한 것 같음.
분명 주인공이 그렇게 배신당했는데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어쩐지 눈물이 찔끔 날 거 같은 요상하게 감동적인 희한한 로맨스물이었음.
25년도 요사로 든든하게 시작했으니, 다음은 사탄탱고 읽을 거임. 난이도가 꽤 높다는 작품이라 걱정인데, 독붕이들 모두 내가 완독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부탁함!!
쿠바 혁명은 50년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