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cee80fa11d028319ddf853da70007dc53c7bd36def7f04651f9770d5b2a918d927e379b11a5aa97a1252300e775e89187ca1433a8c3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삼국유사의 는 사()가 아니라 사()입니다.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벌여 놓은 갖은 일들, 즉 인사(人事)를 기록해놓은 것이 삼국유사라는 뜻입니다. 일연 스님께선 거인들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듯 보입니다. 왜일까요? 역사란 거대한 시간의 축적물인데, 여기서 정권은 늘 변수(變數)로써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민초는 상수(常數)였습니다.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근본 동력이 우리 민중들이었다는 뜻입니다. 일연 스님께서 천착하신 부분이 바로 여기가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네의 일들, 그러니까 인사(人事)를 제외하고 역사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학계에서도 미시사에 대한 연구가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백영서 연세대학교 교수께서는 저서 <사회인문학의 길>에서 민중의 이야기, 즉 인사(人事)가 바로 역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분은 학계의 지나친 거시사 연구 경향이 우리네의 이야기들을 많이 놓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근대 역사학 연구란 대체로 실증에 바탕한 사실의 기록, 그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이로 빠져나간 민초들의 이야기와 일(人事)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들 대개가 역사 연구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역사의 정수가 사라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우리들의 이야기가 다시 힘을 발휘하면서 미시사 연구가 역사 연구의 본류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어떤 절박함 때문이 아닐까요. 일본의 줄기찬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정부가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스스로 들고 일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참혹한 실상을 절절한 외침 속에 이야기의 형태로 담아 세계에 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월호 참사 앞에서 유가족들은 자신의 아들딸들과 함께 했던 이야기들을 널리 공유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될 것이라고 목 놓아 외쳤습니다. 반향은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전폭적인 공감이 세계 곳곳에서 날아들었습니다. 거시사 역사 논문에선 나타나지 않아 발견할 수 없었던 이야기의 힘이 분출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격랑의 21세기는 이제 더 이상 거대 담론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존의 끝자락에서 그래도 끝내 삶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이야기와 일(人事)들은 힘이 셉니다. 역사가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도 일연 스님처럼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미시사가가 되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그런 행동들이 모여 역사를 바꿀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