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다지 가치없는 소설이 아닐까?
시야 그 언어의 운율을 기초로 하는 문학이니 그렇다쳐도
소설은 번역을 해도(어지간히 오역을 하거나 답도 없게 만들지 않는 이상) 플롯이나 형식같은 핵심적인 요소들은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언어로 읽어야만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소설이라면 신파 요소 같이 특정 집단만 이해 가능한 요소들이랑 다를게 없지 않나?
다시 말해 세계 문학이라기보다는 그냥 내수용 소설 정도라는거고 그런 소설들은 굳이 읽을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든다.
물론 원어로 읽으면 더 좋은 소설들도 있지만 그런 소설들은 번역본으로 읽는다고 그 느낌이 아예 소멸하는건 아니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역본으로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음.
시야 그 언어의 운율을 기초로 하는 문학이니 그렇다쳐도
소설은 번역을 해도(어지간히 오역을 하거나 답도 없게 만들지 않는 이상) 플롯이나 형식같은 핵심적인 요소들은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언어로 읽어야만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소설이라면 신파 요소 같이 특정 집단만 이해 가능한 요소들이랑 다를게 없지 않나?
다시 말해 세계 문학이라기보다는 그냥 내수용 소설 정도라는거고 그런 소설들은 굳이 읽을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든다.
물론 원어로 읽으면 더 좋은 소설들도 있지만 그런 소설들은 번역본으로 읽는다고 그 느낌이 아예 소멸하는건 아니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역본으로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음.
여기는 책을 읽고 거기에 대한 내용을 말하는 갤 아니였나요? 이런 글은 소설갤로 가서 쓰심이 맞을거 같네요
아무리 얘기를 해줘도 이해를 못하는 자격미달두뇌는 어찌해야 할까! 소금을 뿌려 생선 미끼로 쓰면 딱 알맞겠구나!
이건 뭐
셰익스피어 문학이 내수용이 되어버리는 결론에 이르므로 지나치게 극단적인 주장이다
그건 희곡이잖아. 소설이랑은 다르게 윤율이 심하게 작용하고.
거트루드 스타인의 글처럼 그런 것도 잇잖아요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푹푹이나 응앙응앙 이런것들을 외국정서로 파악할수가있을까?
형식은 언어에 기반하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하고 플롯만을 핵심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 할 수 있지. 번역을 읽으면 원서를 읽을때 즐길만한 부분에서 못즐기는 부분이 생기는 건 맞고.. 물론 소설이란게 정확하게 전달될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예를 들면 같은 표현이라도 읽는 사람마다 다른 그림을 그리겠지) 그 번역을 통해 없어지는
부분이 의미가 없을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건 그 소설이 질이 떨어지는 내수용이라기 보단 너한테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이란 말이 맞는 것이고... 예술품이 기호에 크게 영향받는건데 내게 얼마나 어필할 수 있냐로 객관적인 가치를 평가한다는게 옳은 일일까
꼭 플롯만을 핵심으로 꼽은건 아니고 그거보다 소설 자체의 형식을 중요하게 여김. 다만 형식만 언급하면 또 플롯을 무시한다고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있어서..... 사소한 문장 하나하나의 울림보다는 소설가가 표현하는 전체의 형식은 번역본으로도 충분하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함.
시가 자국민들의 갬성에맞게 국민시인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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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한다
내가 예전부터 늘 주장하던 게 그거임. 좋은 작품은 번역을 타지 않는다고
이거 맞다
그런 소설은 없을 거 같은데. "소설가가 표현하는 전체의 형식"을 소설 전체의 얼개라고 치면 번역이 이걸 전달 못할 수가 없을 거 같음. "푹푹이나 응앙응앙"처럼 디테일한 부분, 가장 간단한 예인 '유희' 정도는 자국민이 아닌 이상 못 느끼거나 딱히 와닿지 않겠으나, 디테일에서 벗어나서 배율을 줄인 다음 접근하면 어떤 소설에 대해서 논하는 데 그닥 무리가 있을 거 같진 않음.
근데 분명한 건 그렇게 투박한 얼개를 따라가는데는 무리가 없어도, 그 얼개와는 딱히 관련이 없는 부분임에도 차라리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걸로 추정되는) 얼개라는 것보다 더 독자의 이목을 끄는 곳이 있기 마련임. 그러면 자연스레 디테일에 대한 아쉬움을 가질 거고. 디테일에의 갈구는 본인이 가장 잘 느끼겠지 책을 읽다 보면
가끔 가다 원서충들이 번역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소설의 내용이 있고 이 때문에 역본을 읽는 독자들은 오독을 한다 등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음.
근데 그게 설명이 가능한 부분인가? "어떻게 오독을 하냐" 물으면 "읽어봐야 안다" 라고 대답할 거고, 읽어봐도 별반 차이를 모르겠다라고 하면 "그건 니가 이미 역본을 읽어서 그렇다, 아직 배움이 부족해서 그렇다" 식으로 말해버리니까 사실상 순환논법 같은데
그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인거지. 심하게 오역하지 않는 이상 소설의 근본 까지 전부 뒤엎어지지는 않을텐데 원서충들의 주장에 따르면 역본은 원서의 발끝에도 못미치는 작품이라더라 ㅋ. 원서든 역서든 좋은건 좋은거지 언어의 차이로 그 가치가 손상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루이스 캐롤처럼 작품 속에서 언어유희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작가도 있으니까. 번역서로 그런 걸 살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이지.
바꿔 말하면 그렇게 특수한 경우에 국한되지 않나 싶음. 소설의 얼개 자체가 디테일(유희)과 아주 밀접한 케이스
근데 특히 모더니즘 유의 작가일수록 저런 경향이 심함. 번역 퀄리티까지 논할 정도의 독서가면 모더니즘 문학에 관심이 많으니까, 원서를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지.
역주로 불완전한 이해를 하는 걸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은데. 말마따나 모더니즘에서 그렇다고 하면, 자국인도 사실상 접근이 쉽지 않을 거고. 역주가 아쉬움을 완전히 덜어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원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Curiouser and curiouser!” 이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인데, 한국어로는 이 짧은 문장에 담긴 언어유희조차 못 살리지. 그래서 앨리스를 좋아한다는 한국인도 저 대사는 모르지. 번역된 문장으로 읽으면 아무런 임팩트도 없거든...
그럼 한국 독자들이 앨리스를 읽을 이유가 없는거지. 영어로 읽어야만 이해가 된다면 굳이 왜? 또한 앨리스가 세계문학이 아니라 영어권이라는 작지만 큰 영역에서만 묶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심오한 작품이 동화책으로만 소비되고 있는 이유지. 근데 동화책으로도 재밌으면 된 거지 뭐
20세기 학계 최대 이슈 중 하나가 언어학이었는데, 작가들도 언어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경우가 많았음... 그래서 모국어의 언어 구조를 이용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작품들이 굉장히 많음. 때로는 그 자체로 작품의 중심이 되기도 함. 조이스가 대표적인 예지...
조이스가 언어탐구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지만 율리시스를 비롯한 소설들이 번역본으로 읽는다하여 무의미한 일이 되지는 않지. 의식의 흐름에 극단을 추구한 것 또한 조이스 소설의 특징이고 이는 다른 언어를 통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면이니까.
글쎄. 개인적으로 무의미한 독서란 없다고 본다. 오역 100%의 책을 읽는다고 해도 ㅋ
그러면 역본으로 읽었을 때 작가의 의도인 소설의 얼개에서 놓치는 부분이 뭐라고 생각함? 소설의 얼개가 소설가 자국 언어와의 연계가 높아진다고 해도 커다란 흐름을 놓치게 되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음 아무리 모더니즘이라고 해도. 다른 소설이 되진 않는 거지 앞에서 말한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 뿐.
소설의 얼개가 서사 말하는 건가? 모더니즘 소설에서 서사는 거들 뿐이지...
난 소설의 얼개라는 말을 좀 더 넓게 썼음. 위에 댓글에서 썼듯이 '소설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얼개라고 임의로 설정해뒀음. 그래서 모더니즘 소설에서, '소설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역본으로 읽었을 때 놓치는 부분이 뭐라고 생각함? 커다란 흐름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일어남? 디테일이 아니라?
철학자들도 깊이 다루는 소설이 어린이용으로 소비된다면 커다란 흐름을 놓치고 있는 거 아닐까?
그게 번역의 문제냐 아니면 일종의 편견에 의한 거냐에 따라서 다르겠지.
만약 번역에 의해서 흐름을 놓치게 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검증이 필요한 부분임. 반대로 소설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동화'로서 수입됐고, 그것이 고착화되어 어린이용으로 소비된다면 이건 번역으로 말하기엔 무리가 따르지.
번역의 문제지... “Curiouser and curiouser!” 이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인데, 한국어로는 이 짧은 문장에 담긴 언어유희조차 못 살리지. 그래서 앨리스를 좋아한다는 한국인도 저 대사는 모르지. 번역된 문장으로 읽으면 아무런 임팩트도 없거든...
또한 소설의 얼개를 작가의 의도라고 했을 때 '철학자들이 깊이 다루는 것'이 작가의 의도인가 하는 물음도 뒤따르게 되겠네. 해석에 있어 작가의 의도를 축소하는 경향이 대세긴 하다만, 적어도 '작가의 의도'라는 주제에 걸맞는가 하는 문제는 제기될 수 있음.
그러면 그 유명한 대사를 모른다고 해서 루이스 캐럴이 전하고자 하는 것에 커다란 오류가 생긴다는 걸 너가 보여주면 되겠다. 그 언어유희를 못 살리는 건 맞아. 그러면 어떤 식으로 소설의 커다란 흐름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임?
언어유희는 작가의 의도를 알기 너무 쉬워서;; 철학자들이 다루는 것도 그 언어유희(해체)니까. 이건 관련책을 조금만 읽어봤다면 별다른 물음이 필요없는 얘기임
뭔 소리임 그게? 지금 니가 제시한 문장을 제대로 해석 못함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얼마나 벗어냐나고 물었는데 그게 알맞은 대답인지 모르겠는데 최대한 상세하게 풀어줄 수 있음?
언어유희를 못살리니까 대사가 전혀 안통하지. 등장인물들이 동문서답하는 것처럼 보임. 그래서 윤문하는 경우가 많고. 결과적으로 원래의 난센스와는 더 다른 의미가 되어버림
"읽어봤으면 아는 거다" 난 이런 대답이 굉장히 쓸모없고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보거든. 순환논법으로 빠지기 좋고 그래서 결국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너가 의도한 게 이렇진 않을 거 아냐. 그러니 상세한 설명 부탁함.
아주 쉬운 설명이 있지. 야민정음 알지? 한국 작가가 야민정음이 너무 좋아해서 이걸로 소설을 써야겠다, 했는데 외국인들은 못알아들을 거 아냐. 작가의 의도를 전혀 캐치할 수 없지.
윤문이라는 건 결국 원문과의 의미는 벗어나지만 '대화가 이어지게끔' 각색하는 걸 의미하잖아. 원래의 넌센스와는 다른 의미가 됐고, 그래서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나게 된 문장 좀 볼 수 있을까?
근데 소설에서 야민정음으로 대화하는 야갤러 둘이 등장해. 그럼 번역서를 읽는 외국인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까?
당연히 완전한 파악은 불가능하겠지. 그렇다고 그들의 대화를 놓치면 소설의 커다란 흐름을 모조리 놓치게 되나? 그건 아니란 거지. 디테일한 부분을 놓쳤다고 얼개와 멀어지는 게 아니듯이.
근데 내 생각과는 반대로 디테일을 놓치는 게 곧 얼개를 놓친다는 사례가 있다면, 그걸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문제임. 단순히 말만 해봐야 '디테일'에 대해서만 논하는 꼴이니까.
그걸 굳이 찾아줄 수고를 들이고 싶진 않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Curiouser and curiouser 나 jam to-morrow and jam yesterday - but never jam to-day 를 국내에서 어떻게 번역해놨는지 찾아봐. 기가 찰 거다.
그 부분이 어떻게 번역됐든간에 그 부분이 윤문이 됐다고 해서 소설의 커다른 흐름을 놓치는 것인가? 작가의 의도와 엇나가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논증이 필요함.
거증책임을 회피하더라도 상관없음. 다만 난 니가 디테일에 대해서 논하는 걸로 보일뿐이야 그럼.
넌센스가 루이스 캐롤 소설의 큰 흐름임. 근데 그 넌센스가 오역과 윤문 때문에 센스로 읽힘. 그럼 큰 흐름을 놓치고 작가의 의도와 어긋나는 거지
넌센스가 꼭 그 문장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 내가 디테일이라고 따지는 거고.
그 문장을 '센스'로 접하게 되면 커다란 흐름을 놓치게 된다고? 넌센스로 쓰여진 작품이면 그 문장 말고도 넌센스는 넘쳐날텐데 하필이면 너가 제시한 문장을 '센스'로 접하게 될 경우 커다란 흐름을 놓치게 된다는 건 너가 제시한 근거의 가치를 아주 높게 사는 걸로 보임.
? 그런 문장이 대부분이야. 내가 올린 건 예시일 뿐이고
번역서에서는 넌센스를 1%도 못살린다고. 읽어보지 않았다면 억측하지 말길.
그래서 넌센스가 센스로 읽히는 경우가 얼마나 잦길래 아예 소설의 큰 흐름을 놓치게 되는지 알아보자니까 너가 회피하는 거 아님? 여기서부터 너의 주장은 신빙성을 잃게 됨.
내가 읽어봤으니 그렇다는 건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함. 니가 감정적으로 곤두섰다는 것 외에는 딱히 뭘 지시해주는 게 있지 않아.
1프로도 못살린다라. 그럼 그걸 남들에게 보여주면 되는 일이야. "1프로도 못살린다" "2프로도 못살린다" "3프로도 못살린다" "10프로도 못살린다" 이 문장들의 공통점이 뭔 지 아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아무렇게나 내뱉을 수 있는 말이란 거임. 저 숫자는 1이든 2든 10이든 12든 소용이 없음. 검증이 안되니까.
그럼 문장을 몇 개 제시해야되는것임?
https://www.psychologytoday.com/intl/blog/brain-workout/200908/the-doublet-puzzle-masterpiece-the-pen-lewis-carroll
니가 일일이 문장을 제시할 수는 없잖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데. 역본을 읽음으로써(번역에 의하여) 루이스 캐럴의 의도에서 엇나가거나 소설의 큰 흐름을 놓치게 된다는 걸 주장한 레퍼런스를 제시하면 됨.
ㅇㅋ 위에 레퍼런스 제시했다
니가 제시한 건 번역뿐만 아니라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도 어려워할 걸로 보이는데. 그리고 저게 루이스 캐럴의 의도라는 건 어디 나와있음?
저기서 루이스 캐럴의 의도에서 엇나가거나 소설의 큰 흐름을 놓치게 된다는 문장이 어디있음?
루이스 캐롤의 단어퍼즐 책인데. 번역서로 읽으면 당연히 의도가 완전히 달라지겠지? 철자부터가 다르니까
예를 들어 캐롤이 h를 단어의 가운데에 놓고자 했어. 한국어에는 h에 대응하는 글자가 없으니 번역이 불가능하다. 이것임.
'단어퍼즐'책이면 그렇겠지. 그리고 루이스 캐럴뿐만 아니라 타국의 어느 작가든간에 마찬가지겠지.
애초에 한계가 분명한 '단어퍼즐' 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난 앨리스 시리즈에서 소설의 흐름을 놓치거나 작가의 의도에서 엇나가는 걸 바랐는데 굉장히 아쉽네.
https://www.psychologytoday.com/intl/blog/brain-workout/201805/the-puzzle-art-lewis-carroll
Carroll was fascinated by the inquisitive and fanciful (ludic) imagination of children. Alice’s Adventures contains all sorts of puzzles involving ingenious mind play and double-entendre that have amused and challenged children ever since the book was first published. He was especially captivated by the ability of puzzles to impose a peculiar kind of ordered thinking on the erratic and capricious
글쓴이가 토론토대학 기호학 교수임. 저런 설명을 읽고도 레퍼런스가 더 필요하다면 디시에서 그건 억지지.
"He was especially captivated by the ability of puzzles to impose a peculiar kind of ordered thinking on the erratic and capricious" 그러면 얼마나 언어유희를 받아들여야 작가의 의도를 따라간 걸까? 어차피 번역은 '완전함'을 기대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니 반드시 있을 '윤문'을 감안하면 얼마나 놓치게 돼야 작가의 의도와 멀어지는 거임?
번역이라는 것 자체가 각색 윤문 따위를 감안하는 것이라면 루이스 캐럴이든 페소아든 장 주네든 '작가의 의도'와 일정 부분 멀어지는 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거임. 다만 루이스 캐럴의 경우 '게임'에 가까우니 그 정도가 더 크겠지.
캐롤 같은 작가는 어떻게 번역하든 큰 흐름은 놓치게 된다 봄. 넌센스와 언어유희가 캐롤이라는 작가를 특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 밑에 누가 말했듯 하루키는 번역서로 읽어도 원서와 별 차이 없을 듯.
근데 말했듯이 언어유희나 넌센스로 쓰여진 소설이라면 앞서 제시된 문장 뿐만 아니라 훨씬 많은 문장들 역시 언어유희나 넌센스로 이루어졌겠지. 그것들 중에서도 제시된 문장처럼 번역 자체가 불가한 문장이 있는가하면, 윤문을 하든 역주를 달든 적어도 기교를 느끼게끔 작동되는 번역된 문장도 있을 거란 유추도 가능함. 그걸로인해 얼추 루이스 캐럴의 의도를 따라갔다면, 이건 루이스 캐럴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거고, 또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님? 적어도 '완전한 이해'가 목적이 아닌 이상?
평소에 모더니즘 루이스 캐럴 얘기 별로 하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왜 그러냐... 평소에 19세기 문학 그렇게 빨아대는데 솔까 그짝 문학은 번역 별로 안 타는거 맞지 않나?
어.... 나한테 얘기하는거? 저는 20세기 문학을 좋아는디요 ㅎㅎㅎ. 그냥 있다가 심심해서 써본거지 뭐.
아니 그냥 독갤럼들 말하는거임. 모더니즘 얘기 별로 못본 것 같은데... 조이스나 캐럴 같은 애들은 언어유희나 난센스, 언어학을 응용한 실험 같은 것들이 중요한 주제니까 이건 원서가 중요해지는 거 인정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유희, 난센스, 언어학 등은 모든 언어에 보편 다 있는 거니까 세계문학으로 예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절에 수많은 실험적인 작품이 난무했지만 내용의 밀도를 겸비하지 못한 작품들은 결국 잊혀졌지. 조이스나 울프나 등등 작가 작품은 아마 내용의 밀도를 갖추었기 때문에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이스 사놓고 아직 안 읽어봐서 잘 모르긴 하지만 솔직히 읽어본다고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지 않긴 함 ㅋㅋㅋ
반면에 19세기, 아니면 21세기 작가 중에서 예를 들어 대도시인들의 소외니 갬성이니 하는 것들이 메인 테마가 되는 작가들, 이를테면 하루키 같은 애들, 이런 애들이 번역을 탄다고? 요즘 대도시는 어딜가나 비슷비슷한데 정말로 언어에 따른 차이가 넘사벽으로 클까? 아돈띵쏘.
놀랍게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키는 번역본이 더 재미있을지도...
반대로, 위에 누군가가 백석의 시를 인용했는데, 푹푹이니 응앙응앙이니 하는 건 당연히 번역이 안 됨. 그렇지만 고향에 대한 상실이나, 잊혀져 가는 농촌에 대한 향수 같은 정서는 충분히 전달 가능함.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정서이기도 하고. 원서충들 주장대로라면 "힐빌리의 노래" 같은 건 존나 이해할 수 없는 남 얘기가 되어야 하는데, 안 그렇잖아?
해외여행가서 손짓발짓으로도 보편적인 정서는 전달 되잖아. 존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는 없자너. 근데 문학에서는 보편적인 정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 그 "어떻게" 라는 도구가 "언어"인 거고.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농촌에 대한 향수 같은 정서"를 전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농촌에 대한 향수 같은 정서"를 "내"가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있는 거 같음
ㅇㅇ 그것도 맞고 중요한 얘기긴 한데, 늘 그렇듯 충들이 문제지 뭐... 기본적인 테마를 이해하는 데는 번역으로도 충분하고, 만약에 거기서 더 들어가고 싶다고 하면 원어를 파고 들어가는 것인데, 그건 각자 선택해야 하는 몫이잖아.
그걸 깡그리 다 무시하고 지들이 이해한 만큼 남들도 이해하지 못하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열등한 것이라고 까내리기 바쁜 놈들이 있어서 얘기가 자꾸 길어지는 거지... 생각해보니 낚인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