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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소설과 한국의 대표적 판타지 소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글이 쓰여진 방식도,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다르다. 그러나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던 중 불현듯 두 다른 소설 사이의 맞아떨어짐이 느껴졌다. 한쪽은 들어가고, 다른 한쪽은 나와 요철이 맞물리듯이.

J.M.쿳시가 쓴 <야만인>은 쿳시의 소설에서 주로 다뤄지는 반식민주의적인 주제의식이 매우 노골적이고 직접적이게 드러나는 글이다. 제3국은 변방의 야만인들을 퇴치하고자 부대를 보내며, 변방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모든 문제를 야만인들의 탓으로 돌린다. 야만인들은 사실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부대의 병사들의 공격은 무방비한 야만인들을 덮치고, 그들은 곧 주민들이 생각하던 대로 적이 되어간다. 이렇게만 보면 <눈물>과 무슨 연관이 있나 싶을지 모르지만, <야만인>에서 지속적으로 변주되어 나오는 말이 하나.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걸까?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pp. 219-220)

주인공 치안판사의 사고를 통해 몇 번씩 슬쩍 슬쩍 언급되던 내용이 소설의 끝에서 응축되어 제시된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에서 살고 있다. 헤겔적이고 진보적인 시간.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도시로 되며 국가를 이루어 왕이 생기며 다른 나라들을 잡아먹는 단계가 보편적이고 필수적이라는 양.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 의식 자체보다는, '그러기 위해서 잡아먹어야 할 야만인, 악마 같은 야만인의 존재를 찾는 것'이지만, <눈물>을 떠올린 부분이 이곳이기에 여기에서 말을 멈추기로 하겠다.

어째서 여기에서 <눈물>을 떠올린 것인가 하니, 판타지 독자들에겐 익숙하기 짝이 없는 제사를 보자.

"하늘을 불사르던 용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왕자들의 석비도 사토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이 문장에서 제시되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는 과연 긍정적인 시대일까, 부정적인 시대일까? 하늘을 불사르던 용과 왕자의 대립이 사라진 평화로운 시대는 작은 대립이 있더라도 그럭저럭 살기 좋은 평화로운 시대가 아닐까? 하지만 <눈물>은 글 전체를 통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세상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굴러가도록, 혹은 진보하도록 요구하는 신들과, 왕이 없는 시대를 '멈춰버린 시간'이라고 하며 시간이 흘러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들. 곧 이 세상은 '발전을 멈춘 정체된 시기'라는 것이다.

그 말을 입증하듯 신들은 세상이 흘러가도록 손을 쓰며,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들의 왕이 생겨나며, 이후 <피를 마시는 새>의 번영으로 다시 한 번 더 나아진 시대를 긍정한다. 신들이 보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냉전이 끝난지 한참 된 지금은 한물 간 이야기긴 하지만, 일단 이런 관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냥저냥 살아가는, 변화 없는 순환적인 삶은 부정적이라 여기고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 계란을 깨야 한다'고 보는 시각 말이다.

비록 사회주의의 유명한 말을 인용해서 말하긴 했지만, 꼭 사회주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진보가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역사와 문명에는 단계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그 단계에서 더 나은 나라나 문명을 보며 우리도 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더 못한 나라나 문명을 멸시한다. 그 정도에서 멈춘다면 상관은 없지만,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답보는 곧 죄악이라 여긴다. 그 전에 비해 성장하지 못한 해는 문제가 있는 해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이를 강요할 때 생긴다. 야만인들을 문제시하고 쫓아내고 공격하며 제국의 경계를 넓히려 하듯, 신들과 초월적인 존재들 역시 사회와 시대에게 성장을 강요하며 그렇지 못한 지금을 재미 없고 정체된 시대라고 평한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이러한 평을 그리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나는 지금 <눈물>이 자신이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뭔가 중요한 문제를 일깨우는 반면교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담으로, 이것은 <눈물>이 판타지 소설이기에 장르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긴 하다. 낭만주의적인 소설 속에서 검과 검이 부딪히는 것을 권장하며 더 강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이 뭐가 문제겠는가. 나 역시 <눈물>을 재밌게 읽었기에 이에 동의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런 장르적 배경이 우리 안에서 내면화된 문제를 본의 아니게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역시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