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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감상문

“잃어버린 과거의 편린에서 우리는 사자가 되고자 했지만 지금은 그저 거세된 고양이일 뿐이다. 목 잘린 암고양이들과 혼인한 거세된 수고양이들. 희극으로 시작된 모든 것은 암호 작업으로 끝난다.” (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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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통해 인생 전체를 관조하는 것이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청춘은 미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취급되면서 변질되어 왔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이하 <탐정들>)에서는 이와 같이 젊음을 왜곡하는 틀에 박힌 통념 대신에, 날 것의 광기로 환원한다. <탐정들> 1부인 “멕시코에서 길을 잃은 멕시코인들”은 한 청년의 기록을 담고 있는데 이는 더 넓은 세계로의 이행을 암시하는 장이다. 청춘의 단편은 수많은 목격담과 인생들, 그리고 최후의 모험으로 이어지고 이 모험은 문학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 두 젊은이의 여정과 몰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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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하나의 거대한 시라고 생각한다. 볼라뇨는 ‘삶’에 대해 탐구한 소설가이기 이전에 생사를 가르는 경계지대를 노래한 시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자 더 나아가 삶의 표현 방식이다. <탐정들>을 읽다보면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시적 문장들은 마치 행 간의 운율을 느끼게 하고, 텍스트 내부의 미묘한 감정과 표현은 내면의 멜랑콜리함을 자극한다.  

3
야만스러운 “탐정들”, 그들은 무엇을 찾아나서는가? 표면적으로는 세사레아 티나헤로, 잊혀진 여류시인을 추적한다. 하지만 <탐정들>은 단순히 한 시인을 찾아나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그녀는 시인보다는 복합적인 것들을 상징한다. 리마와 벨라노에게 세사레아는 라틴 아메리카의 시를 넘어서는, 문학 그 자체다. 단지 개인, 한 자아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세사레아가 문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문학은 망각의 사유 대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망각,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모든 것은 변화한다. 과거의 찬란한 광채는 현재에서는 추하고, 역겨운 대상으로 다시 모습을 비춘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 할때 오직 좋은 순간만을 기억하려고 노력해서 과거가 빛나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현재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과거를 미화하는 것일까? 우리는 과거를 잊으면서 살아간다. 1부에서의 내장 사실주의자들은 2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내장 사실주의가 쇠퇴하고 흩어짐에 따라 개인의 문학적 열정은 사그라들고 만다. 1부에서 누구보다도 생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던 자들은 이제 죽음에 다다랐거나, 생보다 사의 경계에 더 가까워져 있다. 1,2,3부의 시간이 어긋나 있는 것은 청춘을 보여주고 모든 것이 변화된 현재에서, 다시 예전의 빛나는 추억 속으로 돌아가며 독자들이 예정된 파멸, 그리고 과거의 향수를 일시에 느끼게 하도록 볼라뇨가 파놓은 구조적 함정이다. 

4
<탐정들>에서 야만은 삶의 생동적인 표현이자, 성스러움과도 연결되는, 순수의 이면이다. 야만스러움은 순수함과 결부된다. 내장 사실주의자들은 이해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실천하는 동시에 사실 누구보다도 너무나 순수하게 문학에 미쳐있는 자들이다. 야만은 잔혹으로부터 피어오르는 비애다. 순수성 뒤에는 어쩔 수 없는 잔혹이 숨겨져 있다. 이것이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대학 화장실에서 시를 읽다가 틀랄텔롤코 학살을 맞이한, 아욱실리오 라쿠투레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장이다 (훗날 확장되어 『부적』 으로 출간된다). 그녀의 이 공포스러운 이야기는 잔혹과 마찬가지로 볼라뇨 작품에서 중요한 역사적 개념을 보여준다. 볼라뇨에게 역사란, 치유 불가능한 아픔이다. 멕시코 틀랄텔롤코 학살, 칠레 피노체트 군부 독재, 스페인 내전과 같이 비극적인 사건들은 그의 작품 내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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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식 죽음은 극적인 죽음과 장치적인 죽음으로 분류 가능하다. 극적인 죽음의 사례는 추한 모습과 별개로 숭고하면서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는 세사레아 티나헤로와 반대로 과거 영광의 시절과 대비되는 초라한 죽음을 맞는 내장 사실주의자들, 그중 몇몇은 단지 나열되는 방식으로서 소멸한다. 삶과 죽음은 상호의존적이다. 삶 안에 죽음이 공존하고 또 죽음 안에도 역시 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삶의 표현, 상징들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그 안에는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 이 세상 다른 누구보다도 생의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 죽음은 찾아오고 반대로 ,죽음으로 향하는 순간에 그는 생으로 가득 차 있게 된다. 2부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리마와 벨라노를 매개체로 하여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데 이 조각을 독자가 결합하면서 전체적인 이미지의 우울한 아름다움이 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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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문장은 “내장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다. 이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점은 첫째로 문학 사조로 보이는 ‘내장 사실주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누군지 모를 화자가 이 그룹으로 부터 가입 권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후 나타나지만 화자는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 17살의 법대생이다. 1부와 3부는 온전히 가르시아 마데로의 서술로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 내재적 화자의 시각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여기서 바로 모호성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는데 이는 우리가 인식하는 무언가가 불확실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화자가 내재적이라면 당연하게도 정보의 불균형이 생기고, 작가는 모든 것을 알지만 독자는 오직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또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기이하다. 기이함이 전제되어 있고 인물들이 그 구조 안에 끼워맞춰진다. 내장 사실주의자들은 누구보다도 일반적인 구조 밖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그들은 미로를 무한히 헤맬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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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유령적 글쓰기’다. 우선 리마와 벨라노 두 사람 모두 유령과도 같다고  작품 내에서 직/간접적으로 계속 언급된다. 갑자기 사라졌다가 신출귀몰하게 나타나는 것과 마치 살아있음에도 죽은 사람 처럼 행동한다는 것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티나헤로, 그리고 가르시아 마데로 역시 유령의 모습을 띄고 있다. 사실 모든 인물들은 우리 독자의 입장에선 유령인것 아닐까? 리마와 벨라노는 —문 뒤에 있는 것 같은— 비실체적 존재다. 그들의 인기척은 느껴짐에도 실체는 확인 불가능하다.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듯이 보이지만 그것 역시 볼라뇨적 유령, 무수한 관념과 경험으로 감춰진 이미지, 즉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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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982) 엔딩에서 던지는 질문은 쇠퇴하는 문학의 현 상황에서, 작품에 한정되지 않고 그 너머, 독자가 도전을 하게 만드는 볼라뇨의 가장 완벽한 마무리이다. 나 또한 나름대로 어떻게든 해석을 해보았지만 너무 진부한 답을 내놓은 것 같다. 그러나 답과는 관계 없이 작품의 질문들은 무한히 순환하며, 뇌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지금까지 읽었던 모험의 모습과 상념을 상기시킨다. 소노라의 사막을 파헤친 내장 사실주의자들처럼, 볼라뇨라는 사막을 모험하며, 이 무한한 여로의 끝을 보았을 때 당신 역시 깊은 여운에 빠지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