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성장은 목표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대체로 목표는 올바라야 하며, 올바른 것으로 이해 된다. 

그러니까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하고 조직하고 실행하고 노력하고 투쟁하고 분투하여

거기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졌음을 정량적으로 중명하는 것

> 이게 현대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권장하는 삶의 표준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표준적인 삶의 모델을 널리 퍼트리기 위한 조직화가 바로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거미줄이다. 


하지만 모든 규정이 계약서가 법률이 매뉴얼이 계획이 그렇듯이 그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 한다. 

데리다가 말했듯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다.

단지 규정을 디자인한 사람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리하여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어디로 가야하는지, 

혹은 우리가 넘지 않기로 한 경계가 어디인지를 사후적으로 확인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오래 고민하고 수용자/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그 노력이 규정에 반영되기 위한 정성을 쏟은

규정/계약/법률이라야 그나마 그런 반쪽짜리 기능이라도 수행할 수 있을테다. 


오히려 현실세계는 규정과 매뉴얼의 빈틈/행간에서 작동한다. 

유연성은 적응력은 생명력은 변화는 창조는 모두 거기에서 발현된다. 

>이에 대한 추천도서는 <국가처럼 보기>


그러니까 어떤 모양의 숲밍 올바른, 바람직한 상태인지, 즉 숲의 이데아가 무엇인지

인간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알 필요도 없다. 

> 이게 바로 어쩌면 이제라도 조금이나마 지혜로워진 포스트모던-생태주의의 관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당연히 거기서 무엇이 발현되어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며 살아남을 지는 

지금 거기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중인 우리로썬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적 느낌에 자꾸 빠지게 되는 건

아마도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자.

어쩌면 포스트모던-생태주의자는 내가 아직도 모더니즘적 시각과 관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난 그래서 무엇을 해야 돼?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난 뚜렷한 목표 없이 되는 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아~ 이게 아니었구나! 라는 후회를 안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이게 바로 푸코가 말하는 내재화된 판옵티콘의 작동례이겠지...



결론은 푸코는 여전히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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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읽다가 재미없어서 절반 쯤에서 유기하기로 결정한 책의 이름은


애나 로웬하웁트 칭이 쓴 <세계 끝의 버섯>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