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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는 예전부터 종종 언급되길래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웅진지식하우스 일본문학선집을 사서 읽게 되었다. 일본문학은 고등학생 때(벌써 6년 전..) 인상깊게 읽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몇 권을 읽은 게 전부다. 학창시절에는 판타지, 무협 장르 소설을 좋아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1년에 책을 한, 두 권도 안 읽을 정도로 독서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번에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독서가 주는 즐거움, 상쾌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읽기 좀 어렵다는 사람, 취향에 안 맞는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미시마의 문장 자체는 매우 깔끔하고 유려하다고 느꼈다. 특히 미조구치의 내면의 독백이나 정서를 묘사할 때는 소름 돋을 정도였다. 다만 건축이나 불교 관련 한자어가 나올 때는 좀 힘들었는데, 그것만 제외하면 읽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마 취향에 안 맞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미조구치에 대해 별로 공감을 못 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미조구치는 음침하고 사회성 없는 중2병 환자 같은 주인공이니, 평범한 독자들이 이입하기 힘들만 하다. 다만 나는 미조구치 같은 찌질한 학창시절을 보낸 입장에서, 그리고 지금도 찌질한 삶을 살고 있는 입장에서 미조구치의 생각과 행동들이 모두 나름대로 의미 있게 다가왔다.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 생각이 궁금해서 여기저기 검색해 보다가 여기에 올라와 있는 예전 글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글에 동의하는 부분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나도 책을 읽고 느꼈던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조악한 글을 써보려 한다.
주인공에 대해
이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는 말더듬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더듬이’라는 설정에 큰 동질감을 느꼈다. 나에게 말더듬 증세는 없으나, 나 또한 성장해오면서 늘 언어, 그리고 자기표현에 관련된 어려움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함으로써 자기의 내부와 외부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처럼 보일 때, 미조구치의 선천적인 말더듬 증세처럼 나의 성격도 본질적으로 그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미조구치가 인생에 대해 갖는 부러움, 질투의 감정과 흡사할 것이다.
말더듬 증세는 미조구치가 인생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선천적인 장애다. 그는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나의 유일한 긍지였다’고 말하지만, 이와 반대로 미조구치는 인생에 대한 욕망, 즉 남들에게 평범한 사람처럼 이해되길 바라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미조구치가 그러한 노력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선천적 말더듬 증세와 미에 대한 관념은 절대적이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교토가 공습받길 염원하며 자신과 금각이 함께 불에 타 사라지는 것을 꿈꾸는데, 이는 추하고 일시적인 자신이 영원하고 아름다운 금각과 동등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조구치에게 죽음은 인생에서 남에게 이해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추한 미조구치나, 아름다운 우이코나 적어도 죽은 그 순간만큼은 남들에게 그 의미가 똑같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죽은 상태에서는 말을 더듬을 수도, 살아 생전의 미ㆍ추도 모두 의미가 없다. 미조구치는 그런 죽음의 공평성에 끌렸을 것이다.
인생, 그리고 악에 대해
인생은 미조구치가 갈구하지만 닿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럼에도 “살아야지..”하고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의 결말처럼 작품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금각과 미의 관념이 미조구치 내부의 세계라면 인생은 미조구치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금각사는 이 둘 사이의 부조화에서 오는 비극으로 (나에겐 금각사가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했던 미조구치의 자기파괴적 비극으로 읽혔다)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인생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 미조구치(행위)는 가시와기(인식)과 대립을 보인다. 주인공은 작품 전반까지는 인식의 울타리 안에서 인생을 관조하지만, 여러 일들을 겪으며 행위로, 궁극적으로는 금각에 대한 방화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이 인생으로,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악은 중요한 매개가 된다는 것이다. 금각사를 설명한 다른 글에서도 인생 = 악이라는 도식으로 정리 한 것 같은데, 너무 지나친 비약 아닐까, 싶지만 어느 정도 수긍되는 부분도 있다. 다만 여기서 악은 선과 대립하는 가치의 영역보다는, 인생에 대한 은유라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어린아이가 처음 거짓말을 하고, 또래들 사이의 폭력을 맛보며 인생을 배워가듯이, 작부의 배를 짓밟는 행위로부터, 그 길이 순탄치는 않지만 미조구치는 조금씩 인생으로 나아간다.
금각(아름다움)에 대해
금각은 말더듬 증세와 함께 미조구치를 인생으로부터 격리하는 장애지만, 미조구치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했던) 것이기도 하다. 소설을 보면 미조구치는 부모님이나 친지와도 딱히 감정적 교류가 없는 것 같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무런 느낌도 없었고, 어머니는 오히려 경멸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금각은 쓰루카와와 함께 미조구치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몇 안되는 대상이다. 미조구치가 금각을 향해 다정한 독백을 내뱉는 장면은 마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런 면에서 금각은 부모님이 제공하지 못했던 유년기의 아름다운 질서이며,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아집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금각은 미조구치가 꿈꿨던 미의 상징, 즉 미조구치가 내면으로부터 가장 깊이 추구하는 것이나, 그것은 현실에서 달성하기 불가능한 것이다. 금각이 가진 미는 추한 외모를 가진 미조구치와는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인 미의 관념과 인생 사이의 괴리는 미조구치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금각사가 전형적인 성장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금각을 불태움으로써 미조구치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금각을 불태우는 것은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마침내 자기를 부정하고 꿈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현실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과연 꿈이 없는 현실을 잘 살 수 있을까? 혹은 금각이 없는 세계에서 미조구치는 또다른 ‘미적인 것’을 발견하며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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