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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이 이스탄불 명문가 출신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 순수 박물관은 재벌의 일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유난히 엘리트다운 이야기인거 같음
순수 박물관의 줄거리 자체는 상당히 동화적임. 재벌의 아들 케말은 유학을 마치고선 가족의 사업에 동참하여 번듯하게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우연히 만난 먼 사촌 여동생 퓌순에게 반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함
18살의 재수생 퓌순과 30살의 신임 사장 케말 사이의 첫사랑은 44일간 이어짐. 퓌순은 케말과의 강렬한 첫사랑 때문에 대입 시험을 망치고 말아 애인을 피해 은둔하기로 결심해, 케말은 퓌순을 찾아 전 이스탄불을 떠돎.
순수 박물관은 퓌순의 부재로 고뇌하는 케말이 사랑에 실패하자 퓌순의 마음을 소유하는 대신 흔적을 수집하며 영원히 추억을 쫓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음
파묵의 가장 본격적인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 박물관은 사랑이 인생과 행동에 미치는 상황을 현실적이고 고통스러운 집착으로 그려냈음.
솔직히 읽는 내내 케말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진 못했음. 케말은 사랑 때문에 회사의 계약, 사업, 상류 사회에서의 평판, 건강마저 포기할 정도로 퓌순을 사랑하면서도 애인 앞에서는 언제나 거짓말과 구애로 퓌순의 꿈들을 망쳐왔음.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것이, 케말이 퓌순을 사랑하는 방식이 능글맞은 거짓말로 일관하는 셈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관계가 꼬였다는 생각도 듦.
1년 만에 다시 퓌순을 만난 케말은 보기 좋게 결혼한 애인 곁에 머무르기 위해 관심도 없던 영화 사업으로 퓌순에게 배우의 꿈을 이루어 주겠다면서 8년간 사업을 질질 끌며 애인 곁에 앉아있는 기간만 무한히 늘려감.
1권 중반부터 퓌순을 사업을 핑계로 만나는 시절을 그렸는데, 이 때 그려진 케말의 집착이 부른 관찰과 아늑한 집안 묘사가 경이롭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함.
상황 묘사의 섬세함이 특출나 집착의 구체성을 제대로 확보했다는 생각이 듦. 퓌순과의 사랑을 단순히 묘사할 뿐 아니라, 당시 들려오던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 날씨, 냄새, 생각까지 어느 하나 잊지 않고 써놓았다는 점이 현장감과 리얼리티를 곱절로 더해줬음
퓌순과의 만남으로 케말의 독신 숙소는 퓌순과의 사랑을 기록한 하나의 박물관이 되어가고, 작품 말미에 이르면 케말은 자신과 퓌순의 사랑을 전시한 박물관을 개관하고자 함.
솔직히 읽는 내내 일상의 집착적인 묘사, 너무 많은 주변 인물들 때문에 살짝 루즈했던 파트가 많긴 한데도 결국엔 파묵이라서 재미없지만은 않게 읽음. 특히 마지막 파트의 퓌순과 케말의 갈등이 고조되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진진함.
근데 결말 파트에서는 살~짝 흐지부지하다는 감도 없지 않음. 정확히는 서술자와 화자의 괴리, 사건의 결말을 앞지르는 시점 붕괴를 드러내는 장면은 좀 마음에 안 들었음.
그래도 노년의 케말이 퓌순과의 사랑을 회고하면서 그래도 사랑 덕분에 행복했다는 말에는 나름의 무게감과 감동이 있었다고 생각함
여러모로 사랑이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품이었음. 실패한 사랑은 집착이 되고, 사람을 매사에 감정적으로 만들며, 일상의 재미를 몰수한다는 점도 제대로 알려준 작품은 처음인 듯?
어느 정도는 70년대 멜로드라마가 컨셉이라서, 재벌과 가난한 소녀와의 사랑, 사랑 때문에 많은 것들을 포기해버리는 재벌, 신분의 격차 등등 되게 고전적인 소재가 여럿 등장해서 설명만 듣기엔 진부해보일 수 있는데, 진부한 소재를 5성급 요리사인 파묵이 최선을 다해 만든 소설이라 막상 읽어보면 작가 내공에 감탄할 수가 있었음
다만 평양냉면처럼 슴슴한 작품이라 퓌순 집안의 일상 묘사 보다가 드르렁하기 좋아서 파묵 좀 읽어봤거나 좋아하는 독자들이 읽어야할 책이라고 봄
여러모로 파묵 사랑 이야기는 동화를 현대 배경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려냈다는 생각이 듦. 애초에 가난했던 애인을 기념하는 박물관을 짓는 부자 이야기라는 소재만으로 솔직히 작품 매력은 장난 아니긴 함. 생각해보니 타지마할 전설같기도 하고?
하지만 왜 결혼을 하지 않고 박물관을 지었는지 생각해보면 이 소설이 실연이나 상실 대한 소설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음.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로맨스가 해피 엔딩인 파묵 소설 치고는 의외인 편.
무엇보다도 순수 박물관은 서사보다도 현장감에 모든 것을 투자한 소설이라서 묘사가 소설의 반은 되다 보니까 좀 지루할 수도 있음. 어찌 보면 의식의 흐름을 그리려는 소설들처럼 관념적이고 사념 내지는 상황을 구현하려는 성격도 절대 없지 않음.
70년대 사람 냄새 나는 이스탄불과 사랑을 구현해놨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작품, 다 읽고 나면 소설의 현장감과 거짓말투성이였던 케말의 순수한 사랑을 볼 수 있어서 도파민보다는 경탄이 나오는 소설이었음.
뭔가 다 읽고 나니 이스탄불 한 구석의 명화 전시관 하루 종일 보고 돌아온 기분임. 클래식함에 있어서 이 정도 작품 보는건 거의 처음인 거 같어..
20대 후반 드니까 에스트로겐 나오는 나이가 됐는지 한동안 사랑 얘기만 읽었네; 다음에는 비판적인 베른하르트의 옛 거장들 읽으면서 비판 의식과 테스토스테론좀 채워야겠음
- dc official App
이거 터키에 실제로 있어서 들고 가면 할인해줌
아니 진짜 있을줄은 몰랐네 - dc App
개인적으론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밀리는 소설이라고 생각
둘다 실연 얘기인데 스토리텔링은 마르케스가 더 잼썼음. 클래식한건 순수박물관이 좋았고 - dc App
난 오히려 소설보다도 박물관이 진짜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소설이라고 생각함... 책에 티켓이 있음 거기에 도장찍고 들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