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목표
최고의 법정 변론가로서 또 명성있는 정치가로서 이력을 가진 그의 변론문은 정치, 사회, 경제, 법률 등 기원전 4세기 아테나이 사회를 거울같이 조명하는 데 손색이 없는 귀중한 고전이다.
기원전 4세기 도시국가체제가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과도기를 살았던 데모스테네스는 도시의 현안과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를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행적에 대한 지식에서 투키디데스의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도시에 대한 애정, 법률 지식, 정치적 감각, 역사 지식, 변론에 대한 열정, 이런 요소들이 데모스테네스의 자질을 구성했던 것들이다. 20세에 사적 소송의 변론가로서의 생애를 시작한 데모스테네스는 30세경을 전후하여 사적 소송을 지양하고 정치가로서 변신하게 된다.
당시 아테나이에는 법학교 같은 것이 없었고, 실제 법리에서도 기원전 2세기 이후 로마에서 발달되는 수준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나, 법학 지식의 거대 보고가 집적되고 있었다. 유산을 둘러싼 법적 투쟁을 통해 데모스테네스는 그 지식을 소화했다. 정연함과 정확성, 명쾌함 등 법리 투쟁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그는 일찍부터 터득했고, 변론술도 겸비했다.
데모스테네스는 변론가였을 뿐 아니라 기원전 4세기 중후반, 아테나이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정치가였다. 동시에 과거 아테나이의 영광과 민주정치체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의 패권이 확립되게 되면 헬라스의 정치적 자유는 사라지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마케도니니아에 대항하여 페르시아와 제휴하여 한 반면, 그의 경쟁자였던 이사이오스는 오히려 페르시아에 저항하여 마케도니아와 손을 잡고자 했다. 결국 데모스테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수도에서 사망한 직후 아테나이의 마케도이아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기원전 322년 아테나이 서북쪽 라미아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 후 칼라우리아(현재의 포로스)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승리한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의 손에 체포되는 일이 없도록, 팬 대에 감추어두었던 독을 먹고 자살했다.
18세 성년이 된 기원전 366년 데모스테네스를 사사(師事)한 아시이오스는 그의 유산 상속 재판에서 변론문 작성가로서, 또 재판 관련 지식과 변론술의 스승이 되었다. 데모스테네스는 거기에 더하여 옛 변론가들의 작품도 연구를 하여, 리시아스로부터 명쾌함, 간결함, 선명함을 배웠다. 그는 리시아스로부터 법정에 구체적인 사건을 제시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배웠고, 또 아사이오스로부터는 그 사건으로부터 증거를 추출 조합해내고, 또 그것을 법률규정에 맞추어 정합적으로 논리 체계를 세우는 방법을 배웠다.
도시에 대한 애정, 법률 지식, 정치적 감각, 역사 지식, 변론에 대한 열정, 이런 요소들이 데모스테네스의 자질을 구성했던 것들이다.
유산 문제를 둘러싼 법정투쟁을 통해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나이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소송당사자의 변론을 부탁했다. 당시 소송당사자는 스스로 재판정에 임석해야 하며, 특별히 재판정이 허락을 얻어서 변호인이 동참할 수 있었고, 그 변호인은 아테나이 시민권자이어야 했다. 변호인은 보수를 받고 소송당자가가 할 말이나 방법에 훈수를 두었는데, 이들은 ‘변론(혹은 산문) 작가 logographos’로 불렸다.
데모스테네스 이전에 작가로 이름이 난 사람으로는 안티폰, 리시아스, 이사이오스가 있다. 데모스테네스는 단시간에 작가로 명성을 얻어서 곧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 중 사적 소송(변론 27-59)의 비중이 크다. 데모스테네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작품 중에는 물론 실제로 그가 작성하지 않은 위작도 있다. 데모스테네스는 그 어머니가 스키티아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아테나이 시민권을 가졌으며, 변호인으로 법정에 출석할 수 있었다. 데모스테네스가 시민권 신분을 얻은 것은 시민권을 얻지 못했던 리시아스와 다른 점이다.
데모스테네스의 한글 번역본이 아직 없다는 것은 법률 뿐 아니라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인이 고전 그리스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치명적인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변론문은 집필자의 해석이 가미된 여느 역사책과 달리, 현장에서 이해충돌 당사자 간의 숨결을 가감 없이 전해주는 것으로서, 그 사회를 조명하는 데 귀중한 동시대 증거자료로서의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대효과
현재 우리나라 법학과의 법제사 교과서 및 현장 교육은 대개 로마법에서 시작하고 로마법의 원류가 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법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끄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법과 로마법은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지고 있으므로 비교사적인 차원에서 두 사회의 법제의 비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진 12표법은 자생적인 것이 아니었고, 제정 당시 그리스 인의 법을 두루 섭렵하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후 로마가 제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도시국가적 특징을 상실해가는 과정에서 법제, 정치, 사회 등 여러 측면에서 자유시민이 중심이 된 고대 그리스적와 괴리를 노정하게 된다.
지중해에 로마 제국이 출현하기 전 도시국가의 형태로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 사회의 진면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법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여기에 긴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저서중 하나가 바로 데모스테네스의 변론문들이다.
연구요약
부친 데모스테네스가 병이 들어 죽었을 때 아들 데모스테네스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부친이 그에게 물려준 유산이 14탈란톤에 달했으나, 후견인들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 대부분이 사라져버렸고 데모스테네스가 성인이 되어 받은 것은 그 1/10에 불과했다.
데모스테네스는 부친의 재산을 찾아야하겠다고 생각했고, 그 길로 변론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변론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성인이 되자 곧 유산상속 사건의 변론으로 이름이 있던 이사이오스를 찾았다. 그는 이사이오스를 자기 집에 개인 가정교사로 들이고 1만 드라크메의 보수를 지급하면서, 빼앗긴 유산을 되찾기 위해 법률과 변론술을 완벽하게 익혀나갔다.
데모스테네스 이전에 작가로 이름이 난 사람으로는 안티폰, 리시아스, 이사이오스가 있다. 그 중 아시이오스는 데모스테네스를 사사(師事)했고, 그의 유산 상속 재판에서 변론문 작성가로서, 또 재판 관련 지식과 변론술의 스승이 되었다.
부친 데모스테네스가 병이 들어 죽었을 때 아들 데모스테네스는 겨우 일곱 살이었고 그보다 더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부친 데모스테네스는 죽기 직전 미성년 아들 데모스테네스의 후견인으로 3명의 친지, 테리피데스, 아포보스, 데모폰토스를 지정했다. 그런데 부친이 물려준 유산이 14탈란톤에 달했으나, 후견인들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 대부분이 사라져버렸고 데모스테네스가 성인이 되어 받은 것은 그 1/10에 불과했다.
데모스테네스는 부친의 재산을 찾아야하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변론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변론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성인이 되자 곧 유산상속 사건의 변론으로 이름이 있던 이사이오스를 찾았다. 그는 이사이오스를 자기 집에 개인 가정교사로 들이고 1만 드라크메의 보수를 지급하면서, 빼앗긴 유산을 되찾기 위해 법률과 변론술을 완벽하게 익혀나갔다.
기원전 363년, 그 나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제1후견이었던 아포보스를 고소하면서 변론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하게 된다. 그 후 6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승소를 하게 된다. 그동안 <후견인 소송>으로 알려져 있는 5개의 변론을 발표하게 된다. 세 편은 아포보스를 상대로, 두 편은 오네토르를 상대로 한 것이다. 이 경험이 그의 잠재력을 구체화했고, 그의 과감한 성격은 법률적 논쟁 능력, 배심재판관 앞에서 변론하는 능력 등을 기르고 반전을 거듭하는 재판과정을 견디는 데 일조했다.
사적 소송 변론문은 주로 기원전 363-354년 사이에 쓰인 것이다. 그 후 당대의 정치적 변론술도 익혀나갔는데, 막 성년이 막 되면서 칼리스트라토스을 위한 변호를 맡았다. 당시 그가 공공 현안에 관련하여 쓴 변론으로 <미디아스에 반대하여>, <납세분담조합 symmoria에 대하여>, <메갈로폴리스 인을 위하여>, 그로부터 1년 후 데모스테네스는 <로도스 인의 자유를 위하여>를 발표한다. 그가 발표한 정치적 변론은 모두 아테나이 인의 무기력한 관성을 깨고 필리포스에게 대항하고자 함이었다. 그중에서도 3편의 <올린토스 변(辯)>, 4편의 <필리포스 변(辯)>, <스테파노스에 대하여>는 특히 우수한 변론으로 손꼽힌다.
기원전 4세기 도시국가체제가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과도기를 살았던 그는 도시의 현안과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를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행적에 대한 지식에서 투키디데스의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당시까지도 아테나이에 영향을 미치던 과거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물론 정치 논변가로서의 자질을 익히는 데 투키디데스의 작품이 도움을 주었다. 특히 투키디데스의 연설문에서 아티카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터득하고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개척해나갔다.
최고의 법정 변론가로서 또 명성있는 정치가로서 이력을 가진 그의 변론문은 정치, 사회, 경제, 법률 등 기원전 4세기 아테나이 사회를 거울같이 조명하는 데 손색이 없는 귀중한 고전이다.
데모스테네스의 변론문집은 변론문 총 61개, 서설(Exordia, 글 앞에 오는 소개) 56개, 서신 5개, 그 외 산발적으로 전해내려오는 단편(Fragment), 주석 등이 있다.
역자는 최자영, 저서로는 고대 아테네 정치제도사 등이 있음
학술명저 시리즈로, 위 글은 한국연구재단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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