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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

 

몽유(夢遊), 한자를 풀이하자면 꿈속에서 노닌다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꿈속’이다. 꿈속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현실의 공간과 대비된다.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어 허락되지 않아 금기시되고 억눌린 욕망은 꿈속에선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몽유란 단어는 그 자체로 환상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이뤄질 수 없는 욕망이 실현되는 세계라니.. 몽유에 의한 세계는 그래서 환상적이다. 현실에 억눌려 찌그러져있던 욕망이 잠결에 현실에서 펼쳐지는 세계, 금기된 욕망이 실현되는 세계. 즉, 몽유의 세계는 억눌린 욕망이 해방된 순수한 욕망의 세계이다.

 



 

욕망

 

몽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억눌린 욕망을 표출한다. 아내의 부정을 억눌러온 자는 상간남을 죽이기도 하고, 죽음을 억눌러온 자들은 자신의 무쓸모에 허탈해 하며 집단으로 죽으려 한다.

 

그러나 몽유하지 않는 사람들, 즉 제정신인 사람들 역시 몽유라는 무질서를 틈타 이성의 우리 속에 갇혀있던 욕망을 풀어버린다.


그들의 의식 있는 욕망은 무의식적 욕망과 뒤섞여 구분할 수 없이 세상을 헤집는다. 그런 세상엔 그 어떤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욕망뿐이다.

 

욕망뿐인 세계를 움직이는 수단은 폭력이다. 폭력의 난립은 폭력에 무뎌지게 하고, 한 번 정한 마음 속 한계가 자의든 타의든 깨진다면 그 끝을 알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끝을 보고 싶어진다. 그들은 끝을 향해 치닫는다.

 

더불어 욕망은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 넘기도 한다. 기존의 인간세계의 질서를 뒤바꾸는 더 큰 욕망은 하늘과 땅을 격동시킨다. 태평천하를 꿈꾸며 하늘의 뜻을 거머쥐어 새로운 천자를 원하는 자는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구슬리고 그들의 이해는 톱니바퀴처럼 맞아들어 돌아간다.


그에 반해 공산주의 속에서도 더욱 천대받고 가난한 시골마을 사람들은 또 다른 공산주의 개혁을 부르짖는다. 억눌린 과거를 희망찬 미래로 바꾸려는 움직임, 약탈과 폭력,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격상하려는 몸부림. 그건 곧 인간의 역사가 아니던가?

 

몽유의 세계는 억눌린 세계인가 아니면 순수한 현실의 세계인가? 잠에 취한 좀비처럼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세계를 더럽히고 오물속을 뒹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단지 허구로 치부할 수 있을까?


몽유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한 비유와 함께 욕망을 고찰함으로써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 세태임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소설의 구조. 이 구조가 이 소설의 압권이 아닐까 한다. 고작 펜의 흔적 쪼가리를 보고 인간이 이렇게 전율할 수 있는 일일까?

 

--------(여기부턴 스포)--------

 

 







 

해는 물리적으로 지구를 비추는 항성이지만 욕망의 어둠을 비출 이성과 질서의 빛이기도 하다. 욕망의 일탈을 멈출 수 있는 건 오직 아침이 밝는 것뿐이다. 수탉이 울고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뿐이다.


그러나 해는 뜨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이 멈춘다. 동시에 시간은 흐른다. 멈춘 채 흐른다. 한 번 찾아온 어둠은 절대 스스로 빛을 취하지 않는다. 해의 존재가 간절하지만 해는 스스로 오지 않는다. 어둠을 멈출 무언가가, 어둠을 물리칠 의지가 필요하다.




 

리톈바오

 

리톈바오(李天保). 리톈바오는 남에게는 밝힐 수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진 인물이다. 농경지 확산을 위한 화장이란 개혁의 앞잡이로 그는 몰래 매장한 이웃을 밀고해왔다.

 

그는 몽유 속에서 밀고했던 이웃들에게 사죄를 구한다. 사죄를 구하면서도 꿈에서 깨고 나선 그런 사실은 없었다고 잡아뗀다. 자신의 죄를 소상히 밝히고 싶은 한편 죄를 감추고 싶은 흔들리는 마음이 너무나 인간스럽다. ㅡ흔들리는 모든 인간에게 언젠가 마음 속 평안이 찾아오길.

 

그는 과거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강에 뛰어들어 쓸모가 없어져 죽으려는 노인들을 구하기도 하고, 과거의 죄에 따라 줘터지기도 한다. 후련했을까? 후련했을 것이다. 후련했을까? 후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속죄에도 그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그에겐 또 다른 비밀이 있다. 리톈바오의 가족만 알고 있는, 무시무시한,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천인공노할 또 다른 비밀을. 그건 사람기름의 존재를 숨기고 동굴 속에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기름 시세는 배로 널뛰어 그에게 부를 가져다 줄 참이었다.

 

리톈바오는 거대한 세력 간의 폭력을 더듬고 더듬으며 폭력을 온몸으로, 목숨으로 느끼며 숨죽인다. 폭력은 과거의 죄책감과 결합해 그를 결심케 한다.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에 주목해보자. 리톈바오(李天保). 이씨 성을 가진 하늘을 지키는 남자. ㅡ뛰어난 작품일수록 작품 속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허투루 짓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그는 기름 구덩이에 인간 기름을 모조리 붓곤, 불을 붙이기 위해 몸을 던진다. 불을 붙인 채 산화한다. 그는 타오른다. 그는 해가 된다. 그의 죄책감은 불타오른다. 자신의 죄로 빛을 불러일으킨다. 그 빛은 인간들의 욕망과 폭력을 멈춰 세웠다.

 

그는 죽기 전에 작품 속의 옌롄커에게 말한다. 내 죽음을 멋있게 써달라고. 그러나 그의 위대한 희생에 사람들은 점차 무관심해져갔고, 옌롄커 역시 그를 써내려가길 포기한다. 그의 죽음은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신문 한 줄 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었다. 쓸쓸하고 담담한 결말에서 나는 오히려 해와 같던 리톈바오의 빛을 본다.

 

그가 죽은 구덩이 속에서는 수많은 풀과 꽃이 피었고, 그 향에 이끌려 나비와 벌이 날아들었고, 리톈바오 덕에 서로 죽이고 죽는 욕망의 참사에서 새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인간의 삶이 그 구덩이에서 시작된다. 위대한 삶은 현실에서 보이는 줄기가 사라질지언정 그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위대한 삶은 그 삶을 바라보는 인간을 바꾸고, 그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보는 눈을 바꾸고, 또 다른 꽃의 싹을 틔운다. 그는 비록 잊혔을지라도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영원히 살 것이다. 그것이 삶을 아름다움이란 가치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킨 위대한 삶의 특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