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로도 잘 알려진 테드창 작가의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 를 최근에서야 읽었습니다.
사실 영화는 꽤나 이전에 이미 봤었지만 당시엔 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터라 원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그렇게 이 책을 처음 읽게 됐을때의 저의 소감은 이미 영화를 보고 난 뒤였음에도 기대 이상으로 감동과 울림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책이나 영화를 보신 분들도 많으신 관계로 기본적인 줄거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 채 저의 해석과 감상에 대해 한번 써보았습니다. 스포가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 점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정론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
사실 우리의 인생과 그 속에서 내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과 행동이 결정론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과학계에서도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다.
리벳 실험을 비롯한 인간의 '자유의지' 의 존재 여부에 대한 여러 실험을 통해 학계에선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작가는 이러한 논쟁을 벗어나 소설 속의 설정을 통해서 삶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때 작가가 선택한 설정이 매우 흥미롭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인 루이스는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서 점차 자신의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정해진 미래를 본다는 것은 그녀의 삶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마이너티리 리포트> 에선 전지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인해 미래의 범죄를 예측하고 이를 막아내는 방식이지만, 루이스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닌 이미 정해진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바꿀 순 없다.
언어가 사고의 한계를 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통해 루이스에게 미래를 보는 판타지스러운 능력을 부여한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다. 이처럼 작가는 주인공을 비롯한 소설 속 모든 존재들에겐 자유의지가 없고 그들의 삶도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이러한 설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효과적이고 거부감 없이 전달한다.
페르마의 원리
영화에선 생략했지만 원작 소설에선 '페르마의 원리' 가 중요하게 거론된다. 페르마의 원리란 빛이 서로 다른 두 매질을 통과할 때 (공기 중에서 물 속으로 나아갈 때) 경로가 꺾이게 되는데, 이때 빛은 언제나 최단시간이 걸리는 루트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다음 그림을 보자.
점 A 에서 쏘아진 빛은 실선을 따라 공기 중을 나아가다 수면의 경계선을 만나면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로를 틀어 점 B로 나아간다. 이때 빛이 지나간 경로는 점 A 와 B를 잇는 모든 경로중에서 가장 최단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때 빛의 경로가 일직선이 아니라 꺾이는 이유는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만약 첫번째 점선으로 표시된 것처럼 A에서 B로 그냥 일직선으로 나아간다면 공기 중에서의 거리는 짧아지지만 물 속에서의 거리가 길어지므로 결과적으론 실선의 경로보다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두번째 점선의 경우엔 물 속에서의 거리는 짧아지지만 공기 중에서의 거리가 훨씬 길어지므로 결과적으론 역시 실선의 경로보다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즉, 빛이 선택한 경로는 다른 어떠한 경로보다 시간이 적게 걸리는 최단시간의 루트라는 것이다.
이러한 페르마의 원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데, 첫번째는 인과론이고, 두번째는 목적론이다. 인과론은 말그대로 빛의 경로가 꺾이게 된 이유는 물이라는 경계선을 만났기 때문에 단지 이것이 가진 특정한 굴절율에 의해 꺾인 것 뿐이라는 해석이다.
반면 목적론은 빛은 언제나 최단시간이 걸리는 최소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경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 목적론에 대해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 빛이 사람처럼 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어떻게 늘 최단 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빛이 저러한 경로를 선택하려면 빛은 애초에 A에서 출발하기도 전에 자신의 목적지가 B인 것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을 거부하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물리학자인 리차드 파인만은 실은 빛은 자신의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진 파동의 성질을 통해 가능한 모든 경로를 직접 지나간 뒤 그 중 가장 최단 시간의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경로적분 이론'으로 설명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주제는 이러한 과학적 이론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러한 인과론과 목적론을 주인공 루이스와 외계인 헵타포드에 삶에 대입시켜 해석하는 것에 주목한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헵타포드는 마치 페르마의 빛처럼 이미 정해진 자신의 미래와 현재를 잇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끌려가듯이 살아간다. 때문에 소설에선 헵타포드가 지구를 찾아온 명확한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헵타포드는 그저 지구를 관찰하는 것처럼 이끌리듯이 온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주인공 루이스의 경우엔 어떨까?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서 점차 그들과 같이 미래를 보는 능력이 생긴다. 이때 루이스는 훗날 자신이 가지게 될 딸아이의 미래를 보게 된다. 영화에서와 달리 원작에선 루이스의 딸은 25살에 암벽등반을 하다가 사고로 죽게 된다. 그리고 이 미래에 대해 루이스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루이스는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딸이 암벽등반을 하다 죽게 될 사실을 알지만 이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녀가 한 선택은 페르마의 빛과 헵타포드처럼 그저 정해진 미래를 향해 이끌리듯이 내린 결정이라 봐야 할까? 궁극적으로 빛, 헵타포드와 루이스에게는 차이점이 있을까?
"빛이 한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보자. 굴절율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p. 212 ...>
"그거 참 괜찮네." 우리는 주방 도구 코너를 지나갔다. 나는 선반 한쪽 목재 샐러드 볼 앞에서 멈춰 섰다.
"세 살 때 너는 부엌 카운터에서 행주를 잡아당기다가 이 샐러드 볼을 머리에 뒤집어쓰게 될 거야. 나는 떨어지는 볼을 잡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해. 네 이마 위쪽이 볼 가장자리에 맞아서 결국 한 바늘을 꿰매야 하지. 네 아버지와 나는 시저드레싱이 끼얹어진 채 흐느끼는 너를 안고 응급실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해."
"나는 손을 뻗어 선반에서 샐러드 볼을 집어들어. 이 움직임에 특별히 강요받은 듯한 느낌은 없지. 오히려 네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볼을 잡으려고 달려갈 때 같은 절박한 느낌에 가까워. 본능적으로 주저 없이 따라야 하는 느낌." <p.211...>
아이란 예측할 수 없는 존재
루이스의 사랑스러운 딸 아이는 늘 엄마의 예측과 통제를 벗어나곤 한다. 태어나 엄마 품에서만 지내다 걷기 시작하고, 학교에 가고 친구를 사귀고, 꿈을 가지게 되고, 성인이 되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여러 취미 생활을 하는 등, 마치 물질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처럼 아이는 어렸을 때나 나이를 먹어서나 늘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하기 힘든 존재이다.
부분적으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루이스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이러한 딸 아이는 말 그대로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정해진 미래(25살에 사고로 죽게 되는)를 향해 붙잡을 수 없이 나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루이스는 언제나 자신의 아이를 통제하고 싶어하지만 그런 루이스의 행동 때문에 딸아이는 오히려 반항감을 가지고 등반과 같은 취미를 가지게 된다. 후에 이 등반이라는 위험한 취미로 인해 딸은 25살의 나이에 사고로 죽게 된다.
"너는 쉬지 않고 어딘가로 달려나가겠지. 네가 문지방에 부딪치거나 무릎이 까질 때마다 나는 너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게 돼. 마치 말을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하는 팔이나 다리가 하나 더 생긴 듯한 느낌이지. 내 몸의 연장이니까 지각 신경이 느끼는 아픔은 고스란히 나한테 전달되지만, 운동신경은 전혀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꼴이야. 정말 불공평해." <p.193...>
"하지만 난 안 졸려."
넌 징징거리지. 책장 앞에 서서 비디오를 볼 작정으로 테이프를 하나 꺼내려 하고 있어. 침실에 가지 않으려고 가장 최근에 네가 고안해낸 양동전술이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넌 어차피 자야 해"
"하지만 왜?"
"난 네 엄마이고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p. 208...>
"너의 반항적인 성격을 감안할 때, 네가 등반을 좋아하게 된 것은 너를 보호하려는 나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나는 거의 확실할 수 있어. 처음에는 놀이터의 정글짐이었고, 그 다음은 우리 집 근처 그린벨트의 나무 위, 등반 클럽의 인공 암벽, 그리고 마지막은 국립공원의 절벽이었지." <p. 214...>
논제로섬 게임
원작과 영화에서 모두 인상적인 연출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논제로섬 게임'과 관련된 대화이다. 루이스는 딸 아이가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를 쓰는 과정에서 '양쪽 진영 모두가 이길 수 있을 때 쓰는 말' 이 뭐냐는 질문에 자기도 그 단어를 까먹었다며 아빠에게 전화로 물어보라고 말하는 미래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다 다시 외계인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던 현재로 돌아와 회의하던 중에 논제로섬 게임 이란 단어를 듣게 된다.
그리곤 기억은 다시 미래로 돌아가 딸 아이에게 양쪽 모두 이길 수 있는 게임, 논제로섬 게임. 이라고 알려주게 된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건 루이스의 기억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건이 미래의 기억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미래의 기억이 현재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통상적인 경우에 있어서 순차적인 시간을 사는 우리 인간의 삶에선 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사건들로 인해 현재가 존재하고, 현재의 사건으로 인해 미래가 존재한다. 그것이 인과론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페르마의 빛처럼 이미 자신의 정해진 미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루이스의 경우엔 다르다. 이 소설에서 루이스가 부분적으로 떠올리는 '미래의 기억' 은 현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자 인과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루이스도 결국 빛과 헵타포드처럼 정해진 미래에 따라 순응하듯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진정한 자유의지의 의미
이렇듯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헵타포드와 루이스는 정해진 미래를 거스르지 못하고 따라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에겐 차이점이 있다.
시간을 순차적으로 인식하지 못해 사건의 순서와 인과성을 따질 수 없는 헵타포드와 달리, 인간인 루이스는 사건의 인과성을 따지고 세상을 인과론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빛이 A에서 출발해 B에 도착하는 동일한 결과를 가졌어도 이 현상을 설명하는 상반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듯이, 이미 정해진 미래를 알고 살아가는 헵타포드와 루이스지만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를 수 있었다.
자유의지와 관련된 유명한 리벳 실험의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하려고 마음먹기 전에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순전히 나의 의지라 생각하고 선택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뒤늦게 지각한다는 것이다.
즉, 자유의지의 의미는 미래를 바꿀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아니라 뒤늦은 지각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의지는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나라는 존재를 자각하고 느낄 수 있는 의식이 존재해야 비로서 의지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의 의미란 무엇일까? 사실 내가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유한한 삶을 살아감으로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인식할 수 있는 순간은 오로지 지금 뿐이며 우리는 이러한 지금 이 순간의 연속성으로 살아가는 동안 의식을 느끼고 의지를 행사한다.
결국 우리 삶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진정한 의미는 뒤늦은 지각임과 동시에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관측인 것이다.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 지금 내가 내린 어떠한 선택을 의식을 통해 뒤늦게 지각하고 관측하는것, 그런 순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삶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으며 나아가는 것, 우리 인간에게 있어 자유의지란 세상을 최소화라는 목적론이 아닌 인과론적으로 바라볼때 비로서 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빛은 A에서 출발했고 나 역시 출발했다. 빛은 A에서 B를 잇는 수많은 경로 중 최단시간의 경로를 선택하여 나아갔지만, 나는 그저 수면의 경계에 맞닥뜨려 굴절되었을 뿐이다. 내가 A에서 수면을 향해 나아간 것에는 분명 원인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 수면이 존재하는 것 또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둘 다 B에 도착했지만 내가 도착한 방식과 너가 도착한 방식을 다르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내리는 선택에 의한 결과를 지각하는 것에 있고 그것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과론적으로 해석하는데 있다.
"엄마가 대신 물어봐주면 안될까? 내가 물어봤다고는 하지 말고."
"네가 직접 걸어." 너는 화를내.
"세상에, 엄마 아빠 헤어진 다음부터는 숙제하는 데도 전혀 도움이 안돼."
네가 얼마나 많은 상황을 우리 이혼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야. <P. 202...>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 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테드창 <'우리가 해야 할 일' P.95 중에서...>-
"설령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게 우리가 삶을 방관할 이유가 되진 못해. 우린 늘 최선을 다해야해." -영화 <테넷> 중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
결국 루이스는 자신의 아이가 25살에 사고로 죽게 되고 자신은 남편과 이혼하게 될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하게 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때 루이스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그저 미래에 따라 순응하듯 이끌려 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될 미래의 기억이 현재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작용하면서 인과론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해서, 그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결말에 이르러서 작가가 우리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인생의 목적은 최소화 또는 최대화가 아닌 살아가는 그 자체, 지금 이 순간에 있다는 것은 아닐까? 결국 미래에 늙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복하기 위해 저마다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자신의 딸이 사고로 죽게 될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낳는 선택을 한 주인공처럼, 동화책의 결말이 어떠한지 알면서도 엄마에게 읽어달라 떼쓰는 루이스의 아이처럼.
"금발머리는 엄마 곰의 죽을 먹어보았지만, 그 죽에도 역시 싫어하는 시금치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너는 책장을 손으로 누르고 나를 제지하지. "원래대로 읽어줘, 엄마!"
"난 여기 나와 있는 대로 읽고 있는데?"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지.
"아냐. 엄마가 한 얘기는 진짜 얘기하고 달라."
"벌써 무슨 얘긴지 알고 있는데 왜 나더러 읽어달라는 거야?"
"얘기를 듣고 싶으니까!" <p.220...>
"네 인생의 이 단계에서 네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 내가 너에게 젖을 먹이기 전까지 네 안에는 과거의 만족감에 관한 기억도, 미래의 충족에 대한 기대감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다 젖을 빨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역전되겠지. 너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않게 돼. 네가 지각하는 유일한 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야." <p.217...>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이런 의문들이 내 머리에 떠오를 때, 네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물어.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러면 나는 미소를 짓고 "응" 이라고 대답하지. 나는 내 허리를 두른 그의 팔을 떼어내고,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너를 가지기 위해.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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