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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들리스 에이트의 경악

하루히@인류원리를 생각하다


초인기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2기에서 격정과 슬픔이 뒤섞인 격론을 불러일으킨 '엔드리스 에이트'. 


12화부터 19화까지 이어지는 이 전대미문의 실험적 시도에 분석철학의 논리력이 도전한다.


애니메이션과 원작을 면밀히 시청하고 읽은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 원리, 복잡계 등 과학의 첨단 이론과 뒤샹, 존 케이지 등 개념미술의 이념을 확장하면서 대담하게 해석하고 그 비밀에 접근한다.



미우라 도시히코

도쿄대 문학부 교수. 전공은 미학, 분석철학. 한국어 번역 저작 <허구세계의 존재론>, <가능세계의 철학>, <논리의 힘>




서문 : 평범한 예술론엔 관심 없습니다 


본서는, <엔들리스 에이트>에 대해 예술적 해석과 철학적 분석을 행한 논고입니다. 


<엔들리스 에이트>란? 라이트노벨의 금자탑이라고 불리는 SF 학원 러브코미디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단편입니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란 제목으로 애니화되었습니다만, 그 중 <엔들리스 에이트> 부분이 본서의 주요한 고찰 대상입니다.


엔들리스 에이트가 어떤 애니였는지는, 애니 제작 스태프 10인을 인터뷰한 <스즈미야 하루히에 휘둘린 우리들의 여름방학>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월간 뉴타입>) 2009년 9월호, 18~19・22~12p). 그 중에서도 원작자 타니가와 나가루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쉽겠죠.


멀리뛰기에서 도움닫기만 42.195km정도 달려버린 듯한 엔들리스 에이트입니다만, 이걸로 겨우 건널목 부근에 도착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앞으로의 장편 에피소드를 향한 도움닫기가 이걸로 끝나고, 드디어 여기서부터 점프할 애니메이션 하루히는 얼마나 많은 체공시간을 거쳐 도대체 어디로 착지할까요 (후략) (타니가와, 19p)


뭔가 대단한 본말전도가 벌어졌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겠죠.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라는, 지극히 엘레강트하게 조직화된 콘텐츠의 한복판에서, 기묘한 뒤틀림을 고의적으로 행한 실험이 바로 엔들리스 에이트였던 겁니다.


다시 말하면, '애니는 이래야만 한다' '오락은 이래야만 한다' 같은 암묵적인 기준이나 규범같은 것을 난폭하고 면밀하게 뒤엎어버린 전대미문의 기획이 엔들리스 에이트였습니다. 


평범한 애니 팬에겐 의문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았던 실험적 시도는, 넓은 문화적 관점에선 다소 다르게 비칩니다. 경직되기 쉬운 사회규범을 무너뜨리는 포스트모던한 문화인 또는 비평가들이 오열하며 기뻐할만한 작품이 엔들리스 에이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엔들리스 에이트를 기뻐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기대하며 지켜보던 제게도, 이렇다할 <엔들리스 에이트론>은 표면화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내가 건드리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 건가?' 하는 사명감에 이끌려 본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서브컬쳐 연구나 문화 스터디의 작법에 서투른 저이기에, 제가 잘하는 방법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분석철학입니다.


여러 철학의 양식 중에서 분석철학은 '개별 사례 연구'에 가장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철학의 원리를 하나의 애니 작품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지, 이 자체가 하나의 실험입니다. '애니 연구는 이래야만 한다' '철학적 분석은 이래야만 한다'. 이 두 가지 암묵적 규범을 (아마도) 일탈하고 있는 본서의 방식은, 그야말로 오락 애니의 작법을 멋드러지게 일탈한 <엔들리스 에이트>를 다루기에 가장 적합하겠지요. 


또 하나 저를 부추긴 것은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입니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제 1권에서 일찍이 등장 인물이 인류원리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침 '인류원리적 예술학'을 구상하던 제 문제의식과 딱 맞는 부분이었습니다. '인간원리에 의한 엔들리스 에이트의 분석적 예술학'은 그야말로 저만이 할 수 있는 연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의 대중문화에선 과학 용어가 자주 나오곤 합니다. 생명과학이나 인지과학, 나비효과(카오스 이론), 그리고 특히 양자론, 그 중에서도 애니 <너의 이름은.>이나 게임 <인피니티 시리즈>에선 다세계 해석이 인기네요. 대개의 경우, SF적 분위기를 내기 위해 쓰여질 뿐입니다만,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에서는 인류원리(다세계 해석도 그 일부에 포함됩니다)가 이야기, 기법, 캐릭터, 미디어의 각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특수한 철학적 접근을 유발하는 작품입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본서를, <엔들리스 에이트>가 지니는 2개의 속성에 따라 연출했습니다. 


하나는, '원작 11권 구성의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 로서의 외적 속성.  


또 하나는, '타임 루프 이야기'로서의 내적 속성.


이 두 가지 요소를 본서의 구성에 포함시켜 보았습니다.


즉 본서의 흐름은 이렇게 됩니다. 제 1장~제 11장까지 각자의 장의 제목에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권두의 제목을 간행 순서대로 차용합니다.


'1. 우울' '2. 한숨' '3. 무료' '4. 소실' '5. 폭주' '6. 동요' '7. 음모' '8. 분개' '9. 분열' '10. 경악(전)' '11. 경악(후)'


그리고, 루프로 만들기 위해 최신권 '경악'이 2부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활용했습니다. '경악(전)'을 1장 제목으로 하여, 하나씩 엇갈리게 한 겁니다. 완전히 루프하려면 권말의 '경악(후)'를 권두로 가져와야 하지만, '후'가 '전'보다 먼저 나오는 것도 좀 그래서, '경악(전)'을 제 1장으로 하고, 제 11장 '경악(후)'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루프의 일부가 전후 역전되어 되돌아가는 형태. 완전한 원형이 아닌, ∞의 한 쪽 구멍이 축소화된, 기점과 종점의 결절점이 '특이점'으로서 도드라진 그러한 <엔들리스 에이트>의 스토리대로 변칙 루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략적으로나마 원작과 유사한 논술이 되어버린 것은 어떤 의미에서 놀랍지만, 이것은 연구 대상인 <엔들리스 에이트> 그리고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에 본래 담긴 철학적, 과학적 속성이 내재하고 있던 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자, 실생활에서 루프라고 한다면 타성적인 모라토리엄이 연상되고, 창작에서의 타입 루프는 지금은 낡아버린 정형화된 테마입니다. 즉 루프는 '몰입' '무자각'의 형상화입니다. 반면에, 사안이나 논술에 있어서 루프란, 출발점인 '자기'로 고찰이 되돌아오는 것이기에, '자의식' '자기분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양의적인 루프를 철저하게 논할 필연적 귀결로서 본서는 '의식 높은 계'의 구상화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리현상으로서의 '의식 높은 계' 그 자체가 인간 원리의, 그리고 본서의 진정한 연구 대상이었다는 것이 마지막 두 장에서 판명날 것입니다.


<엔들리스 에이트> 가 얼마나 애니메이션 팬들을 경악시키고, '의식'을 고양하려 ('기분'을 저하시키는 대가로) 했는지를, 제 1장과 제 2장에서 실증적으로 되돌아보는 것부타 시작하겠습니다. 그 후 서서히 작품의 하드한 철학적 함의로 들어가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