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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의 사나이」 - 「산딸기」 - 「사랑에 관하여」로 이어지는 세 개의 단편소설은 체호프의 수많은 단편소설들 중에서도 유일한 연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호프답게 각 단편이 따로 다뤄도 무방할 정도의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지만, 모처럼 연작으로 쓴 작품들이니만큼 한꺼번에 둘러보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일 것이라고 본다.
「상자 속의 사나이」는 우리를 억압하는 규율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벨리코프는 억압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스스로도 엄격하게 고전적인 규율을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규율을 강요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피곤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규율에 얽매이는 성향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즐거움들을 도통 느끼지 못한다. 사랑의 기회가 다가와도 규율을 먼저 생각하다가 사랑에도 실패하고, 인격적인 존엄성까지 상실하고 만다. 벨리코프의 파멸을 본 사람들은 벨리코프를 우스꽝스럽게 생각하고, 동시에 벨리코프의 감시로부터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나 벨리코프가 사라진 것이 무색하게 사람들의 일상은 언제나와 같이 흘러간다. 벨리코프처럼 의인화된 규율은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사람들은 늘 똑같은 형식의 일상을 산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 허드렛일, 사무에서의 형식…… 사람들은 벨리코프가 있건 없건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가 벨리코프처럼 상자 속에 갇혀서 안락함이라는 핑계로 규율을 소화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도시에서 갑갑하고 비좁게 살면서 쓸데없는 서류들을 쓰고, 빈트 놀이를 하는 것, 그건 상자가 아닐까요? 우리가 평생을 한량, 소송꾼, 어리석고 하는 일 없는 여자들 사이에서 살면서 이런저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것, 그건 상자가 아닐까요?"
이어지는 「산딸기」는 상자 속에 사람들을 모아 왕국을 만든 사내의 사연이다. 니콜라이는 영지에서 재배한 산딸기를 먹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다. 다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곧 찬탄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니콜라이는 영지를 갖기 위해 정말 기계처럼 살았다. 돈을 모으기 위해 구두쇠처럼 굴고, 영지를 얻고 나서는 사람들을 착취한다. 이전의 소박한 모습은 완전히 잃어버렸고, 개인적인 집착 때문에 많은 평민들을 괴롭히는 파렴치한 지주가 된 것이다. 황당하게도 니콜라이는 자신의 이런 변화를 전혀 모른다. 오히려 영지를 얻어 꿈을 이뤘다는 성취감에 자신을 만인의 귀감으로, 또 인격적으로 훌륭한 지주로 여기고 있다. "형편이 나아지고 배가 부르고 한가해지면 러시아 사람의 자기평가는 지독히도 뻔뻔해지는 법이죠." 그는 소원대로 영지에서 난 산딸기를 먹는다. 산딸기는 사실 딱딱하고 시었다. 하지만 성취감이 니콜라이의 미각을 속여, 니콜라이에게는 산딸기가 성공만큼 달콤하게 느껴진다. "푸시킨이 말한 대로 '진리의 어둠보다는 우리를 고양시키는 기만이 더 소중'한 법이죠. 저는 그때 오래된 꿈을 너무도 명백하게 이룬 행복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삶의 목표를 이루고 원하는 것을 얻어 자기 자신과 운명에 만족한 인간을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제 생각은 왜 그런지 늘 무언가 슬픈 것과 뒤섞여 있었는데, 그 행복한 인간을 보면서 절망에 가까운 힘겨운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니콜라이는 성공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니콜라이의 성공은 그래봤자 땅덩어리에 불과하다. 다만 니콜라이는 그 상자 같은 영지에서 원하는 것을 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쾌감이 그의 감각을 상하게 한다. 상자 속에서 왕국을 세운 자는 감각마저 상자에 갇혀 비좁아지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그 행복의 기한이 만료되어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이 무대 뒤에서 나타나 그를 덮치면, 니콜라이는 그 누구보다도 힘없이 쓰러져 벨리코프의 옆에 묻힐 것이다.
마지막 순서인 「사랑에 관하여」는 제목만 보면 달달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앞의 연작들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심오한 작품이다. 발단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엇비슷하다. 지루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잘 버티고 있지만 새로운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그 여자에게 끌려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제시된다. 하지만 남자는 자제력이 강해서, 자신의 사랑이 가족에게 미칠 불행을 생각해 내고, 또 자신에게 여자가 안긴다고 해도 영원한 행복을 보증할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둘은 뜨뜻미지근한 관계로 남는다. 그러다가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 다가올 때에야 둘은 자제력을 잃는다.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이별해야 했고, 운명의 뒤틀림을 탓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삼부작을 잇는 주제가 무엇일까? 사랑, 규율, 인생 전체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무상함, 그리고 이를 더 무상하게 만드는 인간의 소심함이 삼부작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언젠가는 끝나게 돼있다. 죽고 나서도 이름을 남기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죽음 앞에서는 거의 모든 삶이 평등하게 허무해진다. 하지만 그 죽음이 오기 전까지의 순간만이라도 의지를 발해 세계를 자유로이 누비면 좋으련만, 인간 스스로가 이를 막고 있다. 인간은 세상을 알차게 살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규율을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 갇히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면 마치 껍질을 잃은 달팽이처럼 되고 만다. 실은 민달팽이처럼 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작중 인물들은 규율에 안주하다가 삶을 잃어버리고, 또는 작은 행복에 속아 객관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고, 시선이 두려워 참지도 못할 사랑을 억지로 외면했다. 물론 규율을 전복시키는 것은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른다. 규율이 이유 없이 생긴 것은 아니며, 그 합리성과 공리주의적인 본성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규율이 공공의 삶을 돕는 것을 넘어 삶의 목적이 되면, 자유의 범위는 다름 아닌 인간 스스로에 의해 작아지고 만다. 그러므로 어차피 언젠가 다가올 허무의 순간을 맞이할 때 후회를 덜 하려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사는 자세도 필요하다.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영원히 상자 속에 들어가 땅에 묻혀야 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모험이 필요하다. 규율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자유를 체험하는 모험, 만족스러운 현재를 넘어서 더 큰 행복을 찾는 모험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인생을 어디로 이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더 멀리 나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체호프는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추적해왔고, 「사랑에 관하여」 3부작은 그 결과물 중에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항상 권태를 다루던 작가이니만큼, 이 작품들 속에 권태를 극복하기 위한 비장의 수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체호프의 제안대로, 우리는 틀 안에서 쉬다가 기운을 차리면 틀 밖으로 모험을 떠나 인생을 점점 넓혀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영원히 남을 인생은 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돌아봤을 때 퍽 괜찮은 인생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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