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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읽는 것은 처음이다. 아니, 읽었다는 표현보다는 느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작품들은 여러 번 읽었다. 그런데 독자인 내가 작중 인물들의 의식에 완벽히 동화됐다고 느끼는 작품은 이 「댈러웨이 부인」이 처음이었다. 분명 난해하다. 시점도 자주 바뀌고, 과거와 현재가 계속 교차되며,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 혹은 어떤 생각이 배양된다. 그리고 그 느낌을 이어가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다 보면, 난해한 작품인데도 금방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정말이지 내 독서 생활 중에서도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문장 하나하나도 정말 미문이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 어법적으로 불완전한 문장이 많았음에도 압도감을 느꼈다. 플로베르 이후로 처음 겪는 느낌이다.
특히 장면들이 전환되는 방식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다른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다른 사건을 일으키거나 끌어내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내면에서 같은 장소에 있는 다른 이의 내면으로 넘어갈 뿐이다. 한 사람이 풍경을 보고, 거기서 무언가를 지각한다. 그 지각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다른 사람이 본다. 이에 따라 새로운 생각이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온다. 이 오묘한 연쇄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외부를 감각하고, 그 이미지 안에서 자신의 생각이 거울처럼 반사되어 돌아온다는 점이 재밌었다. 사실 우리 일상 속에 극적인 사건이 매번 있지는 않다. 우리는 일상을 살며 나름대로의 감상을 내놓을 뿐이다.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일상을 주제로 심리에 기반한 리얼리즘을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괜히 사람들이 그렇게 버지니아 울프를 높이 평가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왜 버지니아 울프를 이제야 읽었을까!
소설 자체는 300쪽도 안 되지만 정말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묘하게도 작중의 시점이 계속 바뀌면서 나 또한 다른 인물들의 시점으로 계속 갈아탄 탓에, 끝까지 따라오지 못하고 증발해버린 생각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번 감상문은 어떻게 써도 부족할 것 같다. 그래도 부족하게나마 내 생각을 여기에 옮겨두고자 한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가장 많이 느낀 주제는 '삶의 의미'다. 사실 작품의 모든 인물들은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정말 애매하다. 겉으로는 가질 것을 다 가진 사람조차도 마음속에는 못 이룬 사랑, 못 이룬 꿈에 대한 회한이 남아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남에게는 행복해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쓴다. 이들은 일상에서 감동을 느끼기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늘 서있던 자리에 계속 머무르는 것일 뿐이다. "뻣뻣하게, 습관의 형해(形骸)만이 인간의 형체를 버티고 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 이렇게 각자가 각자의 고충을 갖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함부로 열지 않고 가식을 부리는 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본성이다. 이렇게 어떤 유의미한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마음을 열다 만 채 공허한 이야기만 오가는 이 세상은 무의미해 보인다.
인간의 밑바닥을 본 셉티머스와, 그 셉티머스 때문에 고생하는 레치아에게서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 셉티머스는 인간을 신뢰하지 못한다. 나라에서 준 구실로 동물보다 잔악하게 살육전을 벌이는 광경을 직접 겪고, 친구와도 사별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히 그는 부적응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 겪은 참상이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괴롭힌다. "인간 본성이 그를 덮치고 있었다." 레치아는 그런 셉티머스를 사랑한다. 셉티머스와 살기 위해 고향도 버리고 따라왔지만, 셉티머스의 병력 때문에 각오한 것 이상의 고생을 하며 후회하기도 한다. 셉티머스는 당대의 기술로 고칠 수 있는 환자가 아니고, 셉티머스 자신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당에 레치아와 셉티머스의 마음이 서로 통할 리가 없다. 이 연인의 사연이 정말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삶을 꾸역꾸역 이어간다. 삶이 행복해서가 아니라, 그런 삶이라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계는 무의미하고, 그 위에서 사람들이 치는 발버둥도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허무한 극단, 즉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제 발로 세상을 누벼야 한다. 삶 속에서 임시적으로나마 의미를 발견하며 생명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겠지. 우리는 늙어 갈 거야. 중요한 단 한 가지, 그녀의 삶에서는 그 한 가지가 쓸데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려지고 흐려져서,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 갔다. 바로 그것을 그는 지킨 것이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그 중심이 왠지 자신들을 비켜가므로 점점 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느낀다. 가까웠던 것이 멀어지고, 황홀감은 시들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은 팔을 벌려 우리를 껴안는다." 우리 스스로가 완전히 고립되지 않으면, 죽음을 수용할 이유도 없다. 사람들의 진심이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아무튼 그 불완전한 연결고리로나마 이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이유를 얻는 것이다.
클라리사의 파티는 인연을 재확인하는 장이자, 삶을 재확인하는 장이다. 클라리사의 파티는 많은 인물들에게 사치, 혹은 가식의 향연 정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클라리사는 여러 곳에서 모인 여러 사람들로부터 추억을 읽기도 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깨닫기도 한다. "그녀는 항상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며, 그렇게 다들 흩어져 있다니 얼마나 낭비인가,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모두 함께 모일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파티를 여는 것이다. 파티는 하나의 봉헌이었다. 조합하고 창조하는 것. 하지만 누구를 위해? 봉헌을 위한 봉헌이지, 아마도. 하여간 그것이 그녀의 재능이었다." 아귀가 들어맞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소중한 것을 발견한다. 레치아만 해도 그런 셉티머스를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끝내 셉티머스를 떠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는다. 셉티머스 또한 그런 레치아와 함께 하는 삶을 여전히 사랑한다. 셉티머스는 다른 선택을 하기는 하지만, 그는 인간에게 쫓겼을 뿐 자신의 삶을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삶으로부터 의미를 요구하고 완전무결한 해답을 찾아봤자, 세상은 그런 것들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세상 자체가 불완전한 전제들로 이루어진 불합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얽매는 사상을 내려놓고, 불완전함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으면, 세상은 의미 같은 것이 없어도 살아갈 가치는 충분한 공간이다. "누구에게나 기억은 있는 법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여기 이것, 그녀 앞에 있는 것이었다." 과거가 불완전하고 의미가 불충분해도, 아무튼 우리는 살아서 인연들을 유지하고 있고, 그것들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이것이 「댈러웨이 부인」으로부터 배운 교훈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따스한 결론이 무색하게 버지니아 울프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클라리사를 꿈꿨지만 셉티머스가 되고 만 것 같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여러 목표들을 가졌던 덕에 모진 삶을 이어나가고, 덕분에 내가 지금 이런 명작을 읽은 것일 테다. 나도 살면서 공허함을 자주 느끼고는 한다. 다만 그럴 때마다 희미하게나마 이어져 있는 관계들로부터 위안을 많이 얻는다. 나도 그들이 나를 이끌어준다면 살아갈 이유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삶의 황혼에 접어들었을 때, 나도 클라리사처럼 파티를 열어 지금까지 걸어온 나의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한편 버지니아 울프 개인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온다면 「등대로」를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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