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적인 경우엔 삶에 기울이던 관심이 그 이해관계에서 초탈하게 되며, 그 즉시 마술처럼 과거는 다시 한번 현재가 되기도 한다. 예기치 않게 목전에서 갑작스런 죽음의 위협을 보는 사람,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등산가, 물에 허우적거리는 사람,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는 관심의 날카로운 전향이 일어난다고 생각된다. 의식의 방향에 변화가 일어 그때까지는 미래에 향해 있었고 행위의 필요성에 빠져 있었지만, 갑자기 그것들에 관한 모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 속에는 수많은 '망각된' 자잘한 것들이 나타나고, 그 사람의 전 역사가 마치 움직이는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앙리 베르그손 <변화와 지각>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한 잘못된 주체, 한 불량배가 다 죽어가는 채로 실려 온다. 그를 간호하는 사람들은 빈사 상태에 빠진 불량배의 다 꺼져가는 생명의 징후에 열의를, 배려를, 사랑을 보인다. 모든 사람이 그를 구하기 위해 매달리고, 이 행실이 불량한 남자는 가장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 포근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불량배가 생명을 조금씩 되찾아감에 따라서 그의 구원자들은 점점 더 그에게 냉담해지고, 또 그에 따라서 불량배는 예전의 그 무례함과 고약함을 되찾아간다. 그의 생명과 그의 죽음의 사이, 그곳에는 이처럼 단지 죽음과 더불어 놀이를 하는 하나의 어떤 생명의 순간, 바로 그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질 들뢰즈 <내재성: 생명...>
그는 그들의 사랑을 어린이들을 위한 삽화처럼 떠올린다. 마지막의 가느다란 페이지들이 펄럭이며 닫힌다. 한 줄의 문장이 조용히, 수동적으로 미완으로 남겨지고, 그 끝자락엔 파스텔빛 머뭇거림이 스며 있다. 블리체로의 머리칼은 더 짙고, 어깨까지 내려오며, 영구적인 웨이브가 져 있다. 그는 사춘기의 시동이나 시종처럼 보인다. 한 손에는 광학 장치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소년 고트프리트를 부드럽게, 마치 어머니처럼, 혹은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애타는 눈빛으로 부르고 있다.
이제 그는 저 멀리 있다. 올리브빛 방의 끝에 앉아 있다. 점점 흐려지는 형체들 너머에, 고트프리트가 친구인지 적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형체들 사이에, 블리체로는 있다. 그리고—그는 어디로—이미 사라져 버렸다. 아니... 그들은 이제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다.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속도를 넘어, 마치 잠에 빠지는 것처럼... 기억이 흐릿해진다. 붙잡아. 너는 충분히 단단히 붙잡아야 해. 그러면 볼 수 있을 거야. 서스펜더 벨트가 네 허벅지를 따라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다. 흰색 끈이 사슴의 다리처럼 가늘고, 검은색의... 검은색의 끝부분이... 붙잡아. 너는 놓쳐 버렸어, 고트프리트. 놓치고 싶지 않았던 중요한 것들을. 너는 알고 있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붙잡아.
굉음이 멈춘 게 언제였지? 브렌슐루스(Brennschluss), 연소 종료. 언제였지? 이렇게 빨리일 리 없어... 하지만, 불타버린 꼬리 개방구가 태양을 가로질러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희생자의 금발 사이로 스며든다. 그 속에서 브로켄의 유령(Brocken-specter)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무언가의 그림자가 선명한 태양과 어두워지는 하늘 사이에서 길게 투사된다. 황금빛으로, 점점 하얗게, 물속처럼 고요해지는 공간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이 죽음은 대체 무엇이지? 하얘지는 것, 하얀색을 초백색으로 가져가는 것. 표백제와 세제, 산화제와 연마제 속에서 지워지는 것. 스트레케푸스(Streckefuss), 그는 오늘도 소년의 지친 근육을 주무르러 갔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이름은 더 적절하게도 블리커(Blicker), 블라이허뢰데(Bleicheröde), 표백자(Bleacher), 그리고... 블리체로(Blicero). 그는 모든 색을 희석시켜 희미하게 만들고, 백인의 창백함을 최후의 지점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멜라닌을, 스펙트럼을, 명암을, 색조와 색조 사이의 경계를 제거하며. 그리고 그 끝엔 오직— 붙잡아.
그 개는 붉은 세터였다. 마지막으로 본 개의 머리. 착한 개가 나를 배웅하러 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붉은색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내가 쫓았던 비둘기는 슬레이트 블루였다. 하지만 이제 둘 다 하얗다. 운하 옆에서, 그 밤. 나무 냄새가 나던 밤. 아, 나는 그 밤을 잃고 싶지 않았어. 붙잡아.
집과 집 사이, 길을 가로지르는 파도가 있다. 두 집은 모두 배이고, 하나는 먼 곳으로 떠나고 있다. 기나긴, 중요한 항해를 떠난다. 그리고 그 배웅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따뜻하다. 손짓 속엔 편안함과 애정이 가득하다. 붙잡아.
블리체로가 남긴 마지막 말:
"저녁의 가장자리... 첫 별을 향해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긴 곡선... 언제나 기억하라, 수천 마일의 땅과 바다를 따라 살아가는 그 남자들과 여자들을. 그림자의 진정한 순간은 네가 하늘에서 단 하나의 빛을 보는 바로 그 순간이니. 그 단 하나의 점. 그리고 그 직전에 너를 삼켜버린 그림자…"
언제나 기억하라.
첫 번째 별이 그의 발 사이에 매달려 있다.
이제—
토머스 핀천 <중력의 무지개>
언제나 들추고 곱씹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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