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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시지프 신화이긴 하지만 시지프 신화 얘기는 맨 마지막 7페이지 분량이고 그 앞은 빌드업이자 시지프 신화 비유를 설명하기 위한 주석과 같음.


초반에는 현학적 표현 존나쓰는 겉멋충 부조리무새라서 열받는데 나중가면 많이 나아짐.


이 부조리무새가 하나 더 열받는 점은 지 하고싶은 말 나불거리다가 나중에 번복함.


"세계의 두꺼움과 낯섦,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앞에서 나는 이 세계가 부조리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말이었다. 이 세계 자체는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조리 삼위일체론을 전파함. 이 이론은 나중가서도 폐기하지 않음.


"부조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이다. 부조리야말로 양자를 묶어 주는 유일한 끈이다."


"이 삼위일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세 가지 중 어느 한 항이라도 파괴하면 그것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나는 합리적인 이성과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의 괴리감이 부조리의 감정이라고 이해함.


"이 정신과 이 세계는 서로 부둥켜안지 못한 채 서로 힘을 겨루듯이 떠밀며 버티고 있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 주는 세계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 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부조리가 태어난다면 그것은 바로 유효하지만 한계가 있는 이성과 항상 되살아나는 비합리가 서로 만날 때이다."


세계가 비합리적인 가장 큰 이유 = 인간은 언젠가 죽기 때문(필멸자). 근데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름. 




확실한 건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거임. 


"만약 내가 부조리란 신이 없는 상태에서의 죄라고 감히 엄청난 표현을 한다면 아마도 이 개념은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부조리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논리가 부조리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다고 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의 보편 역사의 요약이다."


카뮈는 유신론이 주는 이점을 인정함. 그것은 아마 인생의 의미 뿐만 아니라 영생이 주는 혜택이 매우 클거임. 이걸로 부조리도 해치울 수 있겠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줄 어떤 신이 있다는 확신은 벌 받지 않고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매혹적이다."


그래서 자,살할래? 신에 기댈래? 부조리에 고통 받으면서 살래? 이게 문제겠지.


일단 카뮈는 자,살을 거부함.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부조리 : 내가 곁에 있으니 고통스럽지? 그럼죽어


카뮈 : 아니, 너를 길동무 삼아 고통받으며 사는 게 이제부터 내 삶의 법칙인데? 그럼살아


부조리 : (심쿵)


그리고 신과 자유, 책임에 대한 역설을 하나 제시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의 경우를 알고 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 따라서 전능한 신이 악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고 책임이 있다. 따라서 신은 전능하지 않다. 모든 학파의 기발한 기교들도 칼날처럼 단호한 이 역설에 무엇을 더하거나 덜어 내지 못했다."


신은 악한 성질을 지니거나 전능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며 둘 다 모순이라는 주장인듯. 이 역설이 타당한지는 보류하고 적어도 카뮈가 신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카뮈는 자유를 좋아함. 그래서 가치 판단을 싫어함.


카뮈에게 있어서 희망은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며, 삶의 의미가 생기는 원인이며, 자유를 방해하는 제약임.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나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짐으로써, 나만의 진리, 존재하는 방식 혹은 창조하는 방식에 부식함으로써, 그리고 끝으로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고 시인하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이다."


신을 없앤 세계에서 모든 의미와 가치 판단은 사라짐. 대신 그만큼 자유로움.


"그러나 그와 같은 세계에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삶에 의미가 있다는 믿음은 언제나 어떤 가치 척도, 선택, 이것보다 저것이 낫다는 우리의 선호 태도를 전제로 한다. 우리가 정의하는 바에 따르건대 부조리에 대한 믿음은 그와 반대되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되며, 그 어느 것도 증오할 것이 없다. 이것이 부조리의 판단이다."


근데 너무 자유를 열어서 범죄가 걸림돌이 되어버림.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있다는 방식으로 틀어막지만 논리의 일관성이 모호하게 보임.


"부조리가 무슨 행동이든 다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는 다만 그의 행위들의 결과에 한결같은 가치를 부여할 따름이다."


"부조리는 범죄를 저지르라고 권하지 않는다. 다만 부조리는 후회에 그것 본래의 무용성을 회복시켜 놓는다."


부조리와 범죄. 문득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인하는 장면이 떠오름. 


"부조리의 인간은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볼 때 책임지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은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는 미래의 행동을 위한 토대로 과거의 경험을 이용하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뫼르소의 재판이 떠오름. 아무튼 카뮈의 가치 판단을 배제시키려는 작업은 조금 억지스럽게 보임. 


"부조리한 인간이란 실제로 어떤 인간인가? 영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다. 그가 영원에 대한 향수를 조금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향수보다는 자신의 용기와 이성 쪽을 택한다. 용기는 그에게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자족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 이성은 그의 한계를 가르쳐 준다."


카뮈는 느닷없이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용기와 이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해버림. 사실 이성에 대해서는 합리론자들을 병신취급했던 내용도 있고, 이성을 어떤 의미로는 부조리의 원인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성이 한계를 가르쳐 준다고 했으니까 반쯤은 까는거라 볼 수 있으니 넘어가줄만 한데 용기에 대해서는 넘어가기 힘드네. 


까는김에 하나 더 언급하자면 확실한 걸로 논의하는거 좋아하는 카뮈가 형이상학적 상태인 부조리를 떠안고 형이상학적 행복을 맛보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낌. 


"의식적인 인간의 형이상학적 상태인 부조리는 신에게로 인도하지 않는다."


"세계의 부조리를 지탱해 나가는 데서 맛볼 수 있는 형이상학적 행복이란 것이 존재한다. 정복 혹은 연기, 무수한 사랑, 부조리한 반항 같은 것들은 인간이 미리부터 패배한 전장에서 자신의 존엄성에 바치는 경의인 것이다."


애초에 부조리의 고통 속에서 형이상학적 행복을 느끼는 것은 합리화같고 마조히스트같음. 돈 후안주의, 연극, 정복자의 예시를 들면서 설명해주긴 하는데 그다지 납득이 안되더라. 왜 굳이 행복을 끼워 넣으려고 한거지? 




카뮈의 창조와 예술 작품에 대한 설명은 마치 시지프 신화의 바위 굴리기에 대한 빌드업으로 느껴짐. 


"중요한 것은 부조리와 더불어 살아 숨 쉬는 것, 그것이 주는 교훈을 인정하고 그것의 살을 되찾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조리한 즐거움의 전형은 바로 창조다."


"예술 작품은 한 경험의 소멸과 동시에 그 증식을 나타낸다. 그것은 세계가 이미 작곡해 놓은 여러 가지 주제들의 단조롭고도 열정적인 반복과 같은 것이다."


"예술 작품이 부조리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을 묘사하는 일이다."


카뮈는 견고한 이론은 아니지만 나름 일관적으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 같은 건 없음을 강조함. 


"작품은 어떤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위안도 될 수 없다. 창조를 하건 창조를 하지 않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 이 모든 것에는 현실적 의미가 없다."


어차피 아래로 떨어질건데 바위 왜 굴림? 어차피 죽을건데 창조 왜 함? 카뮈는 창조와 바위 굴리기의 연관성을 더 구체화시킴.


"적어도 부조리한 삶을 완성할 수 있는 한 가지 태도인 창조적 태도에 관해 결론을 이끌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예술은 오직 부정적 사고에 의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마치 백색을 이해하자면 흑색이 필요한 만큼이나 부정적 사고의 하찮고 겸허한 방식들이 위대한 작품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헛되히' 작업하고 창조하는 것, 진흙으로 조각품을 만드는 것,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 아는 것, 자신이 만든 작품이 하루아침에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수세기에 걸쳐 건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그것은 바로 부조리의 사고가 가능케 해 주는 어려운 예지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부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찬양하는 이 두 가지 사명을 한꺼번에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창조자에게 열린 길이다. 그는 허공에 자신의 색깔을 칠해야 한다."


근데 왜 굳이 다른 게 아니라 창조일까? 아마 창조라는 활동과 과정이 부조리를 직시하기에, 부조리를 지속시키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싶음 


"인내와 통찰을 배우는 모든 학습장 중에서 창조는 가장 효과적인 학습장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이 지닌 유일한 존엄성의 기막힌 증언이기도 하다. 즉, 인간 조건에 대한 집요한 반항, 불모의 것인 줄 알면서 노력을 계속하는 불굴의 인내가 그것이다. 창조는 나날의 노력, 자기 억제, 진리의 한계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절도와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고행이다. 그런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을 위해서', 되풀이하고 제자리걸음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마도 위대한 작품은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인간에게 시련을 요구하고 인간이 그의 망령들을 이겨 내고 자신의 적나라한 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그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리라."


"창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약간 꼴받는 점. 카뮈는 지 맘에 드는 분야 있으면 음~ 이게 부조리지 하면서 바로 부조리 묻힘. 대표적인 예가 음악


"만약 교훈과 무관한 예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악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수학을 닮아 수학에서 그 무상성을 발려 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정한 관습과 절도를 갖춘 법칙에 따라 정신이 자신과 벌이는 이 유희는 바로 우리의 것인 소리 공간에서 전개되지만 동시에 진동은 그 공간을 넘어 어떤 비인간적인 우주에서 서로 만난다. 이보다 순수한 느낌이란 없다. 이러한 예는 너무나도 손쉬운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은 화음과 형식들이 바로 자기의 것임을 깨닫는다."






모든 빌드업을 마치고 드디어 시지프 신화 이야기로 넘어감. 이것은 부조리 철학을 설명하기에 꽤나 적절한 비유라고 느껴짐.


시지프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그의 이성이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위 굴리기의 끝에는 바위의 굴러떨어짐이 있으며, 다시 바위 굴리기를 무한반복 해야하는 무희망적인 굴레의 부조리를 인식함.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 주는 통찰력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지프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문득 본연의 침묵으로 되돌아간 우주 안에서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무수히 솟아오른다. 은밀하고 무의식적인 부름이며 모든 얼굴의 초대인 그것들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요, 대가다.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 고통을 직시하고 무던하게 안고 가라고 함.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인간을 능가하는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그가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이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카뮈는 신에게 복종하는 노예(대신 삶의 의미가 생기고 책임전가도 가능ㅋ)가 되는 대신 자기가 삶의 주인(대신 삶의 의미도 없고 평생 부조리에 고통받음)이 되는 것을 선택함.


"죽음이라는 그 유일한 숙명을 제외하고는 기쁨이건 행복이건 모든 것이 자유다.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는다. 그를 얽매어 놓던 것은 다른 어떤 세계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의 사고가 가야 할 운명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로 재도약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결론에서 최근에 읽었던 헤세의 황야의 이리와 결이 비슷한 점이 있다는 점을 느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거지. 이 즐김이 납득하기 힘든 형이상학적 행복과 유사한 의미인가? 그래도 여전히 책 전체에서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몇 안되는 문장에서 긍정과 행복의 단어들을 끼워넣은 이유가 뭘까? 결국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충족시켜주기 위한 장치인가? 어쩌면 해설서에 그 정답이 나와 있을지도 모르겠음.




소설의 창조, 즉 부조리가 소설에서 잘 지탱될 수 있는지를 고찰하는 부분에서 이 부조리무새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정말 크게 받았나보다 싶었음. 


어쩌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가 싶을 정도임.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님으로 착각할 정도.


나는 아직 얘 작품 하나도 읽어본 적 없어서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읽어보려고 함.




여담으로 이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문장은 이거임


"만일 내가 뭇 나무들 중 한 그루의 나무라면, 뭇 짐승들 중 한 마리의 고양이라면 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 모든 의식과 친숙함에의 요구를 통해 내가 맞서는 이 세계 자체가 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나를 모든 창조물과 대립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보잘것없는 이성이다."


철학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제일 기분좋은 순간들 중 하나는 내가 고민하던, 생각하던 것들을 얘네들도 똑같이 생각했을 때임. 이런 문장들은 너무 반갑고 심장이 두근거림.


그렇지. 짐승들은 자연과 조화되어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 자아를 가진 인간은 세계와 분리된다.


여기서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자아를 버리는 물아일체의 경지가 있고 이것은 범아일여, 동양의 종교, 철학과 연관이 깊다고 생각함. 이것은 죽음의 상태와도 결이 유사하다고 봄.


테드 강연중에 좌뇌 우뇌에 대한 영상이 떠오름. 뇌출혈에 의해 우뇌만으로 세상을 바라본 경험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이 물아일체와 닮았다고 느낌.


이와 정반대의 길이지만 이성에 의한 능동적 물아일체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시했었음. 이것은 칸트의 정언명령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함.


"만일 지성이 우리에게 공통된 것이라면, 우리를 이성적 존재로 만드는 이성도 공통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명령하는 이성 또한 공통적이다. 그렇다면 법 또한 공통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시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어떤 공통의 정체에 속해있다. 그렇다면 우주는 어떤 종류의 국가와 같다." - 명상록


"이성적 동물에게는 자연에 따른 행동이 이성에 따른 행동과 동일하다." - 명상록


마르쿠스형님은 이성에 따른 행동과 자연에 따른 행동이 같다고 믿었음. 정말 매력적인 마인드라고 생각함. 




그리고 이방인의 해석에 힌트를 주는 부분 2개만 더 가져와봄.


"다시 한 번 방법 문제를 강조해 두자. 그것은 바로 고집스럽게 버티는 일이다. 길을 가다 보면 어느 길목에선가 부조리의 인간은 그에게 손짓하는 유혹을 만난다. 역사 속에는 온갖 종교, 온갖 예언자가 가득하다. 심지어는 신 없는 종교나 신 없는 예언자도 있다. 그리하여 부조리의 인간에게 비약할 것을 요구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도무지 분명치 않다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이 잘 아는 것만 행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오만의 죄라고 역설하지만 그는 죄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가는 길의 저 끝에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들 역설하지만 그는 이 기이한 미래를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상상력을 갖지 못했다. 또 그러다간 영원한 삶을 잃는다고들 하지만 그에게는 다 헛된 말 같아 보인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죄임을 느낀다. 사실 그가 느끼는 것은 오직 그것,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죄뿐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스스로에 요구하는 바는 오직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살고, 실재하는 것으로써 자족하고, 확실치 않은 것이라면 아무것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그에게 응수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가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확실성이다. 즉 그는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지 알고 싶은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뫼르소가 듸지기 전에 신부가 와서 회개하자고 꼬드기는 부분이 바로 떠오름. 카뮈는 시지프 신화 내에서도 신, 종교에 대한 얘기를 부조리 못지않게 하루종일 언급함. 


"행복과 용기, 급료나 정의 같은 것들은 그들 교회의 시각에서 보면 부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것은 교의로, 그것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나는 관념이나 영원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의 척도로 잴 수 있는 진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이러한 진리와 떨어질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신은 나를 바탕으로 삼아 내 위에 아무것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정복자의 것으로 영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그의 독트린마저 영속하지 못한다."


이 문장을 읽고 뫼르소가 풀발기해서 시부렁시부렁 거리는 장면이 떠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