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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문」이지만, 개인적으로 「그 후」에도 큰 애착을 갖고 있다. 내가 가장 처음 읽은 소세키의 작품이 「그 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비장미로 치면 「그 후」에 견줄 수 있는 일문학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잃고 느끼는 공허함을 담담히 묘사하는 문체도 훌륭하고, 급작스러운 방향 전환을 견디지 못하고 파멸하는 결말도 인상적이다. 심장 고동으로 자신의 생명을 확인하는 다이스케의 습관, 정열을 상징하는 백합과 빨간색 등등 문학적 장치들이 정말 아름답게 쓰인 작품이다. "나중에는 세상이 온통 새빨개졌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해서 뱅글뱅글 불길을 내뿜으며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겠노라고 결심했다." 이 마지막 문장은 모든 소설들을 통틀어 최고의 마지막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는 언뜻 보면 공허한 내용처럼 보인다. 다이스케의 무기력함, 다이스케를 옥죄는 가족의 검은 속내, 히라오카의 타락은 독자마저도 진이 빠지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그 후」로부터 얻을 것은 짜증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다이스케가 겪고 있는 문제는 다이스케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는 일본의 개화기나 지금이나 변화하고 있다.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의 속도가 더 빠를지도 모른다. 소속된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급변하면서도 개인에게 '생활'을 위해 항상 무언가를 강요하는 시대상은 개화기에만 있던 것이 아니다. 역사 전체가 그렇다고 해도 무방하다. 여기서 어떤 태도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다가 결국 자기 본위와 시대상의 대립을 느끼며 꿈을 위협받는 것이 모든 인생의 문제다. 다이스케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다이스케의 시대, 즉 일본의 개화기는 기존의 강직한 윤리 체계가 무너지고 국익으로 포장된 이기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한때 남자의 로망이던 무사도마저 돈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단 노골적으로 이윤을 밝히기는 어려우니, 옛날의 덕목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서 자신을 변호할 따름이다. 물론 그런 허위들을 모조리 벗어던지고 옛날로 돌아가자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념 하나 때문에 지금의 안락을 주는 것들을 전부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 허위들을 눈 딱 감고 삼키는 것도 어렵다. 결국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적응도 할 수 없다.

다이스케는 부적응에 적응한 사람이었다. 다이스케가 커서 마주한 세상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달랐으며, 앞으로는 더 멀어질 것이 뻔했다. 그러니 현실을 똑바로 보는 것조차 주저하고 관념만 만지작거릴 뿐이다. 히라오카의 실패는 더욱 뼈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한때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와 같은 이상을 품고, 다이스케보다 더 큰 의지를 갖고 있었다. 히라오카는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히라오카가 쓰디쓴 실패를 경험하고, 또 이전의 자신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현실에 타협한 사람들은 이전에 함께 했던 이념들을 버리고 살기 위해 혼자만의 길을 걷게 된다. 아무런 뜻도 없이, 생활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각자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고립된 인간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문명은 인간을 고립시킨다." 그렇게 다이스케는 길을 걷는 사람들을 관조하는 낙오자로 살아갈 듯했다.

하지만 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이스케의 의지는 완전히 식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에 의해 방치된 미치요에게 동정심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낀다. 옛날의 기억까지 합쳐져 쉽게 끌 수 없는 정열이 된다. 물론 둘의 관계는 용인 받을 수 없다. 히라오카와 미치요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사회적으로 이루어진 결혼이라는 계약을 마음 하나로 돌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이 관계가 이뤄진다는 것은 곧 다이스케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희생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다이스케도 이를 알고 있고, 이렇게 됐을 때의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생처음 겪어 보는 정열의 파도에 다이스케는 휩쓸린다. 사회의 피상적인 규칙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다이스케와 미치요에게는 그쪽이 옳았다. 

"다이스케는 자기 본래의 활동을 자기 본래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자기 본래의 활동 이외에 어떤 목적을 세워서 활동하는 것은 활동의 타락이 된다. 따라서 자기의 모든 활동을 한낱 방편의 도구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이스케가 의지를 감행하는 근거는 '자기 본위'다. 삶의 목적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며, 외부에서 부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인간의 목적이란 태어난 본인 스스로가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을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다." 다이스케는 생활, 즉 가정의 지원을 대가로 요구받는 사업적인 이익을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행위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다. 물론 그래봤자 다이스케는 불륜을 저질렀을 뿐이며, 앞서서 옛 가치관들이 자본주의에 잠식되어 그럴싸한 포장지가 됐다고 지적했듯이 '자기 본위'라는 말도 다이스케에 의해 그럴싸한 포장지가 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도덕한 결정을 감행하고 나서 다이스케의 모습을 보면, 진전이 없어서 앞으로를 긍정적으로 예상할 수 없기는 해도, 어느 때보다 사람답다. 아버지에게 자기 생각조차 말하지 않던 다이스케였다. 부도덕한 행동을 통해 다이스케는 자아를 확보했다.

물론 사회의 풍파는 일껏 다시 일어난 그의 자아를 다시 부숴놓을 것이다. 조금 길지만 그의 행동의 가치와 그가 현실적으로 처할 미래를 잘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비 속에서, 백합 속에서, 그리고 재현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은 어디에도 욕망이 없고 이해관계를 따지려들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났다. 이 순간적인 행복에서 생기는 영원한 고통이 갑자기 그의 머리를 침범해 왔다. 그의 입술은 핏기를 잃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톱 밑으로 흐르고 있는 피가 부들부들 떠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일어서서 백합 곁으로 갔다. 입술이 꽃잎에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가서 어지러움을 느낄 때까지 진한 향기를 맡았다. 그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입술을 옮겨 달콤한 향기에 질식해서 정신을 잃고 방 안에 쓰러지고 싶었다." 백합은 아무 데나 피어있지 않다. 향기에 취하고 싶어도 꽃이 필 수 없는 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머지않아 다이스케가 쫓겨날 땅에는 백합 따위는 없을 것이다.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생활의 악취가 그의 코를 대신 찌를 것이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백합의 향기를 기억할 것이다. 생활이 그를 백합으로부터 떼어놓을지라도, 그의 의지가 다시 발할 수 있다면 백합을 억지로 키워보는 일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후」의 결말이 해피엔딩일지 배드엔딩일지는 전적으로 '그 후'의 이야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히라오카에게 지은 죄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문제고, 가족의 지원 없이 홀로 사람답게 사는 것도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유력한 시나리오다. 하지만 그 탈선을, 아니 자신만의 선로를 되찾았을 때 느꼈던 아름다움을 기억한다면 다이스케는 백합을 집에 두고 틈틈이 향기를 맡을 정도로 충실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두 번째 히라오카가 되겠지만. 아무튼 마지막에 정열의 빨간색이 그를 감쌌고, 다이스케는 그 빨간색이 자신을 완전히 연소시키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선로를 타고 가겠노라고 결심한다. 그는 세상과 싸울 준비는 돼있지 않지만 세상과 싸울 결심은 돼있다. 그 결심이 그를 이끌어줄 것이다. 다이스케의 '그 후'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만큼 낙관적으로 보는 것도 타당하다고 나는 믿는다.

앞서 말했듯이 다이스케의 문제는 다이스케만의 것이 아니다. 시대는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흐르고, 적응과 생활을 위해서는 때때로 자신의 의지를 부정하기까지 해야 한다. 세상은 끝없이 '이로움'이라는 개념을 바꿀 것이고, 거기에 맞춰야만 변화 속에서도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다. 물론 타협하는 것이 전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삶과 타협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타협해서 최소한의 질을 보장받는 쪽이 현명하다. 또 다이스케의 선로가 그래봤자 불륜으로 이어졌듯이, 자신의 의지라고 해봤자 말만 거창할 뿐 보잘것없는 길로 자신을 끌어당길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의 의지를 따랐을 때만 비로소 자신의 생명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살 결심, 그리고 그것을 짊어질 결심을 품었을 때에야 삶은 진정한 내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자신만의 길을 힘들게 나아가는 것도 감행해 볼 만한 선택지다. 승산은 터무니없이 적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오로지 자신을 위해 쓰고자 한다면 그런 싸움에 뛰어들어야 한다. 책임은 자신의 것이다. 당당히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겁지만 피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짐을 짊어지고 삶을 완주한 사람은 후회 없이, 자신의 길을 결심한 순간부터 '그 후'의 모든 일이 그런대로 잘 됐노라고 돌아보며 여정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실의 힘을 두려워하며 처신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도 아름답고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라고 믿는다. 삶의 굴곡은 내 의지대로 그려지지 않을 테고, 나는 히라오카의 모습과 다이스케의 모습을 왔다 갔다 할 것이다. 히라오카의 모습에서 영원히 멈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이스케의 마지막 결심을 동경하는 마음은 끝내 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