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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p

그 자리에서 대중에게 자기의 오욕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오욕은 단순한 오욕은 아니고 '아름답고 고귀한 것'을, 즉 만프레드식인 무언가를 풍부하게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키스한다(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놈들은 형편없는 머저리들이다). 그러나 나는 굶주림을 무릅쓰고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맨발로 길을 떠난다.


- 위 내용은 수기의 주인공이 현실에서 도피하여 공상했던 장면 중 하나를 묘사한 것이다. 수기에서 언급된 '만프레드식 무언가를 내포한 오욕'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소설 '백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므이쉬낀 공작이 스위스에서 귀국한 첫 날 나스타샤와 가아냐와의 혼담을 확정 짓던 저녁 만찬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스타샤는 갑자기 지루해졌는지 "돌아가면서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 중 가장 부도덕한 잘못을 고백하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누군가가 "이런 게임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가장 부도덕한 잘못 이야기를 가장해서 숭고하고 고결한 척 연기를 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인물들이 모두 나스타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달하고 있었으므로 그 제안은 곧 받아들여진다. 아니나 다를까, 첫번째로 시작한 예빤친 장군이 마치 "나는 이런 사소한 잘못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고결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고백을 내 놓고, 토즈키는 천박하고 유치한 짓궂은 장난 이야기를 하며 게임은 흐지부지된다. 누구도 자신의 추악한 악의가 담긴 부도덕한 행위를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나스타샤가 이런 게임을 제안한 이유는 자신을 모욕한 토즈키를 은근히 질책하는 동시에 상처 입은 자신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나스타샤는 부도덕한 행위의 피해자로서 자신은 결백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나스타샤를 타락한 토즈키의 정부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이런 현실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자신을 타락한 여인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아채자, 타락한 여인의 모습으로 살기를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지하생활자의 수기 앞부분 30p에서 언급한 '정욕과도 같은 쾌감'이 문학적으로 나타난 사례이다. 실제의 '만프레드식'은 '자신의 잘못을 혹독하게 문책하는 고결함'을 의미하지만, 수기에서 말하는 '만프레드식 무언가'는 화자의 열등감과 결핍된 인정 욕구를 위로하기 위한 허영심에 불과하다.


- "나는 당신들을 괴롭히고 신경을 쥐어뜯고 있다. 그리고 집 안 사람들을 못 자게 하고 있다. 그러니 모두들 자지 말라. 내가 이를 앓고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끊임없이 느껴야 한다. 전에 나는 당신들한테 영웅처럼 보이려고 했지만, 지금은 한낱 추악한 무뢰한으로밖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도 좋다! 당신들이 내 본성을 간파해주어 나는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당신들은 내 야비한 신음 소리가 듣기 싫을 테지..... 흥,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라. 이제 더욱 듣기 싫은 가락을 붙여 들려줄 테니....." - 30p


- 마지막에 모든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숭고한 여정을 떠나는 묘사를 보면, 주인공이 사실은 실제적 삶에서의 도덕적 행위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은 자신의 수준 높은 도덕적 행위와 사상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남다른 허영심의 소유자이기에, 주변 몇몇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만족하지 못 하고 '대중'에게 떠받들어지는 공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수기의 화자는 101p에서 "나는 이류의 역할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었으므로 바로 그 때문에 현실에서는 태연하게 말단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영웅 아니면 당나귀,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 주인공은 실제적 삶을 냉소하며 지하에 은둔해 있지만, 누구보다 실제적 삶을 갈망하고 있다. 수기의 화자는 69p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여러분,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의식적인 타성이 가장 좋겠다! 그러니까 지하생활 만세랄 수밖에! 나는 울화통이 터질 만큼이나 정상적인 인간이 부러워 죽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현재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그들이 있는 한, 그들 축에 끼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그래도 역시 부러운 건 사실이지만.....아니다, 아니야, 뭘로 보나 지하 세계 쪽이 훨씬 낫다!). 거기서는 적어도.....제기랄, 나는 또 허튼소리를 하고 있구나! 허튼소리고말고! 왜냐하면 지하생활이 가장 좋은 건 절대 아니고, 내가 갈망하는 건 뭔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걸 2 * 2 = 4 만큼이나 분명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 - 6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