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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맑스를 처음 접한 것은 김나지움을 마칠 즈음이었다(<공산당 선언>을 접했다). 그 인상은 지극히 강렬했다. 그 후 학부 때 나는 맑스와 엥엘스의 글 몇 편(<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든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읽었으며 특히 <자본론> 제1권을 철저히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나는 즉시 맑스주의의 몇 가지 핵심이 지닌 정당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잉여가치론, 역사를 계급투쟁들의 역사로 보는 관점, 사회의 계급적 편성 등이 무엇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렇지만 부르주아 지식인에게 아주 비근한 일이듯이 내게도 이러한 영향은 경제학 그리고 특히 '사회학'에 한정되었다. 나는 유물론 철학(당시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비변증법적 유물론을 전혀 구분하지 않았다)은 인식론상으로 완전히 극복된 것으로 여겼다. "의식의 내재성"이라는 신칸트적 학설은 당시 나의 계급적 위치와 세계관에 딱 들어맞았다. 나는 그 학설을 비판적으로 검증하지도 않은 채, 모든 인식론적 문제설정의 출발점으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떻게 현실의 문제가 단순히 의식의 내재적 범주로서 도출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에 대해서는(신칸트주의의 마르부르크학파뿐만 아니라 마하주의2에 대해서도) 항상 의심을 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유물론적 결론들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이 문제를 비합리주의적, 상대주의적으로, 종종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변색시켜 해결하려고 했던 철학 학파들(빈델반트리케르트, , 딜타이)에 접근하게 되었다."

"1907년(23세)부터 1911년(27세) 사이에 발표된 나의 에세이들은 이러한 방법과 신비주의적 주관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세계관의 그러한 발전 과정에서 청년시절 맑스를 읽고 생긴 인상들이 점점 더 퇴색하고 나의 학술 활동에서 점점 더 작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나는 맑스를 가장 능력 있는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여겼지만, 경제학과 '사회학'은 당시 나의 활동에서 일시적으로 비교적 작은 역할을 했다.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으로 인해 내가 철학적 위기에 이르게 되었던 발전과정의 세세한 문제들과 단계들은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사안이 못 된다. 하지만 그 철학적 위기는-나는 당연히 의식하지 못했는데-제국주의적 대립들의 강력한 대두에 의해 객관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세계대전의 발발로 촉진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맨 먼저 주관적 관념론에서 객관적 관념론으로 이행하는 과정(1914~15년에 쓴 <소설의 이론>)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아마 헤겔-특히 <정신현상학>-이 내게 점점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것 같다. 내게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헤겔 연구가 깊어지면서-이때 포이어바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지만 그 당시에는 인간중심주의의 측면에서만 관심을 가졌다-"

"맑스를 더 이상 '탁월한 전문학자'로,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로 보지는 않았다. 이미 그 당시에 맑스가 포괄적인 사상가, 위대한 변증론자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물론 그 당시에도 나는 변증법의 문제들을 구체화하고 통일적이며 수미일관하게 만드는 데 있어 유물론이 지니는 의미를 여전히 몰랐다."

"(관념론적 오류에 빠진 데 있어) 그 원인은 나의 고국 헝가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좌.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에르빈 서보생디칼주의였다는 점에 있다."

"강단 지식인으로서 비합법 노동운동과 분리되어 있었던 나는 전쟁 동안에 스파르타쿠스단3의 글들은 물론 레닌이 전쟁과 관련해 쓴 글들도 보지 못했다.는-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지녔던-로자 룩.셈부르크의 전전 저술들을 읽었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918~19년의 헝가리 혁명기 동안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혼요 상태에서 나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헝가리 혁명을 만났다. 약간의 동요 후에 1918년 12월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후 혁명적 노동운동의 대열 속에 쭉 머물렀다. 정치 사업은 즉시 맑스의 경제학 저술들에 대한 더욱더 집중적인 연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역사, 경제사, 노동운동사 등등에 대한 더욱 강도 높은 연구와 철학적 토대의 끊임없는 수정을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했다. 맑스주의 변증법을 실제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이러한 고투는 매우 오래 지속되었다. 헝가리 혁명의 경험을 통해 모든 생디칼주의적 이론의 허약성을 매우 선명히 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혁명에서 당의 역할). 하지만 내게는 극좌.파적인 주관주의가 여전히 오랫동안 생생히 남아 있었다(1920년 의회주의 논쟁에 대한 입장4과 1921년 3월 사태에 대한 입장5). 이것은 무엇보다도 변증법의 유물론적 측면을 현실적이고 올바르게, 그것이 지닌 포괄적인 철학적 의의에 걸맞게 파악하는 것을 방해했다. 나의 책 <역사와 계급의식>(1923)은 이러한 과도기적 상태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략) 변함없이 고수했던 룩.셈부르크의 축적론은 극좌.파, 주관주의적 행동주의와 비유기적으로 뒤섞였다.

주석 4) '의회주의'를 둘러싼 논쟁 와중에 루카치는 <공산주의> 6호(1920년 3월 1일)에 <의회주의 문제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 이 글에 대해 레닌은 "'좌.파 급진주의'의 소아병"을 앓고 있는 글이라고 혹평했다.

주석 5) "1921년 3월 사태"는 1921년 3월 중부 독일에서 일어난 노동자 무장봉기를 말한다. 이 봉기는 정부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다. 이 봉기 직후 쓴 <혁명적 선도체의 조직 문제>에서 루카치는 3월 봉기를 지지하는 극좌적 입장을 취했다. 3월 사태는 나중에 모험주의적 행동이었다고 비판받게 된다."

"거의 십 년에 걸친 사업과 분명히 십 년 넘게 이루어진 맑스에 대한 이론적인 몰두 과정을 거치고 난 지금에야 비로소 유물론적 변증법의 포괄적이고 통일적인 성격이 내게 구체적으로 분명해졌다. 그러나 바로 이 분명함이야말로 맑스주의에 대한 진정한 연구는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며 결코 중단될 수 없다는 인식을 동반하는 것이다. (중략) 변증법적 유물론의 아주 넓고 깊은 인식의 토대 위에서 자연과 사회의 현상들을 최종적으로 파악했다고 망상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필연적으로, 살아 있는 변증법에서 기계적 경직성으로, 포괄적인 유물론에서 관념론적 일면성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변증법적 유물론 곧 맑스의 학설은 날마다, 매 시간 새로 실천에 의거해 익히고 전유되어야 한다."


- 죄르지 루카치, 이슈트반 외르시, 에르제베트 베제르, <삶으로서의 사유: 게오르크 루카치와의 대담>, 375p~38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