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식대로 이해한 걸 정리한거니까 유의
-서문-
후설은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학문적 성과들을 전부 갈아엎고 새하얀 도화지 상태에서 가능한 엄격한 기준을 통해 절대적인 진리를 찾고자 함.
"초월론적 현상학을 신(新)-데카르트주의라고 불러도 거의 무방하다."
이러는 이유는 후설의 시대에서 학문적 통일이 상실되어 버렸다고 판단했기 때문. 즉 통일적이고 생생한 철학으로 재시작하기 위해서.
-제1성찰-
후설의 목적은 '절대적인 학문 정초'
이를 위해 참된 학문의 일반적인 목적 이념을 알아내고자 함. 그걸 미리 말하자면
학문하는 자는 자신의 판단을 정초하고자 하며, 이 정초된 판단을 반복검증 함으로써 '학문적 인식'으로서 타당한지 허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
* 인식 = 진리를 하나이자 동일하게 의식된 진리로서 언제든 다시 현실화시킬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가장 중요해 보이는 단어는 '명증'이라는 관념인데,
대상이 그것 자체로 주어지는 것, 자체 소여되는 것이 명증이라고 함.
"명증 속에서 사태는 그것으로부터 한갓 먼 의향함의 방식에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현전되며, 사태연관도 그것 자체로 현전되며, 따라서 판단하는 자는 그것 자체를 자각한다."
"명증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존재자, 이러저러한 성격의 존재자에 대한 하나의 '경험', 즉 바로 그것 자체를 정신적으로 봄이다."
후설은 '표현'이라는 단어도 명확히 함. 판단 또는 명증을 선술어적인 판단 또는 명증과 구별하기 위함임.
"학문은 선술어적으로 직관된 것을 완전하게 그리고 명증적인 적합성에서 표현하는 술어화에 도달하고자 한다."
나는 사물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 깨달음을 언어로 전달하는 것과 같이 선술어적인 명증을 명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함.
"의향된 것 혹은 명증적으로 직관된 것은 표현(Ausdruck)에 이르며, 학문은 표현을 통해 판단하고자 하며, 판단, 진리를 표현된 판단, 표현된 진리로서 고정시켜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표현 자체는 의향된 것에, 그 자체로 주어진 것에 잘 들어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표현은 술어화(Prädikation)에 포함되는 그것 고유의 명증과 비명증을 가진다."
"따라서 표현은 최종적으로 정초되고 정초되어야 할 술어적인 사태연관으로서의 학문적인 진리의 이념을 함께 규정한다."
다시 후설은 '절대적인 학문 정초'를 위해 학문의 의미에 대해 설명함.
"학문은 영원히 모두에게 타당하고 지속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추구하며,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확증, 최종적인 것에까지 완수된 확증을 추구한다."
"학문은 절대적인, 혹은 학문적으로 참된 진리의 이념을 뒤따르며, 따라서 그것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의 무한한 지평 속에 산다."
후설은 일상적인 것과 엄밀한 것을 구분하고 있으며, 엄밀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느껴짐.
"일상적 언어는 유동적이고 다의적이며 그 표현의 완전성에 있어서 지나치게 느슨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상적 언어의 표현 수단들을 사용하기는 하더라도, 학문적으로 생겨난 통찰들을 근원적 준거로 삼아서 그 의미들을 새로 정초하고 그것들을 이 의미들 안에서 고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 일상적, 상대적, 한갓 의향하는 것, 상대적인 명증, 상대적인 진리
- 학문적, 절대적, 완전한 명증, 지속적으로 타당한 진리, 체계적, 무한, 보편
이런 식으로 일상적인 것과 엄밀한 것이 대비되는 느낌임. 사르트르의 접근과 확실히 차이가 느껴짐.
"따라서 그 의도에 있어서 학문과 철학의 이념에는 그 자체로 앞선 인식에서 그 자체로 나중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질서가 속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여기에는 자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태 자체의 본성에 근거하는 [인식에서의] 시작과 그 이후의 진행이 속한다."
당연한 소리 아니야? 하는데 후설은 새하얀 도화지 상태에서 여기까지 도달한 것을 나름 뿌듯해함.
후설은 드디어 첫 번째 방법적인 원리에 도달했다고 함.
해당 사태와 사태연관이 '그것 자체'로서 나에게 현전되는 '경험들'로부터 길어내는 판단을 내릴 것.
그리고 항상 그때그때의 명증을 반성해야 하고, 그것의 유효범위를 검토해야 하며, 명증의 완전성과 사태의 현실적인 자기 소여가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를 명료히 해야 할 것.
아직 후설 선생님의 단어수업은 안 끝났음.
후설은 명증의 완전성을 충전적 명증과 필증적 명증으로 구분함.
충전성 = 일치하는 경험의 종합적인 진행의 방식을 통해 함께 의향함이 충족된 현실적인 경험으로 변화하는 것
필증성 = 완전히 특정하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의심 불가능성
모든 명증은 '그것 자체'를 포착하는 양상을 띠기 때문에 모든 의심을 배제하지만,
명증에도 불구하고 의심스럽게 되거나 비존재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음.
그런데 비판적 반성을 통해 언제라도 그 가능성이 미리 인식될 수 있다고 함.
필증적인 명증은 명증적인 사태 혹은 사태연관의 존재 확실성과 '동시에' 비판적인 반성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모든 의심을 배제함.
후설의 학문과 철학 이념에는 '그 자체로 앞선 인식에서 그 자체로 나중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질서'가 속해 있다고 말했었음.
이제부터 첫 번째 인식에 대해 탐구함.
세계의 실존이 직관적으로 떠오르지만, 후설은 이 명증의 필증성에 대해 의심함.
즉 그것이 일관되게 연결된 꿈일수도 있으니까 적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 경험의 명증이 필증적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는 것.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 단지 한갓된 존재 주장'일 뿐임.
그럼에도,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생활 주위 세계 전체가 오직 존재 현상일 뿐일지라도,
"나의 현상으로서의 이 현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러한 비판적 결정을 언제나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며,
따라서 이제껏 나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된 혹은 결정될 수 있는 의미와 타당성을 갖는 '참된' 존재로서의 그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중요한 것은 모든 경험 믿음을 중지한다 하더라도 이 중지함은 그것 그대로 존재하며, 경험하는 삶의 전체 흐름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임.
"경험하는 삶의 전체 흐름은 나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지속적으로 하나의 현재장을 따라 가장 근원적인 원본성을 지닌 채 그것 자체로서 지각적으로 의식된다."
과거 역시 기억에 의해 다시 의식되고, 과거 자체로서 놓인다고 함.
아무튼 후설은 현재하는 것을 현재하는 것으로서, 지나간 것을 지나간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존재하는 바대로 포착할 수 있다고 함.
"나는 이제 철학하는 자아로서 그리고 저 중지를 실행하는 자아로서 이를 행한다."
중지를 실행하지만, 경험된 세계는 나에게 계속 머물러 있음.
"나는 철학적으로 반성하는 자로서 경험에 대한 존재 믿음을 수행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존재 믿음은 여전히 거기에 함께 존재하며, 주목하는 시선에 의해서 함께 포착되어 있다."
더 나아가 세계를 전제하는 의향들(경험들, 비직관적인 표상들, 판단들, 가치 태도들, 결정들, 목적 및 수단 정립들) 전부 같은 제스쳐를 취함.
즉 타당성 속에 견지하지 않고 타당성 밖에 정립함.
왜 이런짓을 하느냐?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으로 보임.
"이를 통해 성찰하는 자로서 나에게 귀속되는 것은, 자신의 모든 순수한 체험과 자신의 모든 순수한 의향되는 것을 동반하는 나의 순수한 삶, 즉 현상학적 의미에서 '현상들'의 우주 전체이다."
"판단중지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으로서, 이를 통해 나는 스스로를 자신의 순수한 의식 삶을 지닌 자아로 순수하게 붙잡는다. 전체 객관적 세계는 바로 이 순수한 의식 삶 안에서 그리고 이것을 통해 나에게 존재하며, 나에게 나타나는 모습대로 존재한다. 모든 세계적인 것, 모든 시공간적인 존재는 나에 대해서 존재한다. 즉 나에 대해서 타당하다. 그것도 내가 그것을 경험하고 지각하고 기억하고 어떤 식으로든 사고하고 판단하고 가치 평가하고 욕구하는 등을 통해 타당하다."
정리해보면 세계 경험의 명증은 필증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판단중지를 함으로써 전체 객관적 세계가 나에게 존재하며, 나에게 나타나는 모습대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
후설은 데카르트의 성찰과 자신의 성찰을 연관지음.
"세계는 나에 대해서 이러한 '나는 생각한다' 속에서 의식되어 존재하는 것, 나에게 타당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는 자신의 전체 의미, 보편적인 의미와 특수한 의미 및 그것의 존재 타당성을 오직 이러한 의식 작용들(cogitationes)로부터 가진다. 이 의식 작용 속에서 나의 모든 세계의 삶이 경과하며, 나의 학문적으로 탐구하고 정초하는 삶 또한 거기에 속한다."
판단중지가 현상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보임. 여태까지 빌드업을 후설 선생님이 다시 반복설명해줌.
"만약 내가 이러한 전체 삶 위에 나 자신을 세우고 '이 세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소박하게 간주하는 존재 믿음의 모든 수행을 중지한다면, 그리하여 내가 나의 시선을 오직 '이' 세계에 관한 의식으로서의 이 삶 자체로 향하게 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나의 의식 작용들의 순수한 흐름을 가진 순수한 자아로서 얻게 된다. 그리하여 실은 그 자체로 먼저인 존재로서 순수한 자아 및 그의 의식 작용들의 존재가 내가 그에 대해 그때그때 말하고 말할 수 있는 세계의 자연적 존재에 선행한다. 자연적 존재 지반은 그의 존재 타당성에 있어서 이차적이어서 초월론적인 존재 지반을 끊임없이 전제한다. 초월론적 판단중지라는 현상학의 기초 방법은 그것이 초월론적 지반으로 소급해서 이끌어 가는 한에서 초월론적-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린다."
이제 이녀석이 필증적인지 검토함. 우선 후설은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 혹은 '나는 생각하며 존재한다'가 필증적으로 진술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함.
"여기에서 데카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 세계를 타당성 밖에 가능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정립한 후에도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저 자아이다."
후설은 위의 상세한 서술을 통해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자아가 주어지는 방식, 즉 판단중지를 통해 얻는 순수한 자아가 의심 불가능성을 가진다고 함.
(나는 솔직히 저 설명들을 들어도 명쾌하게 의심 불가능성을 가지는지 납득하기 쉽지 않음.
데카르트의 경우 '나는 의심한다'에서 이미 그 자체로 '나는 존재한다'를 전제하니까 의심 불가능함을 이해함.
그렇다면 후설의 경우에는 초월론적 환원에서 이미 그 자체로 자아의 존재를 전제하는가? 검토해보자.
철학하는 자아로서, 중지를 실행하는 자아로서 판단중지를 행하며 이를 통해 나는 스스로를 자신의 순수한 의식 삶을 지닌 자아로 순수하게 붙잡는다.
즉 초월론적 환원을 위해 판단중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하는 자아, 중지를 실행하는 자아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에 의심 불가능하다고 이해하도록 하겠음.)
여기 좀 어렵다. 우선 초월론적 자기 경험 속에서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 '살아 있는 자체 현재'에 대해 근원적으로 접근 가능함.
데카르트로 예를 들면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생각 '띡' 생각 '띡' 생각 '띡' 거리면서 매 순간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게 '살아 있는 자체 현재'의 의미겠지.
반면에 본래적으로 경험되지 않지만 필연적으로 함께 의향되는 것들의 지평이 뻗어나가고 있음(완전히 어두운 자체 과거, 자아에게 귀속된 초월론적인 능력, 그때그때의 습관적인 속성)
외적 경험도 사물이 그것 자체로 있는 자체 경험이지만, 그것 자체로 있음 안에서 사물은 경험하는 자에 대하여 본래 그 자체로 지각되지 않은 것의 무한히 열려져 있는, 규정되지 않은 일반적인 지평을, 그것도 (추정으로서 있으면서) 가능한 경험을 통하여 [추후] 해명될 수 있는 지평을 가짐. 나는 이게 사르트르의 '음영'과 유사하다고 느낌.
아무튼 현실 존재를 더 특수하게 규정하는 것, 그 자체로 주어지지 않고 단지 추정될 뿐인 것에 대해, 필증적 명증 안에 함께 함축된 추정에 대한 필증성에 대해 논의가 필요함.
뿐만 아니라 후설은 한가지 의심을 더 품음. 마치 데카르트의 악마가 생각남.
"초월론적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속을 수 있는가?그리고 이러한 가능한 속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의심되지 않는 부분은 어디까지인가?"
갑자기 후설은 데카르트를 까기 시작함. 자기 이론이 더 우수함을 보이려는 것 같음.
데카르트 성찰에서 스콜라철학, 기하학, 수학적 자연과학에 대한 선입견이 들어 있다고 함.
'나는 생각한다'가 하나의 필증적 공리처럼 다루어지면서 선입견에 끼워맞춰 들어간다고 까는데,
후설은 데카르트가 자아를 '생각하는 실체', 고립된 '인간 정신 혹은 영혼'으로 만들어버려서 망해버렸다고 함.
"만약 우리가 자기 숙고의 근본주의, 그리고 순수직관 혹은 명증의 원리에 계속 충실하다면, 이 모든 것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판단중지를 통해 우리에게 열린 '나는 생각한다'의 장에서 실제적이고 우선은 완전히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여기에서 타당한 것으로 허용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 '보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진술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우리와 거리가 멀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이란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것, 공리를 통해 가지 뻗어나가는 것 이런 것들을 의미함.
드디어 마지막이다. 후설은 현상학적 판단중지에 대해 부연설명함.
"경험 세계의 존재에 대한 자유로운 판단중지를 통하여, 성찰하는 자인 나의 시야 속에 등장하는 것을 내가 순수하게 유지한다면, 세계의 존재와 비존재가 어떻게 되든, 그리고 내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결정하든지 간에, 나와 나의 삶은 나의 존재 타당성에 있어서 전혀 영향받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갑자기 삘받아서 키보드, 너 판단중지! 멈춰! 한 채로 키보드 빤히 바라보면 순수한 의식, 순수한 자아, 순수한 흐름이 되는건가? 대체 어떻게 해야 그 순수함을 가질 수 있는거지?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통하여 나는 나의 자연적인 인간적 자아와 나의 영혼 삶-나의 심리학적인 자기 경험의 영역-을 나의 초월론적 현상학적인 자아로, 즉 나의 초월론적 현상학적인 자기 경험의 영역으로 환원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자아 = 자기 경험의 영역임을 알 수 있음.
"나에 대해 현재 존재하고, 나에 대해 늘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며, 모든 그것의 대상들과 더불어 늘 존재할 수 있는 객관적 세계는,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그때그때 나에게 가지고 있는 그것의 의미 전체와 존재 타당성을 나 자신, 즉 초월론적-현상학적 판단중지를 통해 비로소 등장하는 초월론적 자아로서의 나 자신으로부터 길어낸다."
후설의 철학은 매 순간순간, 그리고 학자의 마음가짐으로 부단한 노력, 뭔가 이런 일개미같은 성실한 마인드가 느껴짐. 지금 이 순간에 그것 자체를 바라봄으로써 판단하는 그런 느낌.
"환원된 자아가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듯이, 반대로 세계와 세계의 모든 대상도 나의 자아의 한 부분이 아니며, 나의 의식 삶의 내실적인(reell) 부분으로서, 감각 자료들 혹은 작용들의 복합체로서 나의 의식 삶 안에서 내실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분명 흥미롭긴 한데 세계의 실존을 지속적으로 타당한 진리로 확정시킨 것 같아서 후설 명치에 지건마려움.
Q. 현상학적 판단중지의 과거에 대한 설명에 대해 희미한 과거, 망각된 과거에 대해서는 의문임. 과연 그것이 과거 자체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불완전한 도구인 기억을 사용하는데 과거 자체라는 게 가능한가?
Q. 대체 판단중지라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하는거지? 판단중지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루토의 차크라, 원피스의 패기 이런 개념같아서 직관적으로 와닿지가 않음.
Q. 후설이 "학문과 철학의 이념에는 그 자체로 앞선 인식에서 그 자체로 나중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질서가 속한다."고 했는데, 데카르트를 까는 부분이랑 이 이념은 결이 유사하지 않나?
의식과 현상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절대적인 학문 기초를 세우겠다는게 얼탱이가 없긴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