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9장짜리라 한번에 다 안올라가네


앞에 두세장 올리고 뒷내용 궁금한사람 있으면 이어서 올릴게


<!--StartFragment-->

“xx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생일을 맞은 그를 축하하기 위해 그녀는 바쁜 주중 시간을 비워서 그와 만나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의 생일을 알게 된 팀장 덕분에 그의 생일 축하를 겸하는 회식이 생겨 그는 약속 시간보다 훨씬 늦어서야 그 자리를 빠져 나와 지하철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3개월 전이었던가. 저 멀리 지하철이 들어오는 불빛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때도 이랬었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둘만의 시간에 늦은 것은. 그래도 그녀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줬다.

언제부터인가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흔히 오래 만난 연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태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엔 그녀와 자신 사이의 감정은 대학생 때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제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예전과 달라졌을 뿐.

군 제대 후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그녀는 아직 신입생 티를 벗어나지 못한, 조용하고 순수한 모습이 어떠한 거름장치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투명한 모습을 소유한 대학생이었다. 누가 봐도 미인도 아니었고, 뛰어난 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남자 동아리원들 모두가 그녀가 괜찮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수즙은 건지 아니면 소심한 건지 모를 그 성격 때문에 쉽게 동아리원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해서 입방아에 쉬이 오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처음 만나게 된 신입생 환영회에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그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간단했다.

약속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간에 그녀 앞에 도착한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 앞에 앉았다. 조용히 앉아 문서를 보고 있던 그녀는 생긋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차라리 화를 내면 괜찮을 텐데 오히려 웃음을 지어주니 그의 마음은 더욱 저릿했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한 마음과는 다르게 입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처리해야 할 일 보고 있었어. 생일 축하해

20페이지는 되어 보이는 문서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그녀가 이제는 전형적인 회사원의 표본이 되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알 수 없다지만 그녀가 회사원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예전에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화장으로 가리려 했지만 쉽게 가려지지 않는 칙칙해진 피부와 눈 밑의 다크서클은 그에 대한 훈장처럼 보인다.

선물 하나 샀어. 만년필이야. 회사에서 글씨 쓰거나 서명할 때 품위 있게 꺼내서 쓰면 멋있을 거야.”

고마워

포장지에 쌓인 만년필을 보니 작가를 꿈꾸던 대학생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노트북이 비싸 싸구려 볼펜과 습작 노트를 항상 갖고 다니며 소설에 나오는 좋은 문구들을 닥치는 대로 적고 다녔다. 작가로서 성공해 싸구려 볼펜이 아닌 고급스러운 만년필로 사람들에게 사인해주는 미래의 모습을 꿈꾸며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글을 써내려갔던 인내와 고통의 시간이었다. 만년필은 생겼지만 작가는 되지 못했다. 그녀는 그 때를 기억할까? 기억한다면 좋은 기억일까 나쁜 기억일까?

옛날 생각 나? 나중에 작가 되면 만년필로 사람들한테 사인해주고 싶다고 이야기 했던 거.”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며 과거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아 그때 지하철타고 집에 가면서 이야기 했었던가? 재미있었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이야기했다. 지하철이 아니고 버스였었는데.

그게 벌써 한 8년 됐나? 우리도 벌써 나이 많이 먹었네.”

이제 글 쓰는 것은 아예 접은 거야?”

일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기도 하고 이제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고. 작가가 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모르던 어렸을 때 누구나 갖는 그런 꿈들 중 하나였을 뿐이야.”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야기하던 그녀가 이제는 먼 미래가 아닌 눈앞의 놓인 길만 보게 되었다.

그렇구나.”

그녀는 직장 이야기를 꺼냈다. 과장이 새로 왔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전부 체크하며 업무 처리를 하는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했다. 이전 과장은 업무만 맡기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이었는데 갑자기 정반대로 업무를 처리하려고 하니 더욱 스트레스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녀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는 갑자기 짜증이 확 몰려왔다. 자기 팀 과장과 팀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업무는 내가 가장 잘 아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귀찮게 만드는 스트레스 유발자들. 직장 상사들은 왜 직급이 더 높으면 당연히 자신이 더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생각할까? 몇 시간 뒤에 또 다시 그들을 봐야 한다니. 지긋지긋한 굴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며 집에 가야겠다고 했다. 그는 술기운이 올라 좀 더 앉아 있다 가고 싶었다.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며 자신은 조금만 더 앉아있다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먼저 갈게. 사랑해.”

활짝 웃으며 먼저 가는 그녀의 모습을 그는 지긋이 바라봤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열시 사십사 분. 친구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해서 사귄 지 벌써 20여 년이 훌쩍 지난 친구다. 그와 친구는 교내에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성격도 비슷해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래서 중고등학생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그 친구였다. 그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것도 그 친구 때문이었다. 으레 학창시절 교과서와 문제집만 들여다보는 일반적인 학생과 달리 그 친구는 틈틈이 책을 읽으며 그에게 다양한 작품을 소개 해줬다. 특히 그는 러시아 소설을 좋아해서 푸쉬킨이라든지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을 소개하며 러시아 소설의 작중 인물들의 이름이 어려워서 재미있다고 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 현실적인 제약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무언가가 확실히 되고 싶다는 직업적인 목표가 아닌,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는 친구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얽매이는 삶도 살아봐야 나중에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광활한 대지에서 어디로 나아갈지 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방랑자가 아닌, 불어오는 바람을 자유롭게 만끽하고자 하는 낭만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대학생 때 그의 집에 붙은 빨간 딱지는 그의 미래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빚을 갚기 위해 대학을 그만두고 뛰어든 현실은 그에게 고등학생 때의 생각이 치기어린 어리광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전까지 그는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부딪히며 하게 된 행동을 통해 생각이 만들어져 이제는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 작가를 꿈꾸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그에게 친구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난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어. 예술가는 가난한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데 그건 그 사람들이 실제로 굶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는 헛소리야. 기본적으로 먹고 살만한 수준이 되어야 작품이 생겨날 여지가 생기는 거지.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한다고?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단 배부른 돼지가 되는 쪽을 선택하겠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여러 방면으로 퍼져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깔때기처럼 한 곳으로 몰아넣는다. 과거에 가졌던 다양한 꿈들은 단순히 술자리에서의 추억담으로 남게 된다. 고작 안주거리로 삼기 위해 꾸어온 꿈인 것일까?

열한 시 십일 분. 평소 같으면 다음날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그는 아직도 자리에 앉아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모두들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지만 그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여 하나의 뭉치가 되고 그 뭉치는 웅웅소리로 그의 귓속을 맴돌았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누워서 바로 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밖에서 차들의 엔진소리가 그에게 파고든다. 60대정도로 보이는 남자 둘이다. 늦은 시간인데도 말쑥한 차림을 하고 들어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책상에 앉아 있는 자신이 눈에 보였다. 앞뒤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모두들 바쁜 걸음으로 걸어간다. 자신만 앉아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걸어간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각한다. 책상에 볼펜과 노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 것 같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째깍째깍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대기를 감싸고 있다. 그가 갑자기 노트를 덮고 일어난다. 그리곤 뒤편으로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멀리서 메아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눈을 떴다. 열한시 오십이 분, 카페 마감시간이라 직원이 그를 깨웠다. 그는 직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카페에서 나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열시 이십이 분.

월요일에 맡겼던 거 아직 처리 안됐어 이 대리?”

100페이지가 넘는 영어 문서를 주고 읽어본 뒤 중요부분을 요약하는 것이 이틀 만에 가능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과장은 재촉하기 시작했다.

빨리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거참 부탁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된 거야? 오늘 중에 보내줘.”

처리할 일이 산더미 같지만 과장의 재촉에 영어 문서를 읽기 시작한다. 오늘도 집에 일찍 가기는 틀렸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 다들 식사하러 갑시다.”

점심 식사하러 가자는 팀장의 말에 팀원들이 주섬주섬 옷을 챙기지만 그는 사무실에서 햄버거 먹으면서 밀린 일 처리를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팀원들이 모두 나가고 조용한 사무실. 잠시나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문서들은 그에게 그 조그마한 자유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밥 먹었어?”

그녀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서 먹고 왔다고 거짓말 했다. 만년필은 어떠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때서야 만년필이 생각났다. 아주 좋다고 그녀에게 말하며 가방을 열어 포장을 뜯었다. 대학생 때 갖고 싶었던 그 만년필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다행이다고 이야기했다. 통화가 끝나고 그는 만년필로 자신의 이름을 이면지에 써보았다. 글씨가 더 잘 써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섯 시 오십사 분.

팀장이 퇴근하겠다고 이야기 하고 팀원들도 짐 싸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는 갈 수 없다. 하루 종일 과장이 부탁한 영어 문서를 보느라 밀린 업무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있는 시간. 그는 덩그러니 앉아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학생 때 돈이 없어 지겹게 먹었던 도시락이었지만 이제는 시간이 없어서 도시락을 먹는다. 가난한 사람은 돈을 벌기위해 시간을 쓰지만, 부자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쓴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그 말이 떠오르니 자신이 가난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문득 졸업반이 되었을 때가 떠오른다. 졸업 후에도 계속 글을 쓰고 싶었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 취업 준비에 돌입해있었다. 반 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토론하기를 즐겨했던 동아리원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태도 변화였다. 그때 그가 느낀 것은 괴리감이었다. 자신과 함께 미래의 작가가 되기를 꿈꾸던 그들의 생각은 그저 막연하고 피상적인, 생각으로만 끝나는 몽상이었단 말인가? 반 년 전까지 그와 나누던 대화는 단순한 취미 생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건가. 혼자 바보같이 굴었다는 생각에 굴욕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도 역시 주위 환경에 순응하는 일반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 느낀 괴리와 굴욕은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고 의문이 의심으로, 의심은 곧 회의로 이어지며 그도 결국 다른 부원들과 마찬가지로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의 인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순탄한 삶이라고 볼 수 있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 즐거운 대학생활을 보낸 뒤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 철로를 벗어나지 않고 제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하는 기차와 같이 그는 전형적인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선택이 옳은 선택이라고 조금씩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쏟아지는 업무에 근무시간은 점점 길어졌지만 그만큼 통장은 무거워졌다. 주변에서 인정받으며 이곳저곳에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 그를 더욱 안심하게 만들었다. 과거에 갖고 있던 꿈은 점차 돈과 주변 시선에 묻혀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삶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니 이제는 다시 과거가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사람들이 보면 배부른 생각이라 느낄지 모르지만 지금 그를 힘들게 만드는 이 생각은 그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음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자친구였다. 이번 주말에 출장 가야해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알았다는 답장과 함께 그는 다시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