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Fragment-->

열시 이십이 분. 그는 회사를 나와 지하철을 타러 갔다. 타러 가는 길에 있는 자주 가는 술집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입사 동기 3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동기 한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는 동기들에게 향했다.

또 야근한거야?”

항상 똑같지 뭐.”

동기들은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직장 선후배들에 대해 시시콜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친구 한 놈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직장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동기 한 명이 자기 친구 이야기를 했다.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차에 치였다는 거야. 그래서 크게 다친 건줄 알았는데 2주 정도만 입원하면 된대. 저번에 문병 가서 이야기 하는데, 이놈이 웃긴 게 뭐냐면 일부러 차에 치였대. 운전자가 그놈을 자해공갈단으로 생각하고 친구한테 블랙박스 다 있다고 어디서 사기 치냐고 했더니 친구가 뭐라고 한줄 알아?”

동기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정말 죄송하다고, 119에 신고만 해주고 명함 주고 그냥 가시면 안 되겠냐고 그랬다는 거야. 자기 돈으로 병원비 내고 범퍼 찌그러진 거 보상 해드릴 테니 아무 일 없었던 듯 해달라는 거야. 미친놈이지. 알고 보니까 너무 쉬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회사를 쉬고 싶은데 핑계거리가 없으니 일부러 만든 거야. 아무리 쉬고 싶어도 그렇지 자기 몸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하는 걸 보면서 이놈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돌아버렸나 싶었다니까.”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쉬고 싶었던 거야?”

증권사에서 일하는데 어휴 이야기 들어보면 힘들긴 하겠더라. 코스피 말고도 중국, 미국, 유럽 증시까지 수시로 확인해야 해서 하루에 4시간 자는 거면 많이 자는 거래. 그래도 그렇게 하면서 돈 많이 버니까 자기 돈 내고 사고도 당하는 거지

동기는 한심하다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표정에는 약간의 부러움이 섞여있었다.

열한 시 오 분. 그는 휴대전화를 확인하고는 동기들에게 먼저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그는 동기가 이야기했던 그 친구의 행동을 떠올렸다. 그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지하철 2번째 승강장쯤에서 지하철에 치이면 크게 다치지 않고 쉴 수 있지 않을까. CCTV에 내가 의도적으로 떨어진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타고 내리는 역에는 스크린도어가 있었다. 그래서 주말에 스크린도어가 없는 지하철역 2-1 승강장에 서서 들어오는 지하철을 보며 뛰어내릴까 말까를 고민하며 긴 시간 동안 가만히 서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뛰어내리지 않았다.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쉬고 싶다는 생각보다 더욱 컸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해낸 동기의 친구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은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씁쓸함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발밑을 보니 2-1번 승강장이었다. 그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연말은 그만의 특별한 시기였다. 각종 신문에서 모집하는 신춘문예 소설에 당선된 작품들을 읽으며 과거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회상해보는 소소한 즐거움의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신춘문예 당선작이 실린 신문들을 사들고 점심시간에 아무도 없는 빈 회의실에서 작품과 함께 작가들의 인터뷰를 읽노라면 자신이 당선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어김없이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며 오전을 보낸 그는 샌드위치를 사들고 빈 회의실에 들어가 신문을 펼쳤다. 당선된 작가의 사진과 이름을 보니 어딘가 낯이 익었다. 편하게 의자에 기대고 있던 그는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한 번 사진과 이름을 보았다. 후배였다. 대학교 문학 동아리에서 몇 번 봤지만 나이차이가 있어서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던 친구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동아리에서 책 읽고 글쓰기를 반복하다가 작가가 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위해 잘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문예창작과가 있는 학교로 간다고 했었다. 얼핏 소문으로 들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주변에서는 모두들 그를 미친놈 취급했었다. 동아리원들 대부분이 겉으로는 내색 안했지만 대부분 학교의 네임밸류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동아리원들이 갖고 있었던 작가가 되겠다는 꿈도 어떻게 보면 학교의 네임밸류라는 든든한 보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좋은 대학교를 자퇴하고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보험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택했다. 당시 그는 후배의 결정을 듣고 결단력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동아리원들과 같이 의아한 생각을 가졌었다. 작가로서 성공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 험난한 가시밭길을 기꺼이 걷고자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그 용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패기만 믿고 부리는 만용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었고, 그도 그런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오늘, 그 용기는 만용이 아닌 대쪽 같은 기개로 탈바꿈되었다. 물론 신춘문예 당선이 앞으로 작가로서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걸었고 결국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다. 작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텅 빈 회의실에서 후배의 작품을 읽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한심했다. 왜 나는 그렇게 용단할 수 없을까 하는 나약함과 함께 후배에 대한 부러움이 뒤섞여 끝없는 자기비하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시 사무실 의자에 앉아 문서들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했다. 부러움, 시기, 질시, 시샘의 감정이 물밀 듯이 그의 가슴속에 끓어올랐다가 빠져나가면서 자조, 부끄러움, 모욕,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그는 좋은 선택을 했고 후배는 옳은 선택을 했다. 그는 고집대로 하다가 나중에는 후회하여 다시 놓여 있는 길로 돌아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고집을 앞세워 험난한 길을 개척해낸 개척자가 된 것이었다. 원래는 휴식을 취해야 하는 그 짧은 시간에 그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휴대전화의 진동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한 시 십이 분. 전화를 받으니 왜 사무실에 안 들어오냐는 팀장의 전화였다. 바로 가겠다고 대답한 뒤 그는 신문을 주섬주섬 들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샌드위치의 빈 용기만이 덩그러니 회의실 책상에 남아있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후배의 등단을 본 뒤 그의 생각은 점점 더 혼란에 빠졌다. 매일 봐야하는 문서들과 업무 파일이 혐오스러워졌다. 물론 그것들이 그에게 잘못한 것은 없다. 말도 못하는 문서와 파일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가 문제인 것을. 점점 더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 뒤에 닥칠 불안한 미래가 그의 생각을 억누를 뿐이었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부모님을 뵈러가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꺼냈다. 긴 시간동안 사귀면서 아직까지 그녀의 부모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은 갑작스러웠다. 아마도 슬슬 결혼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그는 여자친구의 제안이 부담스러웠다. 스스로도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결혼문제까지 생각하게 된다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주말에 만나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한 뒤 그는 집으로 갔다.

아홉시 삼십사 분. 오랜만에 일찍 집에 온 그는 의자에 멍하니 앉았다. 그녀와의 결혼이라. 자신의 옆에 그녀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온 탓인지 그는 그녀와의 결혼에 대해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결혼한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오면 그녀가 자신을 맞이해준다. 물론 그가 먼저 끝나 그녀를 기다릴 때도 있다. 서로 피곤하지만 웃음을 통해 서로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때로는 너무 피곤해서 밀린 집안일 때문에 말다툼도 할 것이다. 주말엔 그녀와 오롯이 둘이 한 공간에 앉아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침대에 누워 직장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자세히 이야기하는 그녀를 상상해보았다. 옆에 같이 누워있는 그도 역시 힘들었던 점을 그녀에게 하나하나 이야기한다.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요리를 해먹는다. 누가 요리할 것인지에 대해서 작은 다툼이 발생하고, 결국 그가 요리를 하게 된다. 요리하기가 귀찮으면 외식을 한다. 가끔씩 만나 큰 행복을 느끼는 지금과 같은 삶과는 달리, 매일이 일련의 작고 소소한 즐거움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행복의 무게를 잴 수는 없지만 그는 지금의 관계와 결혼 후 관계에서 느낄 행복에 대해 비교해보려고 애썼다. 하얀 벽을 멍하니 쳐다보며 생각하던 그는 이내 자신이 지금 하는 생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침대에 누웠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거리가 불현 듯 떠올랐다. 자신이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나와 결혼하고 싶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만이 현실에서 고군분투하고, 난 작품에만 몰두하면 되는 것인가? 그녀의 부모님은? 만에 하나 혹시 결혼을 다시 생각한다면? 앞으로 그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자 그는 짜증났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맘 편히 잠들고 싶었다. 휴대전화를 눌러 시간을 봤다. 열한시 이 분. 그는 지금까지 쭉 생각했던 것들은 뒤로 미루고 우선 내일 프로포즈 반지를 사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