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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열두 시 십오 분. 그녀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십오 분 일찍 왔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아직 시간도 안됐는데

그러는 오빠도 일찍 나왔으면서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본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한 뒤, 그는 테이블에 놓여있는 숟가락을 보며 여자친구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생각했다.

다음 주 쯤에 부모님 뵈러 가는 건 어때? 부모님도 오빠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슬슬 손주가 보고 싶으신가봐.”

...”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좋다고 한다면 그녀의 얼굴엔 웃음이 번지겠지. 만약 싫다고 말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가기 싫어?”

잘 모르겠어. 내가 요즘 생각할게 많아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거든. 그걸 먼저 정리하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당연히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요새 무슨 일 있어?”

..그게...”

그는 최근에 느끼는 여러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의 그녀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혼자 생각했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그는 머뭇거렸다.

다른 여자 생긴 거야?”

그녀는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던졌다. 그녀의 웃음을 보니 용기가 생겼다.

응 맞아.”

?”

그녀는 진짜로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농담이야. 사실은...”

그는 자신이 최근에 보고 느낀 것들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용기를 내어 직장을 그만두고 예전부터 꿈꿔왔던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다 줬지만 그와 그녀는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적막이 감돌았다. 주위에서 시끄럽게 웅성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음식을 바라보면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저번에 이제 글 안 쓰냐고 물어본 거였구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빠를 응원하고 싶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이 더 좋다고 생각해. 젊을 때는 누구나 한 번쯤은 원하는 미래를 그리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때의 꿈보다는 현실에 순응해 살아가잖아. 나 같은 경우도 그렇고. 오빠가 지금 일하면서 많이 힘든 건 알겠지만 그 많은 사람들도 다들 힘들어도 참고 견뎌내며 하루를 버텨 사는 거지.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인내심이 늘어나고 그러면서 점점 어른이 되는 거 아닐까? 스트레스가 심해도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고 있고 또 이제는 삶에 큰 변화를 주기에는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해.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힌 직장을 나오고 새로운 길을 가기에는 그 리스크가 너무 큰 거 같아.”

그녀가 쉽사리 자신을 응원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반대 의견을 들으니 그는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구나.”

자신이 계속 느껴온 내면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할 힘이 빠져버린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음식만 먹기 시작했다. 다시 적막. 음식을 먹으며 그를 본 그녀가 적막을 깼다.

정말 진지한 거야?”

“...”

나도 갑작스러워서 지금은 생각나는 대로 다 말했는데, 이따가 집에 가서 나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게. 그건 우선 저 멀리 던져버리고 오늘 재미있게 데이트 해야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그런 표정으로 있으면 나 삐진다?”

그녀는 예의 그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로 이야기했다.

그래. 미안해. 우선 오늘은 웃자.”

굳어진 표정을 피며 그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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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 사십오 분. 그녀는 집에 도착해 그에게 잘 들어갔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의자에 앉았다. 그의 갑작스런 생각에 그녀는 착잡했다. 데이트 하는 동안 그에게는 밝은 모습만 보여줬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계속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와 그녀의 삶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이제는 그것을 바탕으로 그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지만 그는 돌연 다시 안정보단 모험을 택하려고 한다.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있는 노트와 책들을 보며 그녀는 그와의 추억을 돌이켜본다. 그가 그녀에게 고백했던 그 순간, 그와의 첫 데이트, 같이 글을 쓰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던 수많은 시간들. 직장을 갖고 현실을 마주하게 된 후부터 가슴 한 켠에 꽁꽁 숨겨져 있던 추억들이 필름처럼 스르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옆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가 만약 진짜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내가 그와 결혼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문제를 혼자 전부 감당하면서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이어서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사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그가 없는 결혼 생활은 떠올릴 수 없었다. 대학생 때 그가 그녀에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내가 널 항상 웃게 할 수는 없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옆에 있어줄게.”

그렇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곁을 지켜줄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그와의 관계는 단순히 현실적인 벽에 의해 쉽게 허물어지는 모래성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 어떤 쇳덩이와 포크레인의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는 그들만의 요새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녀는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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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그 역시 집에 앉아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반대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보관하고 있던 프로포즈 반지 상자를 열고 왼손으로 반지를 꺼내 스윽 문질렀다. 과연 그녀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관철할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그녀와의 결혼과 작가로서의 길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머뭇거렸다. 눈앞에 책장이 보인다. 그의 책장 역시 노트와 책들이 꽂혀있었고, 공간이 모자랐는지 책장 옆에는 10년은 되어 보이는 누렇게 바랜 노트들이 쌓여있었다. 그의 눈이 한 소설책에 머물렀다. 그가 취업 준비를 해야할지, 작가로서의 꿈을 계속 가지고 가야할지 고민할 때 읽었던 책이었다. 5년도 더 전에 읽었던 책이라 내용과 주인공의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주인공이 돌연 처자식을 버리고 화가가 되기로 했다는 것뿐. 어떤 화가를 모티브로 쓰인 작품이었는데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 그 책을 읽고 받은 감명이 얼핏 기억났다. 책의 주인공은 결국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지만, 그는 곁에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길을 버렸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기로에 서게 되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자신도 그녀가 반대한다면 그녀 옆을 떠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작가가 되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렇게 그는 계속 그 주인공을 떠올리며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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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일주일 뒤, 그는 그녀와의 약속 장소에 미리 나와 있었다. 열한 시 십이 분. 열두 시 가 약속시간이지만 그는 일찍 나왔다. 혼자 가만히 있을 때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가 자신을 괴롭혔다. 오늘 만나면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데이트를 앞둔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안주머니에 휴대전화는 없었다. 대신 그녀가 생일 선물로 사준 만년필과 그녀에게 줄 프로포즈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는 만년필과 프로포즈 반지를 꺼냈다. 왼손엔 반지를, 오른손엔 만년필을 들고 천천히 번갈아가며 살펴봤다. 반지를 만년필에 끼어보았다. 딱 맞았다. 소설의 주인공이 갑자기 떠올랐다. 소설 속 주인공의 극단적인 선택을 이끈 용단은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을 버린 나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는 위대한 겁쟁이일 뿐이다. 저 멀리서 그녀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200m도 더 떨어진 거리지만 그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 그는 갑작스레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는 이제 50m 앞에 있다. 그렇다. 그는 위대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언제나 그녀의 옆에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 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마주봤다. 그녀 역시 그를 마주봤다. 그들은 서로 말없이 상대방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이 돌았다. 그녀 역시 말없이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가 말했다.

밥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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