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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올해 「길 위에서」를 읽을 계획은 전혀 없었다. 몇 가지 절묘한 우연이 나를 「길 위에서」를 읽도록 이끌었다. 하나는 내가 작년부터 밥 딜런에 심취했고, 올해의 언젠가 잭 케루악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글을 우연히 접한 것. 둘째로 자취방에 쌓아놓은 소설책을 다 읽어버렸는데 본가에 돌아가 책을 바꿔올 시간이 도통 없었던 것. 셋째로 학교 도서관에서 바닥을 보고 걷다가 서가의 낮은 층에 꽂힌 「길 위에서」가 보였고, 마침 책들 사이가 벌어져서 표지의 호통을 치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잭 케루악의 사진과 눈이 마주친 것. 그 기묘한 마주침 직후에 일어난 과정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길 위에서」를 빌렸다는 사실을 도서관을 나서고 몇 블록을 내려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내린 결정이었다.

「길 위에서」는 내가 이 책을 읽기로 한 계기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즉흥적으로 집필된 소설이다. 3주 동안 커피를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며 타자기로 36m 두루마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구글에서 사진을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전에 스탕달의 집필 속도를 보고 괴물 같다고 생각했는데, 케루악은 '괴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었다. 그렇다고 문장이 대충 쓰였느냐고 물으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사실 그 두루마리 원본에 비해 많이 윤문이 된 판본이 처음에 출간됐고, 번역 과정에서 더욱 윤문이 됐을 테니 「길 위에서」가 풍기는 날것의 분위기는 희석되거나 아예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나는 「길 위에서」에서 충분한 야성을 느꼈다. 단순히 샐과 딘이 벌이는 기행이 원시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야만적인 짓을 벌이며 길 위에서 느끼는 환희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들이 취한 모습을 보고 독자도 그대로 취하게 된다. 덧붙여서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문장들도 정말 많았다. 「길 위에서」가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분명 과언은 아닐 것 같았다.

이제 「길 위에서」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를 논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이 부분이 정말 난감하다. 「길 위에서」는 분명 이야기로 충만하지만 묘하게 사건의 알맹이라고 할만한 것들은 없다.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들이 풍기는 인상이 주도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제목도 '길 위에서'이고 소재도 '길', 즉 여로다. 그러나 딘과 샐의 여행에는 계획이라는 것이 없다. 충동이 그들의 나침반이다. "나는 미국의 어디든 갈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어. 왜냐하면 어디를 가건 다 똑같으니까. 난 사람들을 알고, 사람들이 뭘 하는지 알아. 사방에서 지그재그로 엇갈리는 끔찍하게 복잡한 상냥함 속에서 우리는 서로 주고받으며 돌아다니는 거라고." 이것이 작중의 디오니소스, 요즘의 캐릭터로 치면 조이보이 격인 딘의 태도다. 딘과 샐에게 길이란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길 위에 있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과 사건들을 만날 기회가 되고, 이 새로운 인연들과 즐거움을 쌓을 계기가 된다. 따라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 있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는 셈이다. "그냥 살아가는 거지 뭐. 인생을 음미하면서."

딘과 샐의 여정은 언뜻 보면 시원하고 재밌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여행은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기도 하다. 계획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순간에 돈과 차가 없는 일이 부지기수다.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여행은 불쾌하다. 빈약한 계획을 만회하기 위해 순간적인 기지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행동의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순간의 쾌락을 좇기 때문에 술과 약에 절어있기 일쑤며, 딘은 애인인지 파트너인지 애매한 짝을 부가 바뀔 때마다 반드시 바꾼다. 그것도 홀몸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만들어 놓고 바꾼다. 「길 위에서」의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호쾌한 태도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들을 본받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분명 미친 짓이다. 비트족이든 히피들이든 「길 위에서」에서 영향을 받은 자들이 도덕적 결함을 드러내며 우수수 무너진 것은 「길 위에서」의 내용만 봐도 당연한 결과였다. 딘과 샐 자신도 자신들의 여정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 하물며 실재하는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케루악도 「길 위에서」로부터 감명을 받은 비트족들을 보고 오히려 비트족의 허상을 여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길 위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샐과 딘이 건강하지 못한 길로 간 것은 사실이고, 그들 자신조차 그 벌로 주어진 삶의 질병에 빌빌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길 위에서 겪은 그들의 체험은 작게는 시민, 크게는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초월하게끔 만들었다. "나는 내가 오롯한 삶을, 하찮은 것들로 이루어진 내 육신의 껍데기 속 다른 많은 것들을 이루며 살아왔고 모든 꿈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샐이 평소에 이상향으로 여기던 멕시코에서 병들었을 때 떠올린 생각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잔인하게도 할 수 있는 일들 중에는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헛일들이 많고, 할 수 없는 일들 중에는 마음이 이끌리는 뜨거운 일들이 많다. 사소하지만 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해 보라. 길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한껏 크게 틀고 다니는 일, 정말로 아무런 속내나 계산 없이 길을 함께 떠날 친구를 찾는 일. 적어도 딘과 샐은 그런 경지에 발을 담가봤다. "내게는 오로지 미친 사람, 즉 미친 듯이 살고, 미친 듯이 말하고, 미친 듯이 구원받으려 하고, 뭐든지 욕망하고, 절대 하품이나 진부한 말을 하지 않으며, 다만 황금빛의 멋진 로마 꽃불이 솟아올라 하늘의 별을 가로지르며 거미 모양으로 작렬하는 가운데 파란 꽃불이 펑 터지는 것처럼, 모두 "우와!" 하고 감탄할 만큼 활활 타오르는 그런 사람만 존재했다." 과정이 어쨌든 자신의 생명을 찬란하게 발했다는 사실은 동경할 만한 일이다.

물론 샐은 결국 황홀한 여정 뒤에 현실로 돌아왔고, 딘은 끝까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똑같은 과오들을 계속 범할 것이다. 하지만 둘이 길 위에서 벌인 야성의 시간들은 '진정한 행복에 닿아 봤던 경험'으로서 평생 그들에게 온기를 내뿜을 것이다. 특히, 적어도 둘은 자기네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참한 인생에 목적을 두면, 예를 들어 돈이나 명예 같은 것들을 좇고 교양을 젠체하듯 유지하려고 하면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진정한 목적은 언젠가 뒷전이 된다. 샐이 뉴욕에 처음 돌아왔을 때 본 것은 타임스퀘어의 러시아워였다.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진정한 행복은 보지 못하고, 생업이 주는 삶의 '수단'을 목적이라고 기만하는 것도 자기 생명에 대한 부도덕이 아닐까? 물론 돈이라는 수단이 없으면 삶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진정 행복한 삶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걱정하기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거리를 계산하고, 오늘 밤은 어디서 잘지 고민하고, 기름값이랑 날씨, 목적지까지 어떻게 갈지를 생각하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어차피 도착할 건데 말이야. 정말 고민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이야. 뭐가 급한 것인지 제대로 된 판단도 못하고, 순진하리만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해. 저들의 영혼 말이야. 만인이 인정하는 고민거리를 발견할 때까지 절대 편해지지 못해."

샐과 딘은 삶의 주객전도로부터 자아를 정말 세게 지켰을 뿐이다. 물론 배덕은 그들의 삶을 망가뜨렸다. 샐 자신도 "우리의 진짜 인생이, 진짜 밤이, 그 지옥이, 무의미한 악몽의 길이 거친 광기와 방탕으로 가득했단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회고한다. 그런데 이들의 길이 끔찍하기는 했어도 이 문장에서 초점은 '진짜'라는 단어에 있다. 길 위에서 둘은 스스로를 해치긴 했어도 둘은 정말 충실하게 자신의 진짜 인생을 살았다. 「길 위에서」를 통해 굳이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면, 둘의 도덕적인 탈선은 배제하고, 둘이 길 위에서 허울 없는 만남과 의지에 따라 벌인 사건들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던 '진짜 인생'을 구현해낸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샐과 딘은 무책임한 멘토다. 하지만 모든 것에서 목적을 찾는 우리네 습관적인 사고를 내려놓고 그들이 목적 없이 떠난 길 위에서 자아를 해방하여 얻은 쾌감과 우수에 동화한다면 정말 좋은 체험이 되리라 확신한다.

슬슬 글을 마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딘과 샐은 다시 도서관에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책을 굳이 소장할 생각은 없다. 즉흥적으로 만났던 책인 만큼 애착에서 우러난 계획으로 이 책을 소장한대도 두 번 다시 이 즉흥적인 독서에서 얻은 감성을 느끼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언젠가 비슷한 우연이 찾아온다면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걸로 샐과 딘의 여정에 대한 감상은 마무리하겠지만, 소설이 끝나고도 딘은 방랑을 반복할 것이고, 샐도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로 남아있다. 나 또한 「길 위에서」를 읽고 느꼈던 '진짜 길'로 언젠가 새어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은 지금 내 앞에 놓인 길이나 충실하게 걸어 보려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 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