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맞습니다
게을러서 독후감을 계속 미뤘더니
The Ghost of Frederic Chopin
Eric Faye
Sam Taylor 번역
프라하, 20세기 말.
껄끄러운 사이의 편집장이 식사를 가장한 회의시간을 갖자고 요청한다.
전여친은 환승 연애를 했다. 편집장에서 루드빅, 자신으로.
당연히 루드빅에게 제 상사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앙심을 품었다 해도 말이 되는 상황이었으니.
그런 상사가 루드빅을 콕 집어 러닝타임 40분짜리 다큐 프로젝트를 맡기겠다고 한다.
아무래도 좆되라고 꽂아 넣는 것 같다.
정계, 비리, 범죄자... 목숨줄이 간당간당해질 법한 주제들을 지레짐작하던 루드빅에게 편집장은 말한다.
'베라 폴티노바'라는 이름을 들어봤느냐고.
이 사기꾼의 가면을 루드빅, 자네가 벗기길 바란다고.
루드빅에게 낯선 인물, 베라 폴티노바는 최근 음악계에서 심심찮게 반응을 얻고 있는 "작곡가"였다.
베라는 자신이 프레데리크 쇼팽의 귀신과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통뿐만 아니라, 쇼팽의 사후 작업물을 대필까지 해 준다.
말하자면 고스트 작곡 왕인 셈이다.
그저 헛소리로 치부할 법하지만 음악계에선 의외로 베라의 주장을 밀어주는 전문가들이 수두룩했다. 이유는 베라가 음악적 배경이 거의 없는 아주머니였기 때문이었고, 그런 아주머니가 써낸 작업물은 무지한 사람이 썼다기엔 신비하게도 쇼팽의 음악적 스타일을 잘 품고 있었다.
베라 폴티노바는 또한 꽃무늬 벽지 아파트에 사는 은퇴한 급식 아주머니로, 온화하고 얌전한 성정의 인물이다. 소박한, 무해한 일상을 살아간다.
다 뒤진 쇼팽 및 몇몇 거장 작곡가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사후 작업물에 손을 빌려주고 있다는 특이사항이 있긴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베라는 그냥 귀여운 옆집 할머니에 불과하다.
이런 음침한 구석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베라의 삶에 루드빅은 온갖 폼을 잡고 품을 들여 굳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중립기어를 모르는 루드빅은 책 초반부터 베라에게 일찌감치 '혐오스러운 사기꾼'이라는 낙인을 찍어둔다. 확증을 위해 감시, 도청, 무단침입까지 서슴 않는다.
심지어 감시를 위해 전 정부 비밀경찰 출신 사설탐정을 고용한다.
집-슈퍼-집-슈퍼 동선이 전부인 귀신 보는 할머니 상대로 참 과한 행위 아닌가?
루드빅의 마음속은 책 초반부터 피날레 직전까지 베라를 향한 비이성적인 증오로 가득하다.
작가는 주인공의 편집증적 행보를 통해 소련 치하, 불신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의 단면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생존을 위해 돌멩이도 의심해야 했던 시절을 겪은 사람들을 대표하려고.
근데 루드빅 인마 적당히 해야지.. 걸핏하면 몇 페이지씩을 소비해가며 미친 사람처럼 베라 할머니를 미워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면 이걸 내가 왜 받아주고 있냐는 생각이 절로 든다. 200페이지가량의 분량인데, 여기서 100페이지 다이어트를 시켜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소설이다.
베라의 평온함과 루드빅의 과함이 주는 대비는 코믹한 잠재력이 있다. 책 속 인물들에 가벼움을 부여하라는 게 아니다. 작가더러 배꼽 굴러가는 문장을 쓰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작가 자신조차도 '내 글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묵직해야 돼' 같은, 루드빅스런 강박을 가지고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가끔은 독자에게 윙크하듯 재치있는 문장을 간간이 뿌려둘 수도 있지 않은가.
내 개인적인 취향에서 비롯된 트집이다...
아니 근데..
베라가 쇼팽이랑 소통할 수 있는지 증명하는 법은 간단하지 않은가? 도청까지 안 가고 합법적이게.
1. 베라에게 안대를 착용시킨다.
2. 쪽지에 숫자 영문자 특수문자를 조합한 비밀번호를 적는다.
3. 쇼팽에게 비밀번호를 낭독하라고 명령한다.
4. 베라에게 물어본다, 쇼팽이 뭐라고 하덥니까?
5. 비밀번호 못 깨면 이거이거 사기꾼인 거지
이게 어렵냐 루드빅아
참고로 베라는 '로즈메리 브라운(Rosemary Brown)'이라는 실 인물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다. 나무위키 문서도 있으니 궁금하다면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파견자들
김초엽
작가의 이름을 자주 들어봤으나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는 굉장히 좋아하고 누군가는 굉장히 싫어하는,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인 것만 알고 김초엽의 파견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 100페이지 정도를 읽었을 때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까도 빠도 억지로 가져다 붙여도 안 붙을 것 같은 무난함과, 뒤돌아보면 잊힐 것 같은 내용, 문장들이었다. 쉽게쉽게 읽히는 글이라 상업적으로 성공할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공항에서 사서 몇 시간 머리 비우고 가볍게 읽을 법한 부류의 책으로 보였으니.
책을 덮고 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댄 브라운, 콜린 후버가 좆으로 보이는가.
혹평 조까 내 책 존나 잘 팔려~ 응 나 셰익스피어 안될 거야 거장 안 할래~대저택 살래~
마인드로 펜을 잡는 작가들, 솔직히 리스펙한다. 적어도 헷갈림 없이 자기가 걷고자 하는 길을 당당히 걷고 있지 않은가?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웹소보다 약간 더 퇴고 된 글을 쓰면서 김초엽은 이 글이 그 이상의 품질을 가진 줄 착각한 것 같다.
작가 본인조차도 자신의 글의 방향성을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는 책이 내 취향일 리가 없다.
파견자들은 먼 미래를 배경으로 두고 있는 SF 장르 문학이다.
먼 미래, 지구는 외계 괴생명체, 범람체에 잠식당해 인간은 지면 아래로 기어들어 가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인간은 인간답게 지하에서도 화폐, 계급, 도시를 구축해내 지상에서의 삶을 비슷하게 구현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지상의 탈환-본래 서식지로 복귀, 같은 갈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충족되는 게 거의 불가능한 미래로 보였지만.
범람체란 것들은 알면 알수록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종류의 생물이 아니었다.
범람체와 접촉하는 모든 건 본래의 모습을 잃고 괴기하게 변화했다. 인간이라고 면역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지구의 균류와 비슷한 범람체는 들러붙은 숙주의 정신, 신체를 가리지 않고 깊이 뿌리내려 굴복시킨다. 이렇게 범람체에 잠식당한 인간은 광견병 걸린 개처럼 날뛰게 된다.
자, 여기서 그저 곰팡이인 줄 알았던 범람체가 갑자기 인간에게 말을 건다.
"아 우린 니들이 지성체인 줄 몰랐지ㅋ 니들 땅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고멘ww 아니 근데 지배하는 게 우리 종족 본능이라ㅋㅋ니들이 이해해줘야 되는 부분 아닌가? 응? 야 눈깔 힘 안푸냐? 씨발 누가 다 집어 삼킨데? 아 본능이라고~ 니들 숨 쉬고 똥 싸는 것 같은 본능이라고~ 이해 못 해? T야? 좋은 말 할 때 화목하게 좋게좋게 공생 좀 하자고 친구야
야 근데 죽는 거 무섭다고 호들갑 좀 그만 떠셈 죽는 게 뭐 대수라고ㅋ"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다.
싸이코 아님?
공생하자는 저쪽은 이미 인류를 포함한 지구의 동식물을 짓밟았고, 지배했고, 조종하고 있기까지 한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작가는 이런 범람체들과 공생을 추구하는 책의 인물들이 절대적인 선,
범람체 새끼들 만행 더는 두고 못 본다, 비윤리적인 방식을 써서라도 저 싸패집단 박멸시키겠다, 의 주장을 가진 쪽은 그저 좆간으로 땅땅 판결을 내린다.
다시 풀어보겠다.
내 땅 식민지 삼겠다고 들쑤시는 유럽인한테 창 던지는 원주민들은 악마로 분류해야 옳은 거임?
백돼지들한테,
"ㅎㅎ발밑 땅이 니들이 죽인 우리 사람들의 피로 물들어 검붉어졌지만 아이고 악수 받으십쇼 아휴 지배하시는 게 본능이니까 걍 이해하고 저희가 정복당해야죠 암요 여기 여태까지 저희 살던 방식 다 집어 던지고 님들의 일부분이 되겠습니다요ㅎㅎ"
다 포기하고 굽실거려야 악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임?
싸이코 곰팡이 빅브라더한테 "공생"당하느니 이기적인 좆간 하렵니다, 저는.
이야기가 공생을 '선'이 아닌 하나의 생존 전략으로 분류할 기미라도 보였으면 좀 나았을 텐데.
공생을 가르치기에 범람체와 인간 관계는 적합하지 않다.
범람체는 인간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 아니다.
압도적이 지배자와 그들을 피해 숨은 난민. 그런 관계인데,
여기서 공생이라는 교훈을 주섬주섬 꺼내는 게 말이 되는가?
더불어 개인주의의 위험성, 환경오혐 같은 주제도 끄트머리에 가서 갑작스레 이어 붙인다.
다 너무나도 좋은 주제들이다. 다만 작가가 때려 박는 여러 교훈이 이 글에는 알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SF, 특히나 그 중 디스토피안 SF란 장르가 가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현실과 조금은 동떨어진 세계에서 현재의 문제(구체적일수록 좋다)를 다루며, 우리의 세계가 흘러갈 수도 있는 방향에 대해 경고를 줄 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 오웰, 헉슬리, 심지어 헝거게임 시리즈를 보면 이런 장르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SF를 쓰기 위해선 치밀해야 한다.
은유와 촘촘한 구성, 섬세한 장치로 강력한 경고를 반복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공생과 초점이 어긋난 이야기를 써 놓고, 막판에 가서, '공생을 거부하는 인간 역겹다' 라는 결론을 일방적으로 들려주는 글은 급조된 프로파간다로 읽힌다, 문학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 이런 캐릭터들을 던져놓으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까~식의 즉흥적인 문장들로 이뤄진 느슨한 책은 이솝우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디스토피안 SF는 1984가 될 수도 있지만, 반면 이 장르는 사실 그냥 심심풀이 재밌는 가벼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게 뭐 나쁜가. 저런 책이 있으면 이런 책도 있는 거지.
균류 외계인들이 정복한 지구에서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퀴어 탐험 성장 소설.
여기에만 집중해서 썼더라면 훨씬 완성도 있는 책이 아니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만 하나를 덧붙이자면, 오우 너무 길어지긴 했는데,
제목이 '파견자들'이다.
만약 소방관들'이 제목인 지구 소설책이 외계 행성에 출판됐다고 보자.
'소방관들'은 주인공 철수가 지구의 유일한 초능력자로서 매우 특별한 소방관이 된, 철수 한 명의 성장에 관한 내용이 빼곡한 소설이다.
지구의 소방관들이 이 직업과 가진 관계에 대해 다루는 여러 다른 평범한 소방관들의 시각은 거의 비추어지지 않는다.
이 책이 외계인들에게 '소방관들'이란 제목으로 팔려도 되는 건가?
'소방관 철수' 란 제목이 더 알맞지 않나?
해리포터 시리즈가 '마법사들'이 아닌 주인공 이름을 제목에 박아둔 거엔 다 이유가 있다.
너무 트집을 잡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책 내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적어도 제목 하나만큼은 좀 고심해서 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여러모로 덜 다듬어진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건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이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취향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Troubling Love
Elena Ferrante
Ann Goldstein 번역
페렌테의 첫번째 소설로 알고 있다. 글을 진짜 잘 쓴다.
독붕이들은 책을 어떤 방식으로 고르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난 (아마도) 꽤나 대중적인 -뒤표지 줄거리 확인, 책 초반 2~3장 확인- 방법을 보통 쓴다.
그러려고 뽑아든 책을 그 자리에 서서 30페이지가량 읽었다.
모든 표현이나 상황들이 다 이유가 있게 쓰여 있는 게 느껴져 흥미가 안 갈 수 없었다.
공을 들여서 쓴 글을 읽을 땐 딱히 내용이 재미가 없더라도 글을 읽는 데에서 접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델리아의 엄마, 아말리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엄마의 시체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고급스럽고 과감한 속옷만 걸친 상태로 발견됐다.
엄마의 죽음을 알게 되므로 시작되는 소설은, 델리아가 엄마의 마지막 나날들을 추적하느라 온 나폴리를 뛰어다니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페렌테가 그려내는 나폴리는 끈적이고 갑갑하다. 마치 사람을 옥죄듯 조여 온다.
어딜 가나 눈길이, 살갗이 탐욕스레 얽혀온다. 지독하게, 끈질기게.
이런 나폴리가, 이 나폴리 속에 있던 엄마의 남자들이 엄마를 죽게 만들었다.
델리아에게 나폴리는 어린 시절을 뜻한다. 벗어났고, 묻어두고 있던 어린 시절을. 책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 상황을 오고 가며 진행되는데 이 기억은 델리아의 시선으로 보는 케케묵고 혼란스러운 나폴리와 흡사하다. 이 기억을, 나폴리를, 델리아는 달려서 헤집는다.
책 속에서 델리아는 자신이 마치 "an aged A.lice in pursuit of the White Rabbit" 같다고 한다. 시계토끼를 쫓는 다 자란 앨리스.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운 환상적임이 만연한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어린아이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상을 나타낸다.
페렌테의 질 좋은 문장으로 쓰인 나폴리는, 어른이 된 델리아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린 날들의 도시였다.
델리아의 뜀박질은 분명 엄마의 등을 떠민 직접적인 원인인 인물들을 쫓았으나,
골목을 틀수록, 깊게 들어갈수록 마주하게 되는 건 비이성적이고 불쾌한 기억, 진실, 나폴리였다.
과거에서 너무 멀리 와 버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였으나, 어른이 되었기에 이해할 수 있다. 엄마의 죽음을. 이곳에서 더는 숨을 쉬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여인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터였다.
눈을 뗄 수 없는 필력을 가지고 있다. 글 잘 쓴다, 외 다른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첫 작품인데.
다만 이 책엔 여러 무거운 주제가 응집되어 있어 되려 직접 와 닿는 목소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바쁘고 조잡하게 이 주제 저 주제로 넘어간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억지 훈계의 기미도 안 보였고. 길이도 딱 적절했다. 완성도가 그냥 높다.
그러나.. 이건 막눈 일개 독자의 생떼일 수도 있는데... 퇴고가 지나치게 된 느낌이다. 감정적인 교류가 이뤄져야 전해지는 부분도 있는 법인데, 이 글은 너무 번듯하다.
Penguin Lost
Andrey Kurkov
George Bird 번역
'Death and the Penguin'의 후속작이다. 작년 말 굉장히 재밌게 읽어서 이 책도 기대를 안고 읽었다. 먼젓번 책만큼은 아니었으나 즐거운 독서였다.
쿠르코프는 독특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다. 노상 가만히 조용히 있는데 말 시키면 하는 말마다 어딘지 재치있고 웃긴, 근데 엉뚱하기까지 한 친구를 보는 기분이다.
소련 직후의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배경으로 이 시리즈는 펼쳐진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 빅토르는 문단의 높은 턱을 넘지 못하고 신문 부고란에 실릴 사망 기사(obituary)를 작성하는 무미건조한 직장인이 되었다. 특이하게도 빅토르는 진짜로 죽은 사람들의 사망 기사를 쓰지 않았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권력자들의 사망 기사를 미리 적어내는 게 빅토르의 일이었다.
이거 왜 시키냐는 빅토르의 물음에, 미리미리 해 둬야 딴 신문사들 제치고 1빠로 내보낼 수 있지 않겠냐고 편집장이 설명한다. 훗날 빅토르는 자신의 기사들이 사실 히트 리스트로 쓰였다는 걸 알게 된다.
의욕과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 주인공, 빅토르. 하고 싶은 일과 하는 일이 들어맞지 않는, 어딘지 어긋난 삶을 살고 있다. 심지어 전혀 관계없는 음모에 개인의 의지는 뭉개진 채 가담되고 만다.
빅토르는 미샤라 불리는 펭귄 한 마리를 대뜸 입양한다. 남극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빅토르의 아파트에서 살게 된 펭귄이라 자연스러움이나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곧이어 객식구가 하나 더 추가된다. 친구 딸, 다섯 살 소냐가 빅토르에게 맡겨진다. 권총 한 자루와 두꺼운 돈뭉치와 함께.
소냐를 돌보기 위해 고용된 보모, 니나는 빅토르의 여자친구 비슷한 사람이 된다.
엄마 아빠 딸 애완동물로 이뤄진 얼핏 보면 평범한 가족이 탄생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들은 가족도 아니고, 평범하지도 않다.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자들이 가족 흉내를 내며 어떻게든 삶을 연명한다.
당시 우크라이나라는 나라 자체와 그 속의 사람들 처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세계 사회 속에서 우크라이나가 느끼는 어색함, 고립을 은은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쓸쓸함을 배경 삼아 책은 일종의... 순한 맛 마초 스릴러를 보여준다.
묘한 재미가 있다. 작가의 냉소적인 시각으로 쓰였으나, 이걸 풀어나가는 화자는 어떤 천진한 단순함을 가지고 있다. 근데 마초스러움을 곁들인...
마치 마피아에게 길러진 어린아이가 전해주는 하드보일드 이야기처럼 읽혔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책의 감상이다.
Penguin Lost는 이 느낌을 그대로 이어간다.
펭귄 미샤가 상징하는 바는 정확히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미샤는 빅토르의 내면을 표현하기도 하고, 이방인이 된 국민들과, 집단에서 떼어진 소수를 뜻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대변하기도 하고, 침묵되어 휘둘리는 개인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미샤를 모종의 이유로 잃게 된 빅토르가 미샤를 되찾아 본래 서식지에 데려다 놓는 과정을 따라가는 게 이번 책의 줄거리이다.
미샤와 빅토르의 여정 중, 자신의 위치를 아직 찾지 못한 인물들을 여럿 만나게 되는데, 이들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간다.
연속되어 전해지던 쓸쓸함 위로 미약한 희망이 덧입혀진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존재들에게도 제자리는 있다는 희망이.
그러나 미약하다. 그들의 나라에선 이 희망이 그저 소망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쿠르코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 상황이 미샤와 빅토르의 모든 여정에 들어서 있다.
폭력적이고 혼란스럽다.
제 자리를 찾은 인물들만 봐도 당시 우크라이나의 그늘을 볼 수 있다.
권력을 손에 넣고 싶었던 양아치는 감투를 쓰게 되고, 깡패는 거짓으로 나랏돈을 받아먹으며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어긋난 자들이 어긋난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빅토르 또한 미샤와 미샤의 서식지를 되찾아 주기 위해 비정상적인 일들에 참여해야만 했다.
질서를 잃은 차가운 나라에서 온건한 삶은 좌절된다, 작가는 담백한 문체로 알려준다.
그러나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정치적 의미나 작가의 은근한 메시지가 아닌,
소냐다.
딸내미, 소냐. 귀엽다.
쿠르코프는 대사 자체를 잘 쓴다고 느꼈는데(인물 설명 없이 대사로 캐릭터성을 잡는 능력이 있다), 그 중 소냐의 똘똘한 일침들이 눈에 들어왔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딱 그 나이 때 아이답게 쫑알거린다.
같은 점보단 다른 점이 많긴 하지만.. 읽는 줄곧 '스파이 패밀리'가 떠올랐다. 심지어 애기 이름도 비슷하다, 아냐 소냐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김훈 작가의 특징이 뭔가. 글에서 분비물, 정사, 식사, 악취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 아니겠는가. 이 책은 그... 정도의 고삐를 놨다. 말 페티시를 가진 것들에게 아주 적합한 책이 아닐까 싶다. 퍼리 말 말고, 진짜 말.
(범상찮은 부분들을 하이라이트 해 뒀다)
등장인물 소개를 보면 게 중 반은 인간이고 반은 말이다.
사실 말이 주고 인간이 반찬이라 봐도 된다.
그러니 당연히 말의 교미 장면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말새끼들이 접붙이면서 뭐에 꼴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와중 엉덩이에서 흐르는 변 색이 어떤지 존나게 감사하게도 세세하게 알려준다. 본인은 그런 페티시가 없어서 낯뜨거웠다.
김훈 작가의 또 다른 특징은, 내 생각엔, 글로 인간의 덧없음을 표현하길 좋아한다는 것이다. 오줌 똥 섹스 등등을 쉼 없이 나하는 이유도 이 덧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흐름보다 이 덧없음을 끊임없이 핥는 성향 탓에 작가 호불호가 갈리는 거로 추측한다. 누구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난 불호쪽에 서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몇 달 전 읽었던 '흑산'보다 좋았다.
김훈의 특징과 이 책의 컨셉이 잘 맞아떨어진다고 느꼈다.
이 책은 소실된 말, 이야기들의 기록이다.
인간의 덧없음으로 사골을 끓이기에 이보다 더 괜찮은 컨셉이 어디 있을까.
인간이 말 등에 올라타는 법을 터득해 나가던 아득한 옛적이 배경이다.
옛 세상을 상상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앗아간다.
살아남기 위해, 정복하기 위해, 위대하기 위해, 야만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 지금의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잔인하고 치열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서로 잡아먹기 위해 흘린 피와 살점이 낭자하다. 하지만 결국 모든 건 역사의 뒤안길로 흩어진다. 전쟁터는 초원이고, 피는 초원을 물들이지 못하고, 강물은 길을 바꿔가며 계속 흐른다. 꽃에 부여한 설화는 잊히나 꽃은 여전히 피어난다. 영웅의 위용을 찬양하던 이야기도, 한 국가의 기근이 되는 전설도, 소문, 기록, 아이들이 밤낮없이 부르던 노랫소리. 모든 건 시간이 지나 전부 초원 바람 사이로 사라진다.
김훈은 이 희미해진 메아리를 휘어잡아 잠시 우리 앞에 가져다 둔다. 이 이야기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웅장함을 넘는 소멸을 강조한다고 난 느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덧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곤가는 끝없는 땅 위로 끝없이 퍼져 나가는 노래라는 뜻이다. 곤가는 사람의 노래라기보다는 사람과 세상 사이의 소리였다. 초원에서 아이들이 곤가를 부르던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곤가는 곧 사라졌고, 초원을 풀벌레 소리로 가득 차서 수천 년이 흘러갔다." - 페이지 모름 ㅈㅅ
주제는 공유된 말의 시점을 통해 또한 표현된다.
말은 인간과 같은 전쟁에 참여해 전쟁과 폭력의 참상을 목격한 증인(증마?)이다. 등에 태운 장군의 숨소리, 땀내, 감정, 동요, 모든 걸 같이 경험한다. 그러나 전염되지 않는다.
왜냐.
말들은 육욕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씨발 니들은 싸워라 난 교미하련다~ 식의 멋진 사고방식을 가진 짐승들이다.
주어진 본능에 충실한 짐승의 시선으로 본 인간은 참으로 덧없다.
아득바득 저래 봤자 인간 또한 짐승이고, 말과 다름없는 쾌락을 느끼고, 죽으면 고깃덩이고, 모든 건 어차피 멸망할 텐데.
인간이 이끄는 길을 거부하고 말은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이 길의 끝엔..
로맨스가 있었다.
자, 이 책의 정체를 밝히겠다. 이 책은 사실 말 두 마리의 눈물겨운 로맨스 소설이다.
"말 둘이 윗입술을 말아 올리고 입을 마주 댔다." -260pg
다짜고짜 아랫도리부터 맞대고 보는 김훈표 인물들 사이에서 애틋한 키스신이 떠오른다. 이게 로맨스가 아니면 뭔데
뭐 아무튼 글을 졸라 잘 쓴다. 자신이 그리는 세상 속으로 독자를 내동댕이치는 재주가 탁월하다. 내 딸리는 상상력을 쥐어짜 내지 않아도 된다. 그냥 읽다 보면 알아서 펼쳐진다. 텁텁한 공기, 맑은 하늘. 바짝 마른 말똥은 억센 초원 위를 굴러다니고, 말발굽 소리에 맞춰 일어나는 흙먼지.
김훈 작가의 특별한 장점이 더더욱 반짝이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자신이 타고 가는 이야기의 허황됨을 반복적으로 일러주기 때문에 읽는 독자도 이야기 진행에 조바심을 낼 의욕을 잃게 된다. 덕분에 김훈 작가의 문장과 세상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읽으면서 지긋한 신선이 이젠 흐릿해진 옛 기억을 간달프 목소리로 읊어주는 상상을 했다. 열연해준 내 머릿속의 작은 배우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잘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김훈 작가의 글은 내 취향이 아니다.
Where Reasons End
Yiyun Li
읽지 말아야 할 글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기장 같은 굉장히 개인적인 기록을 읽는 느낌이었다.
16살짜리 아들이 몇 주 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작가인 어머니는 작가의 방식으로 슬픔을 곱씹는다.
16년 전 아들을 잉태하여 출산했듯, 이번엔 종이 위에, 글로써 아들을 탄생시킬 것이다.
꿈에서도, 상상에서도 도무지 나타나질 않으니 문장에서 네가 드러나게 할 수밖에.
그렇게 화자는 죽은 아들과 필담을 나눈다. 죽음의 이유를 파헤치기보다는 그냥 우리 아들이랑 일상적인 대화가 고파서.
픽션으로 분류된 책이다. 책 속 아들의 이름은 만들어낸 이름이다.
그러나 책에 담긴 감정은 픽션으로 분류할 수 없다.
왜냐면 이 책의 저자 또한 얼마 전 자살로 죽은 16살이었던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늪 같은, 짙은 슬픔이 가득하진 않다. 오히려 건조하다.
괜찮아 보이려고 노력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지어낸 필담이래도 아들 앞이니까, 엄마로서 무너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면이 이 건조함으로 표현된다.
그러다가 가끔 한 번씩, 굉장히 고통스러워 하는 작가의 속마음이 거세게 내비쳐진다.
뭐랄까, 이런 류의 책은 이렇다저렇다 말하기가 쉽지 않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슬픔으로 이루어진 내용에 뭐 타인인 내가 뭐라고, 아무리 인터넷 한구석이라지만.
전반적으로 작가의 노련함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글이 번뜩이는 책이었다.
읽다가 목이 메는 부분도 꽤 있었다.
그러나 내용/문장이 아닌 책의 완성도로 봤을 땐,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출판을 왜 했나, 의문이 드는 책이었다.
사람마다 슬픔을 살아내는 방법은 다 다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감정을 그림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감정을 음악으로 흘려보내기도 한다.
이건 글 쓰는 게 습관인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맞닥뜨렸을 때 본능에 따라 키보드를 두들겨 만든 글 같았다.
그렇게 쓰임으로써 제 임무를 이미 다 완수한 글을, 이제 생판 타인에게 읽히기까지 하라며 파묘해 등을 떠민다.
슬픔을 종이 위에 표출하는 작가의 심정은 백퍼센트 이해가 간다.
근데 이걸 세상에 노출한 의도는 솔직히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들의 성격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딱 16살짜리 다운 성격이. 어머니들의 사랑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미안한 말이지만 딱밤이 약간 마려운 밉살스러운 사춘기 소년이다.
아무리 봐도 내수용이다.
아들을 실제로 알았고 기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만 나눠주면 좋지 않았을까
달에 적어도 고전(적어도 50년 전 출판된 유명한 픽션) 한 권, 비문학 한 권을 읽는 게 올해 목표였다. 보시다시피 장렬하게 실패했다. 시도조차 안 함
매달마다 독후감을 쓰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제가 초등학생 때 방학 생활 계획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짜긴 했거든요 5분 단위로
실천이 없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던데 이 정도 한결같음이면 200세 시대의 메타를 열 선구자가 아닐까 의심된다.
그래도 2월 독후감은 존나 늦긴 했으나 쓰긴 썼으니 새벽기상-냉수마찰-만화시청 일정 개무시하고 늦잠 쳐 잔 애새끼 시절보단 발전한 거 아님?
별 두서없는 독후감이라서 죄송하고 만약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십쇼
안 읽어봤지만 굿
재밌게 읽었어
반만 읽었지만 개추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