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으로, 언어의 격하에 대한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예기치 못한 보상은 문학의 출현이다. 이 경우에 문학은 그러한 자격을 갖춘 것으로 한정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문학'이라 부르는 언어의 형태는 단테로부터, 호메로스로부터 서양 세계에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에서 고유한 존재 방식이 '문학적'인 특별한 언어는 최근에야 독립적으로 다루어진 것처럼, 문학이란 말도 최근의 것이다. 19세기 초, 즉 언어가 대상으로서의 밀도를 갖추고 지식이 언어에 속속들이 스며드는 시대에, 문학이란 말은 접근하기 어렵고 탄생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고 순수한 글쓰기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독자적인 형태로 다른 곳에서 재구성되었다. 문학은 문헌학에 대한 부인(否認)이다.(그렇지만 문학은 문헌학과 쌍을 이루는 형상이다.) 즉 문학은 언어를 문법에서 적나라한 말하기의 힘으로 귀착하게 하고, 야생적이고 강압적인 말의 존재와 마주친다. 번거로운 절차로 인해 굳어 버린 담론에 대한 낭만주의의 반발에서 말의 무력한 힘에 대한 말라르메의 발견까지, 19세기에 언어의 근대적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문학의 기능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다. 이 본질적인 상호 작용의 배경에 비하면 나머지는 그저 효과에 불과하다. 문학은 관념을 재현하는 담론과 갈수록 더 구별되고, 스스로 극단적인 독자성 속으로 틀어박히고, 고전주의 시대에 문학을 유통하게 할 수 있었던 모든 가치(취향, 즐거움, 자연스러움, 진실)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이 모든 가치의 유희적인 부정(否定)을 보장할 모든 것(파렴치한 것, 추한 것, 불가능한 것)을 자신의 공간에서 생겨나게 하고, 재현의 질서에 맞추어진 형태로 규정되는 모든 "장르"와 단절되고, 다른 모든 담론을 거슬러 자신은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고 단언하는 것을 유일한 법칙으로 하는 언어의 무조건적인 발현이 되고, 마치 문학 자체의 형식을 말하는 것만이 문학 담론의 내용일 수 밖에 없기라도 한 듯이, 자기 쪽으로의 영속적인 회귀를 향해 방향을 틀기만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문학은 글을 쓰는 주체성으로서의 자기에게 말을 걸거나, 문학을 탄생시키는 움직임속에서 모든 문학의 본질을 다시 파악하고자 하며, 따라서 문학의 모든 맥락은 특이하고 순간적이지만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가장 미세한 극단, 즉 글을 쓰는 단순한 행위로 수렴된다. 언어가 퍼져 나가는 말로서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시기에, 우리는 언어가 이와는 전혀 상반된 양태로, 즉 말이 백지 위로 조용히 용의주도하게 침전하는 과정으로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데, 거기에서 언어는 억양도 대화자도 갖지 않고, 말할 것이 전혀 없으며, 오로지 자기 존재의 광채로 반짝거리기만 할 뿐이다.

...


내가 생각하기에 푸코는 이런 말을 하는것 같음.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기 때문에 늘 정확한 의미를 담고있어야한다. 그러나 문학에서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의미를 개척하는 입장이다. 언어의 성질을 통해 문학을 분석하는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문학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행위에 초점을 두어야하는것이다. 푸코의 이런 생각을 한국의 문학에 옮기면 이상의 소설을 예로 들 수 있음. 이상의 작품은 의미를 전달하기 보단 언어가 가진 신비스러운 힘을 보여주는 것 같음. 그렇기 때문에 이상의 작품은 이상의 글쓰기에 초점을 두게 되며, 이상의 작품은 마치 태양처럼 스스로 광채를 낼 뿐임.



말과 사물은 근 2달동안 붙잡은 책인데 저 파트 뒤로는 아예 읽지도 못할만큼 난해해져서 일단 다른책을 잡기로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