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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는 늘 검집에 들어가 있는 날카로운 검 같은 소설을 쓰곤 했다. 뚝뚝 끊어지는 단문과, '그는 무엇을 한다' 하는 식으로 고의로 거리두는 현재형을 거친 선 삼아 부드럽고 우아한 글을 쓰는데, 정작 그 우아한 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늘 불편할 정도로 예리하기 짝이 없다. 그것이 역사에 대한 것이든(<철의 시대>), 문학적 실존에 대한 것이든(<마이클K>, 동물에 대한 것이든(<엘리자베스 코스텔로>), 글쓰기에 대한 것이든(<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아니면 그 모든 것에 대한 것이든(<추락>). 쿳시는 늘 읽고나면 기분이 찜찜해지는 글을 썼고, 그걸 실제로 잘 썼다. <폴란드인>은 뭔가 조금 다르다. 날카로운 독기는 빠지고, 그 자리를 대신 쓸쓸한 감상주의가 채웠다. 죽어가는 늙은 폴란드 피아니스트와, 그의 추상적인 사랑에 따라갈 자신이 없는 스페인의 중년 여성 사이의 이야기. 상당히 뻔하고 쿳시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배경 설정이다. 흥미롭게도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에 더더욱, <폴란드인>은 상당히 좋은 소설이다. 그 점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를 정리해보자.


늙어가는 사내가 자기보다 젊은 여자를 탐하거나, 노쇠에 저항하는 이야기는 사실 쿳시에게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최고작인 <추락>부터가 이를 중심 갈등으로 삼고 있고, <슬로우맨>에서는 쿳시 자신의 분신처럼 사용되는 늙은 여성 캐릭터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함께 이를 삶의 고난에 문학의 고난을 병치시키는 방법으로 풀어보고자 했다. (후자에서는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던 것 같지만.) 서서히, 이 구도에서 초점은 여자를 탐내는 남자보다는 그 남자에게 탐내지는 여자에게 맞춰진다. 쿳시의 저작을 천천히 따라가보면 더 묘하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탈식민주의적 거죽-절대, 절대로 뚫고 들어갈 수 없다는 통약불가능성이라는 가히 신비주의적인 장벽-을 여자 위에 한 번 덧씌우면서까지 자신이 서술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타자화했던 여자는 서서히 생기를 되찾으며, 반대로 그 여자를 탐하는 남자는 더욱 노쇠해가면서, 뭐라고 해야 할까, 우아해진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나 <추락>에서 치안판사 및 데이비드 루리가 여자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좋게 말해도 창녀 앞에서 시를 읊는 가식적인 위선에 가까우며, 그가 차라리 조금 더 젊고 저돌적이고 '교양 없는' 태도를 보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이후 쿳시는 이런 남성 캐릭터, 혹은 외부에서 보는 자신을 좀 더 자신과 먼 곳으로 위치시킨다. 이들이 여자에게 보이는 열정과 저돌적인 행동은 더 이상 문제적이지 않고, <추락>의 데이비드 루리가 말하듯 거세된 늙은 숫캐처럼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열망을 어느 정도 스스로 떠안는 법을 배운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 타이피스트가 <추락>의 멜러니처럼 그녀를 고용한 고용주와 '스캔들'에 빠질 일은 없으며, <슬로우맨>에서는 두 말 할 것 없고, <폴란드인>에서는 좀 더 복합적이다. 어떤 식으로 복합적인가? 이제 반대로, <폴란드인>에선 사랑을 받는 여자가 그 사랑을 보답하거나 최소한 대답할 길을 찾아야 한다. 도저히 자신이 응해줄 수는 없지만, 너무나 진심이고 나름대로 정중해서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노인의 사랑. 서툰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뜻을 전하기 위한 음악, 다가오기에는 충분히 가깝지만 그녀의 생활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곳으로의 이사, 죽고 나서 전달되는 사랑의 폴란드 시. 이미 결혼하고 늙어 더 이상 자신이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여인의 마음을 흔드는, 저돌적인 욕망.


몇 번이고 <추락>을 언급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데이비드 루리가 시골에서의 첩거 생활에서 쓰고 싶었을 오페라는, 아마 <폴란드인>에 가까웠을 것이다. 사랑으로 "풍요롭게" 된 중년 여인의 슬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뜻을 겹겹의 장벽을 뚫고서 전하는 음악의 너무나 미약한 힘, 죽음 앞에서 쓸쓸하게 내려앉는 염분의 냉랭함이 세련되게 정돈된다. 그러나 루리에게는 늙은 자신을 인정하고 변할 마음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문학적 재능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반성적인 마음도 없으며, 그는 오페라에서조차 자신이 그려내야 할 여성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녀가 말할 수 있는 건, 루리 본인이 인정하듯 언어 없는 음 뿐이다. 이 기묘한 단절감 속에서 루리가 결국 자신에게 정을 붙인 절름발이 강아지를 안락사시키며 <추락>은 막을 내린다. <폴란드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폴란드 피아니스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소박하며, 그 소박함 속에서 여성과의 상상적인 관계가 다시 생긴다. 이미 죽었기에 여인 본인도 그리 현실적이라 생각하진 않는 쓸쓸한 관계지만 말이다. 이 단절을 보면 <추락>의 루리가 오페라를 쓰듯 <서머타임> 속 이미 죽은 쿳시가 <폴란드인>을 쓴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든다. 쿳시가 글 속에서 자신을 점차 타자화하고 자신의 늙음을, 죽음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 형태가 실제로 상당히 읽기 좋은-솔직히, <폴란드인> 직전 <예수 3부작>이 특별히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글이라는 것이 더더욱.


P. S. 별개로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폴란드인>에서도 일종의 아는 사람은 느낄 수 있는 아이러니한 긴장감이 있다. <폴란드인> 자체가 현대에서 영어가 다른 모든 언어를 지배하려 드는 상황에 반기를 들고자 스페인어로 쓴 글이며 소설의 배경 자체도 스페인이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 폴란드 피아니스트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말한 브라질 외의 대부분의 아메리카 지역에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한 옛 식민 언어이며, 이 스페인 여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폴란드인이 늙었으니 러시아어를-그녀가 이 늙은 폴란드인의 늙음과 떼어놓을 수 없이 떠올리곤 하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역사를 생각하며-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정말로, 떨떠름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긴장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