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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참 매력적인 이론가다. 계몽주의의 숨은 공헌자로서 당대 종교 및 정치를 비판하는 저술을 남기기도 했고, <에티카>라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형이상학을 남기며 헤겔, 니체, 들뢰즈 등 다양한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더군다나 스피노자의 도식은 지금 봐도 참 다양한 곳에 적용될 수 있어, 꼭 몸과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더라도 어떤 기틀 위에서 돌아가는 가상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퍼뜩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정확하게 들어맞을리는 없다는 것이 옛 이론의 한계이기도 하며, 현대 과학에서 실험을 통해 밝혀내거나 추정한 것이 꼭 여기 정확하게 맞을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그 옛날에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서 주장했는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틀에 어떻게 영향을 줬길래 몇 백 년 후에도 그 도식이 돌아오는지를 보면 참 흥미로울 따름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 역시 그런 흥미를 느꼈을 터이다. <스피노자의 뇌>는 기존에 다마지오가 연구해 밝혀낸 실험 결과와 이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을, 스피노자의 삶 및 이론과 더불어 설명하는, 일종의 통섭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른 책에서는 단순히 뇌과학 이론 측면에서만 설명하던 정서emotion와 느낌feeling 사이의 관계를 스피노자의 육신과 정신이라는 서로 다른 양상과 함께 풀어내는 식이다. 이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미리 정서와 느낌이라는 두 서로 다른 개념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정서는 기쁨, 슬픔, 분노, 공포 등 우리가 보통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하는 식으로 우리의 몸이 정서를 드러낸다. 느낌은,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감정이 여기에 들어간다. 우리는 정서를 물리적으로 관측할 수 있지만 느낌은 그러기 힘들거나 불가능해 보인다.


짐작했겠지만, 이는 심리철학의 주요 문제인 심신문제의 일부다. 몸을 기계적으로 분석할 수는 있지만, 그 몸과 별개거나 최소한 동일한 방식으로 분석하기 요원해 보이는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이 시대에 마음을 단순히 분석할 수 없는 영혼처럼 다루기는 쉽지 않은 일이고, 몸과 마음이 정말 분리되어 있다기에는 몸의 변화와 마음의 변화 사이의 대응 관계가 뚜렷한 편이다. (물론, 이것은 마음의 각 변화를 몸의 변화만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라는 뜻은 아니다-뇌과학은 여전히 세부사항에서는 완전히 젬병이다) 동시에, 다양한 동물 연구는 몸이 보여주는 심리적인 변화가 동물에게서도 비슷하게, 혹은 동일하게 관측된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신경계-주로 뇌-가 일부 망가진 이들이 보여주는 심리적인 문제는 정서와 느낌 사이의 연결 관계에 대한 힌트를 엿보게 해줬다. 그 연결 관계는 사실 꽤나 당혹스럽다. 


진화적으로 봤을 때, 정서는 유용한 반응이다. 특정 자극을 받았을 때 이 자극에 대한 유용한 반응을 빠르게 할 수 있도록 몸에 그 정서를 녹이며, 이 정서가 서로 "포개져서" 더 복합적인 협의의 정서(긍정적/낙관적 등의 분위기, 협력심/혐오 등의 사회적 정서 등)를 이루는데, 이들이 포개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마찬가지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생물체는 늘 변화하거나 고갈되는 자신의 몸을 유지해야 하고, 이 항상성을 위해 대사 작용을 시작으로 정서, 협의의 정서, 그리고 의식적인 느낌까지 사용된다. 식물의 경우에는 빛을 향해 휘어지는 굴성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고, 동물의 경우에는 위험한 것을 피하거나 좋은 것을 섭취할 수 있도록 온몸이 자연스레 기억하는 대로 행동하는 식으로. 그렇지만 정서는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판단은 즉각적이지만 근시안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이 정서를 어느 정도 통제하거나 오히려 유발시킬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정서가 포개지며 느낌이 생성된 이유일 테다. 하지만 이 지문을 읽으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 테다. 정서를 느낌이 통제한다고? 물론 슬픈 마음이 들 때 이를 억지로 이겨내는 식으로 통제할 수야 있겠지만, 슬픈 마음이 드는 건 이미 느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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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기이한 발견이 나온다. 우리는 감정을 느끼기 전에 그 감정을 느끼는 몸의 상태로 변화한다. 슬픔이라는 의식적인 느낌은, 얼굴을 찌푸리고 눈물이 나오며 그 밖의 온갖 신체적 변화가 생긴 '이후에야' 그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된다. 위의 첫 번째 사진은 정서가 실행되는 과정으로,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이 정서가 자극을 촉발할 역치에 도달했는지 대뇌 피질에서 판단한 후 편도에서 이를 터뜨리면 뇌의 여러 부위가 그 정서를 실행하도록 만들고, 실제로 온몸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아직 우리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슬픔을 느끼는 것은 그 다음 단계, 두 번째 사진에서 보여주는 과정이다. 대뇌 피질은 각 몸의 상태에 대한 일종의 신체 지도(체성 감각 영역)를 가지고 있어, 현재 신체 지도에 따라서 느낌을 형성한다. 이 방식은 실제 신체 상태와는 다른 방식으로 느낌을 갖거나 억제하도록 하는데에도 편리하며, 이를 위해 뇌내에서 자체적으로 엔도르핀이 생성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느낌이 반드시 신체적 변화-그러니까, 뇌내의 변화뿐 아니라 말 그대로 온몸-를 거친다는 점이다. 즉발하는 느낌조차 우리의 몸을 일부 변화시키며, 대체로 정서의 학습은 모방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는 어떻게 느끼는지를 흉내내며 배운다.


이 신체 표지somatic marker 가설은 아직 가설일 뿐이지만, 여러 실험적 증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뇌의 일부가 파괴된 환자들의 사례가 대부분인데, 어떤 환자는 아무 느낌 없는 상태에서 뇌내 전기 자극에 신체가 반응해 눈물을 흘린 뒤 뒤늦게 슬픈 기분이 들었고,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했다. 어떤 환자는 반대로 비슷하게 정서를 따라 느낌이 나왔지만, 그 기분이 든 이유를 주변의 아무 자극에서 찾으며-이를테면, 지금 본 저 색깔이 너무 웃겨서 웃었다고-뚜렷한 이유를 제시했다. 또 어떤 환자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정서 반응을 느끼면서도, 정서로부터 분리된 듯 그것이 고통스럽다고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또 어떤 환자는 이 정서와 느낌 사이의 연결고리가 파괴된 이후 자신을 위하는 행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 (이는 왜 느낌이 우리에게 진화적으로 유용했을지에 대한 단서를 준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 굳이 더 거론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이상의 내용은, 흥미롭게도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꽤나 잘 들어맞는 편이다. 스피노자는 연장-물리적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으로서의 신체와 사유로서의 정신이 동일한 실체에 대한 두 다른 양상이라고 주장했는데, 과학적인 취지에서 이를 해석하자면 물리적 전자 회로와 그 위에서 돌아가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관계와 같다고나 할까. (엄밀히 말하자면 연장과 사유 사이의 완전한 평행성 등 지적할 것이 많지만, <스피노자의 뇌>에서는 생략하는 편이 좋겠다) 생명체가 자신의 몸을 완전한 상태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추동력 코나투스conatus는 진화 과정의 핵심이었으며, 다양한 생명체에서 유용하게 발현되는 정서적 반응은 코나투스를 위해, 곧,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을 위한 것이다. 이 전체적인 실현은 사람에게나 다른 생물에게나 큰 차이가 없으며, 전체 자연이라는 물질적 세상은 사유 측면에서는 신이라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사실 이 급진적인 이론은 당시에는 주로 범신론-곧, 종교 비판-의 의미에서 공격받았지만 현대에는 그보다는 인간 조건의 해체가 더 핵심적일 테다. 우리가 영혼의 존재까지는 믿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 사이에 어쨌든 무언가 뚜렷한 구분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에는 지금 느끼고 있는 의식이 분명하고 통일성 있게 존재해 유지되고 있으며, 몸만으로는 이를 환원할 수 없으리라는 당연한 직감이 자리잡고 있으리라. 그러나 신경과학 및 인지과학은 이 의식을 연거푸 해체해내고 있으며,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의식의 통일성 자체가 매우 의심스러울 수준이다.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에서 이를 중점적으로 설명하지만, 이제는 유튜브(링크)에서도 매 순간 형성되고 보완되며 예측되는 분산된 의식의 기이함을 설명하는 걸 볼 수 있다) 덕분에 스피노자의 입을 빌린 다마지오는, 보다 더 단순한 이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몸의 상태 자체가 느낌이라고. 의식을 잃는 간질 발작 직전, 전신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끊기는 현상이 보이듯 몸을 느끼지 못하면, 의식적인 느낌도 없다. 우리는 계속 우리 몸을 느끼고 있다. 단지 그것뿐이다.


이 단언은 동물의 의식 및 고통 감응력에 대해서도 참 풀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 주는데, 이들이 어떤 식으로 고통을 느낀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네이글의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염두하는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피노자의 뇌>를 읽으며 이것이 동물이 우리와 같은 식으로 고통을 '느끼지는' 못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애석하게도 다마지오 본인부터가 이런 해석에는 반대하고 있었다.(링크) 그러나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분명 동물의 신경계의 복잡성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느낌을 촉발할 수 있는 의식을 꾸리기는 힘들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느낌을 촉발할 수 없는 느낌에 조건 반사 이상의 어떤 유용함이 있을까? 또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것처럼, 참 기괴하게도, 자신의 고통이 싫다고 느끼지는 않는 그런 동물을 만드는 것이 정말 동물 권리를 위한 해결책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충분히 해결책일 것 같다-가능하다면 나도 그런 게 필요하다) 


반면 다마지오 본인이 논하듯 그런 신체의 감각이 없는 인공지능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느낌을 갖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인공지능의 지능을 폄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동물의 의식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전자 회로와 칩의 감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에 가까우리라) 정작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 역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따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양과 음의 기울기로 구성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사람이 안팎에서 해체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더욱 깊게 알면 알수록 기분이 이상해진다. 안에서부터 우리와 비슷한 동물을 만들지 못한다면, 밖에서부터 우리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AI를 만들 수라도 있으리라는 강령이 곧 우리를 신체적으로 '모방'하는 결과물을 만들 수도 있을 테니, 그 모방이 다마지오의 주장처럼 느낌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어떨까. 두려우면서도 흥미로운 미래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