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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기분 좋은 배신을 당한 소설이다. 사실, 표지의 저 순박한 동물들과 소설 초반을 읽으며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일지는 뚜렷하게 짐작되는 편이다. 매우 목가적이고 종교적으로 숭고한 배경에서, 아직 어리고 순수한 소년이 죄악을 범하며 성장하는 교양소설. 실제로 그 짐작에 맞게 주인공인 소년 꽁스땅뗑은 남프랑스의 시골에서 조부모님들과 함께 지내며, 넘어가선 안 될 산 속의 경계를 설정당하며, 뽐내는 아이들의 도발에 넘어가거나 그 스스로의 마음에서 금지된 경계를 계속 넘어가고자 한다. 그가 사는 마을과 자연, 동식물을 묘사하는 방식 역시 이런 느낌을 강조하며,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를 비롯한 동식물을 소중히 다뤄달라는 신부의 요청과 반바지 당나귀를 다루는 저 산 위쪽의 누군가에 대한 암시까지 더하면 불보듯 뻔하다.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교사가 저 위에 있어, 금지를 범한 소년이 서서히 질풍노도의 시간 동안 교양을 쌓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게 나쁠 건 없지만 지루하긴 하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나 루소의 <에밀>처럼 정말 지루한 책들을 꼽지 않더라도, 현대의 소년/청소년 문학을 생각하면 공감할 테다)

그러나 <반바지 당나귀>는 그리 뻔하지 않다. 소설 초반에서 예상되는 상징적인 공간 자체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살고 신부가 훈화를 하는 저지대의 평탄한 마을은 여전히 세속적인 세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소년이 넘어가길 원하는, 반바지 당나귀가 찾아오는 산 위의 공간은 그런 게 아니다. 이곳은 소년이 습득할 금지된 지식이 체화된 곳이면서, 고루한 의미에서의 금지된 지식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금지되어야 할 마법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곳의 주인 씨프리엥 씨는 한때 동물을 다루는 원주민이 살던 섬에서 금지된 주문을 배워온 사람으로, 그가 오기 전에 척박했던 고원은 그의 주문의 힘으로 풍요로워져 물이 넘쳐 흐르고 과일나무가 쑥쑥 자라며, 동물들도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 그야말로 "천국"으로 탈바꿈한다. 물론 금지된 주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다. 씨프리엥이 발휘하는 힘은 동물을 자연스레 이끄는 매력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저항하고 싶어 하지만 끝내 넘어가버릴 수밖에 없는 마력에 가깝다. 씨프리엥은 이단적인 방식으로 에덴 동산과 주님의 약속(모든 동식물에 대한 소유권)을 재현해, 노쇠한 몸이 죽기 전에 이 천국을 동식물을 아끼는 소년/아담 꽁스땅뗑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에덴에 대한 비유는 계속 이어지는지, 소년과 씨프리엥 사이에는 고아 소녀/하와 이아셍뜨가 있다. 씨프리엥은 자신의 주문이 동물을 조종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내심 알고 있어, 소년에게 그 주문을 쓰기보다는 그 스스로가 이 천국의 매력에 이끌려 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소녀 이아셍뜨는 성경에서 하와가 그러했듯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피조물이며, 씨프리엥은 이아셍뜨를 조종하는 것에 크게 부담을 느끼진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씨프리엥은 본디 자신의 천국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흰 여우와, 주문에 이끌려 집 안에 자리잡았지만 언제든 무언가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악한 독코브라에 불편해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 천국 플뢰리아드에 매력을 느끼지만, 세속의 힘에 떠밀려-사실상 이아셍뜨를 조종한 격으로-나무가지를 부러뜨린 꽁스땅뗑을 본 후에야 자신의 후계자가 사라졌음에 절망하며 기어이 독코브라의 힘으로 여우를 죽이고 천국을 파괴한다. 천국의 맹약은 깨졌으며, 그는 이아셍뜨를 조종해 세속을 넘보다가 그녀를 데리고 사라진다. 천국의 맹약은 파괴되었고, 오만한 여호와/루시퍼 씨프리엥은 그의 인형을 데리고 바깥으로 떠난다. 이후 이어지는 연작들에선 이아셍뜨가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상징 가득한 소설은 거의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데, 씨프리엥이 자신의 주문에 사로잡히지 않는 여우를 증오하거나, 자신의 힘에 이끌려 머리맡에 자리잡은 독코브라를 두려워하는 모습에서는 르귄의 <어스시 연대기>를 연상시키는 동화적인 판타지의 매력이 있다. 독코브라를 조종하는 데에 실패한 무능한 피리꾼에게서 피리를 뺏어 자신의 주문을 피리를 통해 발휘하며 이를 부리는 모습이나, 그 악마적인 연주로 동물들을 날뛰게 만드는 목신 판 같은 모습은 또 어떤가? 물론, 마찬가지로 성경을 모티브로 삼은 동화적인 판타지 <나니아 연대기>와의 친연성이 제일 강하다. 둘 다 1권의 내용이 <반바지 당나귀>와 상당히 유사한 편인데,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이름을 통해 무언가를 조종하는 능력이나 낙원의 창조 및 추방이라는 서사에서 자연스레 드러난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순박하게 동화적인 판타지를 요즘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서 이런 소설은 <모모>, <꿈꾸는 책들의 도시>처럼 문학과 판타지 사이의 애매한 회색 영역에 놓여 있으며, <율리시스 무어>보다는 조금 더 문학적이고 <퍼시 잭슨>보다는 조금 더 몽환적인 어딘가에 <반바지 당나귀> 역시 놓여 있을 테다.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의 <크라바트>가 있을 텐데, 지금 꼽은 소설이 전부 독일의 동화/판타지다. 내가 현대의 판타지 소설 계보의 또 다른 선조로 톨킨 대신 E. T. A. 호프만을 꼽는 이유가 있다)

덕분에 책 말미의 역자 해제를 읽으면서 꽤나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반바지 당나귀>는 물론 공간과 기독교에 대한 온갖 상징으로 가득한 글이다. 마을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것, 산으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 집을 정해 세우고 무너뜨리는 것, 온갖 부분에 대해서 논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하지만 솔직히 그런 걸 논하지 않고 평범하게 읽었을 때 가장 매력적인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은 독자가 모두 성경 모티브를 찾아보는 건 아니듯-그리고 솔직히, 이를 찾을수록 오히려 글의 매력이 떨어지듯 말이다) 물론 앙리 보스코는 바슐라르가 "현대의 가장 위대한 몽상가"라 일컬었을 정도로 바슐라르의 공간에 대한 비평에서 충실한 재료를 마련해주는 작가이고, 이 소설 역시 역자의 이력을 생각하면 바슐라르를 통해서 닿았으리라 싶어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반바지 당나귀> 이후 이어지는 <이아생트의 정원>를 번역해주신 노고에 감사하는 바라 더 궁시렁대지는 않겠다.

P. S. 연작치고는 신기하게도 중간의 <이아생트>는 다른 역자가 맡은 모양인데, 한참 전에 절판되었던 <반바지 당나귀>가 그쯤에 민음사 문학 전집으로 재간된 것을 생각하면 다시 앙리 바스코를 선보여도 되겠다는 판단이 그때 섰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반응이 그리 나쁘진 않아서 다른 출판사의 의뢰로 삼부작의 마지막 책, <이아생트의 정원>을 번역해 나오게 된 걸까. 감상을 쓰며 든 단순한 추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