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명이 보낸 자객 앞에 목을 내밀고 앉아 있다."
1. 2016년 최고의 한국 소설 중 하나라고 불리는 정유정의 《종의 기원》입니다. 흥미롭게도 사이코패스 살인범의 시점에서 쓰인 소설입니다. 이런 유의 소설은 주인공에 몰입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어서 그것을 얼마나 잘 극복해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작가 정유정 본인도 사이코패스의 시점에서 소설을 쓰기까지 상당히 힘들었다고 하네요.
2.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점은 묘사가 상당히 세밀하다는 것입니다. 범행 현장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풍경까지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러나 사건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지 않다 보니 초반에는 쪽을 넘기는 재미가 다소 떨어지게 됩니다. 아쉬운 점입니다.
3. 정유정은 이 책의 정체성을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실제 책 내용을 보면 주인공은 처음부터 평범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초반부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고서도 자신의 손익부터 계산하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서 정유정의 의도와 책의 내용이 모순을 띠게 됩니다. 사이코패스는 변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고 책의 내용도 그에 충실합니다. 그런데 막상 테마는 변화하는 과정이라니 독자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4. 또한 이 책은 스릴러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정적입니다. 주인공이 자신이 사이코패스임을 자각하는 과정은 줄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이런저런 역동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깨달아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독자로서 자연스러운 바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정유정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친절하게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라고 쓰인 수첩을 읽는 것으로 때워버립니다.
5. 가장 흥미로워야 할 부분은 사이코패스의 심리 묘사입니다. 주인공은 초반에는 자신이 간질 증상이 있는 것 말고는 특별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주인공의 심리를 읽으면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이렇게 초반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훌륭합니다. 대놓고 살인 욕구를 동네방네 발산하면 삼류 고어물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중후반부의 주인공은 소름 끼치는 사이코패스라기보다는 반항아 혹은 자포자기한 우발적 살인범에 가까운 면모를 보입니다. 욕구에 이끌린 살인은 기억도 못 하고, 나머지 살인들은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사람이 어째서 사이코패스일까요. 정유정은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소설을 썼다고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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