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나는 가끔 먼 미래, 아주 멀어서 나의 유골조차 남지 않은 시대의 미래를 상상하곤 한다. 그때에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땅 위에 있는 동안 하고 있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땀을 흘리고 있나?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인생의 허무를 느낀다. 심지어는 나처럼 졸업하기도 전에 느끼는 사람도 있다. 과연 우리에게 세상은 무슨 의미이고, 세상은 우리를 무슨 의미로 여길까? 나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어떻게 거기에 닿을 수 있을까? 체호프의 「세 자매」는 이 질문에 대한 체호프 식의 대답이다.
체호프의 희곡이 으레 그렇듯이, 「세 자매」도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회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시들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작중 인물들은 대체로 현재를 불행히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이, 지금 헛되어 보이는 노동의 가치가 미래 세대의 행복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다. 이리나는 나아가 노동을 통해 사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삶에 이미 너무 많은 오점들을 떠안은 베르쉬닌도 자신의 세대는 행복할 수 없지만 노동을 통해 행복을 먼 미래에 물려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든 그 이상으로 각박하게 다가온다. 이리나는 실제로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지만, 자신이 꿈에 그리던 노동이 아니라 소모적이고 보람 없는 일만 하는 현실에 질려 포기한다. 투젠바흐는 아예 세상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며 행복 또한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게 된다. 마샤는 삶의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 차라리 신앙에 의지하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들의 체념은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올가와 이리나는 언젠가 모스크바로 가서 원하는 삶, 자유롭고 보람찬 삶을 살리라고 믿는다. 당장이 불행하고 행복은 미래 세대에게도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꿈꾸는 일을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체호프는 잔혹하게도 새 출발을 앞둔 자매들을 완전히 좌절시키고 만다. 올가에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생업의 굴레를 씌우고, 이리나에게는 새 출발을 함께 할 동반자를 빼앗은 것이다.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나타샤에게 점점 잠식당해가는 가정집과, 이미 질릴 대로 질려서 더는 낙관스러운 변화를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땅이다.
자매들은 이 불행을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미 일어난 일, 이미 처한 불행을 혼자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이리나는 동반자 없이 홀몸으로 모스크바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교착 상태에 힘없이 머무는 것보다 힘들더라도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을 열망한 것이다. 올가는 애초에 빠져나갈 수도 없던 교장 일을 계속할 것이다. 미래가 어떨지는 도저히 알 수 없고, 그 미래를 위해 일하는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도 도저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모스크바라는 꿈이 좌절됐으니, 이제 늘 머무르던 그 땅에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 살기로 한 것이다. 마샤는 애초에 결혼이라는 사슬 때문에 모스크바를 꿈꿀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삶은 계속될 것이고, 그게 어떤 삶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이라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기로 한다.
세 자매의 태도는 결국 '앞으로'라는 말이 당장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 좋은 삶이 펼쳐지리라는 막연한 믿음으로는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삶은 항상 새로운 국면을 제시할 것이고, 그때마다 사람은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혹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매들이 꿈꾸던 대로 모스크바에 간다고 해도, 머지않아 모스크바의 현실은 그녀들이 다른 이상을 새로 그리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살게 되면 모스크바에 대해 무관심해질 겁니다. 우리에게 행복은 없어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건 단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다만 각박한 조건 속에서도 사람은 언젠가 무언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자신이 나아질 수 없다면 자신의 희생으로 미래 세대가 나아지리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 언제 오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 꿈도 계속된다. 그렇다면, 존재조차 불투명한 행복이 아니라 머릿속을 항상 따라다니는 원대한 꿈을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우리 존재의 의미는 결국 우리가 남몰래 결정해놓고, 죽을 때 우리의 육신과 함께 묻히게 돼있다. 누구도 그것을 기억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스스로 정한 삶의 의미는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에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지탱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기억될지, 우리 생에 행복이 언제 올지 보다 우리가 지금 꿈꾸는 것을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야 한다. "세월이 지나가면 우리는 영영 떠나가고, 결국엔 잊히겠지. 우리의 얼굴, 목소리, 우리가 몇 명이나 있었는지 다 잊힐 거야. 하지만 우리의 시련이 우리 뒤에 살아갈 사람들에게는 기쁨으로 바뀔 거야. 이 세상에는 행복과 평화가 오고,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를 따스한 말로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감사할 거야. 오, 사랑하는 내 동생들아, 우리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아가는 거야!" 올가가 자신의 행복과 결별하며 남기는 인사말이다. 가릴 수 없는 슬픔이 묻어있지만, 동시에 희망이 소심하게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지는 대사다. 올가의 믿음이 철학적으로 옳고 그르고를 떠나, 올가가 그렇게 믿고 앞으로를 견뎌갈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올가가 열성으로 가르친 덕분에 많은 학생들이 삶을 준비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올가는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행복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스스로의 운명, 특히 이미 스스로 선택해서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도 불투명하다. 하지만 앞으로의 삶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우리는 꿈을 가지고 산다. 그 꿈이 여전히 자신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의 행복을 깔끔히 체념하고 미래로 향하는 것이든, 그 꿈을 위해 일하며 산다면 마지막 순간에 적어도 삶이 의미가 없었노라고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내 삶을 괴롭히고 있다면, 대답을 하기 위해 멈추기보다 내가 늘 되뇌던 그것을 믿고 계속 걸어가 보자.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구도 모른다. 결국 모스크바행 차표를 끊는 것도, 모스크바를 단념하고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스스로가 마음을 먹고 해나가야 할 일이다. 행복을 자신에게 끌어 올 수 없어도 자신이 세운 목표만은 지키자.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삶의 형식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형식을 잃게 되는 겁니다."라는 말을 기억하며, 어디로 갈지 모르는 이 인생이라는 길의 끝까지 가보자. 이것이 내가 「세 자매」를 통해 배운 교훈이다.
추천을 안할수가 없구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