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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꿀잼


일단 서문부터 엄청난 책23덕후이자 SF덕후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해줘서 기대가 되었다


단편 모음집이라 단편 하나하나 이야기하겠다



1.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


은근하게 불을 지펴서 '아... 그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진부하지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익숙한 배경이지만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거리를 채우다 집 안까지 침범한다


결국 해결되는 것은 없고 삶은 파멸 이후에도 이어진다


파멸 이후에도, 파멸이 있다. 그래도, 살아야한다


성 대결을 시작할 생각은 없지만, 여성 작가 특유의 분위기라고 할까, 그런 게 있다. 약한 건 아니고, 무책임한 것도 절대 아니고,


그냥...하여튼 몬가몬가임. 짧았고, 나쁘지 않았고, 기대를 더 부추긴 이야기였다



2. 리알토에서


이건 좀 별로였다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 전개 방식도 양자역학적으로 배치해서 상승효과를 노렸다


그런데 양자역학 그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이제 낡았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시대적 한계일 것이다


여기에 헐리우드라는 배경을 이용해 50년대~70년대의 영화 얘기가 우르르 쏟아지는데 그런 거 난 모른다고!


덕분에 난잡하고 어지럽기만 했다


내가 이해 못 한 건가 싶어서 챗지피티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3. 나일강의 죽음


이것도 아주 재미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좋아하지만, 하필 '나일강의 죽음' 은 읽어본 적도 영상 매체로 본 적도 없다


'리알토에서' 처럼, 20세기 초중반의 미국 대중 매체를 적극 활용한 어지러운 전개가 이어진다. 나일강의 죽음 소설과 영화 또한 당연히 주요 소재다


위 두 작품은 결이 상당히 비슷하다. 나는 여기서 또 챗지피티를 소환했으며, 또 신통찮은 답변 앞에서 실망했다



4. 영혼은 자신의 사회를 선택한다


이건 물론 재미없었지만 작가에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에밀리 디킨슨과 그녀의 시가 주요 소재인데 나는 디킨슨도 시도 잘 모르고, 또 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감성이 변하는 것은 작가의 탓도 번역가의 탓도 아닐테니 말이다


어쨌든 이해하지 못 하긴 했으며, 이 즈음에서 책을 놓아버릴 유혹을 많이 느꼈다



5. 화재 감시원


이건 재밌었다


초반엔 먼가 설정이 애매하고 허술하며 묘사가 역시 난잡하여 이것도 앞의 단편들처럼 병신인걸까 하며 반신반의했는데


그런 사소한 생각을 모두 날려버릴만한 인간적인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전개부에서도 독자가 길을 잃지 않게 잘 안내했고.


시간 여행에 관한 애매한 설정에 대해 후반부에 직접 언급하는 모습은 좋았다. 후속작이 있다고 하니 아마 후속작에서 풀어나가지 않을까 싶은데


하지만 어쨌든 괜찮은 정도였다. 나는 아직 사랑에 빠지진 않았다. 후속작을 읽을 확신은 없었다



6. 내부 소행


이것도 역시 괜찮았다


'화재 감시원' 도 그랬고 이 이야기에서도, 아니, 이 책의 남은 모든 이야기들에서, 작가는 독자를 완전히 휘어잡는다


복잡하게 꼬인 어지러운 미로 속에서 춤추는 레이저 불빛을 따라가는 고양이가 된 것처럼


나는 기분 좋게 헤맸다. '앞 단편에서 내가 느끼지 못 한 것들을 아마 심사위원들은 느꼈나보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별 의미 없는 놀음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 재밌는데.



7. 여왕마저도


이게 이 단편집의 최고작이다


대화의 향연... 캐릭터와 문장으로 테트리스를 하는 느낌, 토대를 세우고 받침을 끼워넣고 득점. 빌드업의 반복. 상쾌하게 사라지는 웃음들. 그리고 또 득점. 득점, 득점, 득점.


심지어 어지럽지 않다


90-00년대 미국 시트콤 감성이 짙게 살아있는 대화의 티키타카


드디어 나는 이 작가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페45미니즘. 넓게 보면 페67미니즘적인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끔찍한 모습을 한 페565미니즘을 지지하는 이야기나 작가는 절대 아니며, 이야기를 읽어본다면 누구라도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한해선, 르 귄 누나랑 논조가 비슷하다. 그러니까, 제정신이면 그런 걸 지지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8. 마블 아치에 부는 바람


재밌었다


이미 사랑하게 되어서 그런지 정말 글이 쫀쫀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순식간에 읽어나갔다


어찌보면 낡은 소재긴 하다 이것도. 양자역학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야기에 담긴 통찰은 보편적인 것이라고 느꼈다


차가운 시간과 무거운 세계를 반죽해 만든 텁텁한 파운드케이크에 낭만적 사랑을 한 스푼 올려서 완성...이라고 해야하나


저 지저분한 영국 지하철 튜브를 왜 좋아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나도 기회가 되면 한 번 타보고 싶어졌다



9.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이 단편집에서 두 번째로 좋은 작품이다


이야기의 구조는 '내부 소행' 과 비슷하다. 작가가 던지는 떡밥을 따라 복잡하고 즐거운 미로를 쏘다닌다. 그 끝에는 좀 더 상쾌한 엔딩이 있다


그리고 역시 00년대식 로맨스.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주제 자체는, 절대적 타자에 대한 인간적 상상의 한 결과물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솔라리스' 를 재독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요즘 계속 솔라리스가 연상되는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709327&page=1),


이 이야기 역시 솔라리스와 반대 방향이지만 그대로 반대로 가버린다. 어떻게 반대로 가는지 한마디만 더 적으면 스포일 것 같아 지워야겠다. 어쨌든 꿀잼이다, 이것도.



10. 마지막 위네바고


약간 모자라긴 했다. 재밌는 이야기들 중에선 최하위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재미없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다


쓰다보니 이야기가 좀 길어진 것 같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좀 더 깔끔하게 끝내는 방법이 있었을 것 같다.


기술에 대한 대책 없는 믿음과 광신적인 생태주의와 정치적 음모에 짓눌려 존엄을 지킬 수 없게 된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지금 우리들을 발견한다



부록들


역시 서문처럼 작가의 책사랑 SF 사랑을 깊게 느꼈다. 좋은 이야기였다



총평 : 코니 윌리스는 이제 믿고 빌리는 이름으로 기억해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