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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비판하는 선생님의 새 책을 잘 보았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네발로 기어다니는 습관을 포기했습니다." 볼테르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 남긴 편지다. 인간 찬가, 진보에 대한 믿음이 미덕을 넘어 의무였던 당대 지성사에 루소의 자리는 너무도 비좁았다. 인간이 애써 이뤄낸 문명이 실은 악의 본산이니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루소는 저작으로 자신의 신념을 계속 피력했다. 이는 반대파들에게 새로운 과녁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종교계의 집요한 공격은 그가 프랑스에 발조차 붙이지 못할 정도로 삼엄했다. 공격의 정점은 볼테르가 교육철학에 한 획을 그은 「에밀」을 지은 루소가 자기 자식들을 고아원에, 그것도 다섯 명이나 버렸다는 사실을 폭로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담론에서도 불리하던 루소는 이 공격으로 도덕적으로도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루소는 이를 해명하고 자기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에서 「고백록」, 「대화」를 남겼으나 전황을 뒤집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루소는 결국 아웃사이더로 여생을 보내다 세상을 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1년이 지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루소는 이 대사건의 사상적 지주가 된다. 혁명 후 그의 유해는 위인들을 위한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이장된다. 그것도 볼테르의 곁에 이장됐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의 유작이다. 미완성작이기도 하다. 이 책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마침내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나 자신 말고는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교제할 사람도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이토록 음울한 첫 문장이, 그것도 자서전에서 나온다. 루소의 지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루소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된 존재임을 자각하고, 세상에 대한 탐구를 전개하지 않는다. 대신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힘쓴다. 이 자기 탐구를 따라가다 보면 함께 우울함에 젖게 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루소의 모습을 통해 독자 자신의 모습, 나아가 인간의 모습을 함께 알아갈 수 있다.


루소는 자신의 괴로움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또 자신의 죄를 억지로 감추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가해진 공격을 막연히 나쁜 것으로만 보려 하지 않는다. 물론 그 의도는 나빴지만, 니체의 명언이 생각나는 말을 꺼내 응수한다. "나를 박해하던 자들은 증오심을 온갖 수단으로 표출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적대감 때문에 정작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그들이 적대 효과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여감으로써 내게 언제나 새로운 타격을 입혀 고통을 지속시키고 되살아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루소는 자신의 괴로움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믿게 됐다. 그것은 세상이 부여한 부당한 무게가 아니라, '장자크 루소'라는 한 인간으로 남기 위해 해내야 하는 의무다. 따라서 루소는 가혹한 공격들에 악에 받쳐 저항하기보다, 그것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기로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운명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자. 투덜대지 말고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우자. 모든 것이 결국에는 순리를 따르게 되어 있으니, 조만간 내 차례가 올 것이다."


그렇게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자신만을 바라보니, 새로운 것이 보인다. 루소는 혁명적인 사상을 주장했지만, 루소가 만년에 깨달은 자신의 진정한 목적은 '민중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라모트 섬에 피신하며 보낸 시기를 꼽는다. 이 시절 루소는 무위(無爲)를 체험한다. 어떤 강박적인 목표 없이 자신의 흥미가 가는 대로 식물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입씨름할 필요 없이 혼자서 자신만의 생각을 길러나가는 자체가 정말 즐거웠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느낌 외에 박탈이나 향유의 느낌도, 쾌락이나 고통, 욕망이나 공포의 느낌도 전혀 없는 상태, 또한 우리의 존재감만이 영혼 전체를 채울 수 있는 그러한 상태가 있다면, 그 상태에 있는 자는 그것이 지속되는 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사람들과 부대끼는 사회에서 루소는 어떤 존재였던가. 분명 그의 지지자들에게 박수를 받았고,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루소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장자크 루소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멋대로 구상한 '장자크 루소라는 캐릭터'로 소비됐음을 만년에 깨닫는다. "나로서는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봐주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 편이 더 낫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나 대신 자신들이 만들어낸 장자크, 제멋대로 미워하려고 그들 마음대로 만든 장자크만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를 보는 방식에 마음이 상한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다. 나는 그것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를 강조하던 그의 사상, 자연 상태를 역설하던 그의 사상 모두가 무위와 자연과 자유를 사랑하던 성향의 투영이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낙원을, 그것도 유독 남달랐던 낙원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낙원을 관철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었다. 논쟁에서 이기려면 기계적이어야 한다. 자기 사상에 대한 어떤 반례도 자기 삶 속에 들어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루소는 스스로 인정하듯이 결함이 많은 인간이었다. 아니, 철저히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끝까지 굽히지는 않았지만, 그 믿음을 남들에게 주장하기에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실컷 물어뜯기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됐으니 너무 늦은 셈이었다. 하지만 늦게나마 그것을 발견한 덕분에 그는 만년에 자신이 그리던 자유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강요하고 남들보다 우위에 서려는 것은 자만심이고, 이런 충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믿음을 철저히 내면적으로만 성숙시키는 것이 자기애다. 루소는 만년에야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 열 개의 에세이를 남겼는데, 열 번째는 미완성이니 사실상 마지막으로 완성된 아홉 번째 에세이를 들여다보면 이런 말로 시작한다. "행복이란 항구적인 상태로, 이 세상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어 변함없는 모습을 지니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이 말은 즉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 일 자체가 헛되다는 뜻이다. 어차피 사람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자신의 옳음을 결정하게 되고, 이를 논쟁으로 끌고 오면 싸움은 철학적 논쟁을 넘어 삶의 모든 부분을 검토 받는 진흙탕 싸움이 된다. 결국 자신의 옳음은 철저히 자신의 내면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오히려 인정을 불허할 틈을 만들 뿐이다. 우리는 차라리 외면이 아닌 내면에 얽매여야 한다.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시대가 검토한다. 역사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단지 우리는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혹은 때가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수상(隨想)을 써나가야 한다. 해설이 말하는 대로 내면의 탐구로부터 내면의 향유로의 전환하는 일, 이것이 루소가 만년에 깨달은 삶의 방향이었다.


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도 「사회계약론」도 인상 깊게 읽었지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 가장 인상 깊었다. 고백하자면 나도 소심한 성격을 타고났지만 고집은 센 편이다. 그래서 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일을 따라 하는 것이 아직도 어렵다. 자신에게 흥미가 가지 않는 것은 굳이 따를 필요를 못 느꼈고, 설령 관심이 없더라도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억지로 동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내 곁에는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 있다. 이들과 지금 맺은 관계는 피를 나눈 사이만큼이나 끈끈하다고 자부하지만, 그런 믿음이 배신당한 적도 여럿 있기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가 영원하리라는 믿음은 어느샌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루소의 삶을 본다. 내가 상상하던 루소는 혁명의 기수였다.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고, 자신의 논적에 열렬히 반박하여 끝까지 자신의 불꽃을 퍼뜨리는 사나이였다. 그러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한 진짜 루소는 사상을 제외한 모든 것이 평범한 사람이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관철할 수는 사람, 적들로부터 승리하고 싶지만 천성부터 논쟁에 불리한 사람. 나는 루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내 모습과 닮은 그의 내면을 보니 기쁘고 또 위안이 된다.


결국 자신의 성향이 사상에 투영됐다는 성찰에는 극히 공감한다. 인생에 결정적인 체험을 겪지 않고 사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없다. 루소는 자유에 대한 사랑을 타고났고, 그로부터 싹튼 루소의 정치철학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유를 필연적으로 역설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후대의 사람들이 루소가 말한 자유를 어느 정도 곡해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통해 만년의 루소를 보면 프랑스 혁명 때에 그가 살아있었더라도 엄청 기뻐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단지 모든 소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고, 이를 확장해 만인이 자유로운 세계를 꿈꿨을 뿐이다. 자신의 자아가 국가의 형태를 강요하는 광경, 자신을 신처럼 신봉하며 가만 놔두지 않는 민중들을 그가 썩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 루소가 만년에 깨달은 진정한 자유란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다. 불필요한 논쟁, 지키기도 힘겨운 가식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 없이 진정한 자신으로 살며 자신의 생각을 성숙시키는 조용한 삶이 루소의 이상이었다. 물론 루소는 앞선 저작들을 통해 혁명의 필요성을 암시해왔다. 하지만 볼장 다 본 루소가 내린 마지막 결말이 무시되고 혁명에 관한 사상만 알려지는 것은 안타깝다.


누군가는 루소의 만년을 보고 '결국 저항을 포기한 뒤에 보내는 자기 위안'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루소에게 여력이 충분히 있었다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훨씬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저작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비판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라고 응수하고 싶다. 루소가 지성사에서 지위를 지키기 위해 보였던 행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페르소나를 만들기를 허락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도 억지로 사상과 행적 사이의 모순이 발각당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자유로우려면, 최대의 행복을 이루려면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일이 먼저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 언제 쓰여 내용이 어떻게 변했든 루소는 언젠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 나온 깨달음에 도달했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모든 아웃사이더들에게 루소를 대신해서 공감과 위안을 보내고 싶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성격이 좋지 않거나 무언가 결함이 있어서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이때 우리가 그 소외에 대한 앙갚음으로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존재일지언정 틀린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기 힘들어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방 한편에서 자기가 꾼 꿈을 도화지에 그릴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닐 것이며, 우리의 생각이 인정받으리라는 생각도 일찌감치 단념해두는 것이 낫다. 하지만 내면에서 나오는 우리의 진정한 목소리에 따르면 적어도 믿음을 억지로 억눌렀다고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인정받지 못하면 어떤가.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를 알기 위해 생각한다. 생각을 통해 우리의 의지에 점차 다가갈 수 있다면, 우리는 객관적이지 않은 모습일지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믿음을 루소를 통해 얻었다. 남은 것은 내 생을 통해 증명하는 일이다. 이 믿음을 검증하는 일을 홀로 있는 이들에게 조심스레 권해본다. 우리는 뭉쳐서 세상을 바꿀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고도 행복에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이제 멀고 먼 것이 됐다. 인간 사회의 탄생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고, 사람들은 스스로 들어온 집단 안에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자신으로 돌아가라." 나는 그 말을 믿어보려 한다. 외부에 기대지 않고 진실한 모습으로 내가 원하는 내 삶을 일구는 데 묵묵히 임해보려 한다. 내 앞길에, 그리고 함께 걷지는 않지만 각자의 길을 홀로이 끈기 있게 걷는 모든 사람들의 앞날에 축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