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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다 읽었다. 아랍인을 죽여 법정에 선 뫼르스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죄'로 사형을 당하는 이야기.
《이방인》을 읽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그 유명한 도입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냉소적인 그 도입부의 충격적인 문장 또한 어느정도 이유의 지분을 차지했었지만, 내가 《이방인》을 읽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저자인 알베르 카뮈가 삶의 부조리를 다루는 작가라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삶의 부조리. 삶은 근본적으로 그 목적이 없으며 결말은 언제나 죽음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우리가 살면서 겪을 그 어떤 사건과, 관계와, 감정과, 사상들도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겨우 내 몸만한 관짝 한 칸 안에 모조리 들어가 갇히는 바, 내가 ‘나’라는 존재를 벗어날 수 없는 한 수많은 나의 의지와 시간들은 죽음이라는 예정된 결말로 향하는 비효율적인 과정들(효율적인 과정은 물론 자살이다)일 뿐이라고. 때문에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으며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없다고. 그가 《시지프 신화》의 서두에서 “진실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한 가지, 자살의 문제다.”라고 말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이리라.
《이방인》의 뫼르소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그는 감정이 희박하다. 그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분야는 오로지 식욕이나 육욕을 위시한 몸의 감각들 뿐이며, 그 외의 모든 활동들—가령 예를 들면 어머니의 사망도, 그 사망에 바쳐지는 애도의 물결들도, 이웃의 치정싸움도, 자신의 혼사도, 혹은 자신의 승진도, 심지어는 살인행위마저도 스스로에게 어떠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그는 믿는다. 여자친구 마리의 “날 사랑해?”라는 질문에 뫼르소가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아닌 것 같아.”라고 대답한 진짜 이유는 그가 마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종국에 가서는 사랑마저 의미없는 일이 되리란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결말 앞에서 모든 가치는 빛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삶에 끼어 있는 허무라는 이름의 희뿌연 막을 지울 수 없다.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의 삶에 있어 이방인이다.
이방인의 죗값은 재판에서 무게달아진다. 아랍인을 살해한 죄로 법정에 선 그에게, 재판관과 검사는 추궁 끝에 뫼르소가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장례식 바로 다음 날에 연인과 영화를 보고 물놀이를 했으며, 자신이 죽인 아랍인의 시체에 총탄을 네 번이나 더 박아 넣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검사는 이러한 사실들을 나열하며 “사실상 뫼르소에게는 영혼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고, 인간다운 점도, 인간들의 마음을 지켜 주는 그 어떤 도덕적 원리도 없다”고 말하고,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적 공허가 어떤 구렁텅이가 되어 사회 전체를 삼켜 버릴 수도 있다”고 배심원들에게 경고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들이 참작되어 뫼르소에게는 사형이 구형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죄, 장례식 다음 날에 연인과 영화를 보고 물놀이를 한 죄, 이미 죽은 아랍인의 시체에 총탄을 네 발 더 박아넣은 죄로. 그 죄들에 비하면 ‘아랍인을 죽였다’라는 사실은(적어도 소설 내에서는) “까다롭기는 하지만 뫼르소가 재판에서 이길 것이 틀림없는” 하나의 사고에 지나지 않으며 그저 뫼르소를 법정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단초일 뿐이다. 그 스스로의 삶에서 ‘이방인’이었고, 재판 앞에서마저 이방인을 벗어나지 않았던 죄로, 뫼르소는 응당히 ‘효율적’인 과정을 부여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전혀 아이러니하지 않게도) 사형이 결정된 이후부터야말로 비로소 뫼르소는 삶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포착할 수 있게 되지만, 그 감정 또한 자신의 이성 앞에서 잠시의 취기처럼 지나갈 뿐이다. '사람은 당연히 죽고, 지금 살아남아도 피차 자신과 죽음 사이의 유예가 늘어날 뿐이다, 무의미하고 무감흥인 시간들이 이십 년이나 삼십 년 정도 더 들어찰 뿐이다, 그러니까 사형에 대한 내 상고가 받아들여지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기뻐할 일도 아니다, 그리고 만약 상고가 기각되더라도 그것은 전혀 슬퍼하거나 아쉬워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정합성과 논리로 몇 겹이고 무장한 뫼르스는 면회로 찾아온 신부의 기만에도 넘어가지 않고서 끝끝내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저항을 멈춘다. 그는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형제같음”마저 느끼며 마음의 안식을 되찾고, 뫼르소는 처형만을 기다리며 《이방인》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자신의 처형식에서 대중이 증오하고 분노하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바라면서.
알기로 카뮈는 《이방인》의 미국판 서문에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보려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뫼르소는 원하지 않은 채 태어나 의미없는 인생을 살아가야하는 현대인의 부조리를 대속하고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한다. 뫼르소의 삶이나 태도가 숭고하기까지 한지는 의문스러우나, 적어도 《이방인》을 읽으며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 ‘부조리에 저항해야 한다’는 문장의 편린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는 가치가 없으나, 그 무가치에 저항하는 일 만큼은 가치있는 일이다. 삶이란 채워낸 무언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채워내는 과정들을 일컫는 말이니까. 죽음을 삶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의 과정을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니까.
무의미의 허무함 앞에 나약해지는 나를 위해 뫼르스가 대신 죽어주었으니 이제 나는 살아야겠다. 그리고 한 여름밤의 모기마냥 무의미가 자꾸 나를 찾아와 성가시게 할 때마다 나는 《이방인》을 꺼내들어 나 자신 대신에 뫼르스를 죽여야겠다. 고마워요 뫼르스!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 dc App
C'ex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