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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적으로도 참인 명제이다.


예술이 사상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은 예술작품을 미적으로 판단할 때 사상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에 사상이 들어가서 싫다는 얘기는 곧 너님이 예술작품을 판단했을 때 가장 우선순위로 사상을 고려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로 예술에서 사상을 철저하게 배제하려면 할수록 너는 철저하게 사상에 종속된 예술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보자.

소설의 의무란 현실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 [1984]에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건지 근거를 알 수가 없다.

전체주의는 어디 역사 속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개인의 일상을 감시하고 사상과 감정까지 통제하려 드는 일이 어딜 봐서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웰이 한 일은 현실의 일부를 농축하여 극단까지 밀고 갔을 뿐이다.


그렇다면 오웰에게 '소설가의 능력'이 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윈스턴이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굴복하는 심리를 묘사

전체주의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텔레스크린, 빅브라더 등의 상징을 통해 한줄요약

윈스턴, 줄리아, 오브라이언의 인물 구도를 통한 배경 내에서의 사건의 분출, 과 그를 통한 공동체의 인물화

이정도면 꽤 읽을만 한 소설의 형식 아닌가?


[1984]에 글쓰기 형식의 기깔난 재발명 같은 것이 정말 없을까? 신어, '진리부', '애정부' 같은 언어적 요소를 통해 독자마저도 디스토피아의 풍경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트릭은 어떠냐?

기억통, 텔레스크린 같은 사물의 묘사라던가 사회구조에 맞는 건축양식 설명 같은 SF적인 요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 권력의 비대화, 언어의 통제를 통한 사고의 통제,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 전체주의 체제 속에서도 피어나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감정, 이런 모든 것들이 있을 법 하도록 느끼게 하는 작가의 과학적 상상력.


오웰의 소설이 정치적 주장이 주된 목적이라고 해서 이런 것들을 배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애시당초 너가 [1984]를 읽었을 때 그런 것들을 배제한 이유는 무엇이었냐?

'예술은 사상을 배제해야 한다'와 '조지 오웰의 소설은 사상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편견에 빠져서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예술에서 사상을 철저하게 배제하려다가 오히려 사상에 철저하게 종속된 한 사례인 것은 아닐까?



추신)

정치적이지 않은 줄 알았던 작품이 사실은 알고보니 지극히 정치적이었다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는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색채가 없는 객관적 자전적인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뒤 맥락을 좀더 파보면 2010년대 후반 포퓰리즘과 비관주의, 탈진실의 트렌드 등을 등에 업고 도널드 트럼프가 집권한 정치적 현실을 겨냥한 책이기도 하다.

빌 게이츠가 미국 대학생들한테 지 돈 주고 책을 뿌린 데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